부모님의 문화적 빈곤을 딛고 키운 나의 취향
남편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7살때 생일인가 크리스마스 선물로 짝퉁 알라딘 비디오 테이프를 받은 일을 들려줬다. 디즈니 알라딘에 심취한 언니와 나를 위해 엄마가 구해온 것이었는데 애석하게도 디즈니의 알라딘이 아니었다. 생소한 그림체와 등장인물의 목소리에 몹시 실망했던 기억이 난다. 선물 고르는 이의 마음까지 헤아릴 아량이 없을만큼 마음의 크기가 어렸던 시절이다.
지금 그 일을 돌이켜봤을 때 나를 가장 슬프게 하는 건 짝퉁 알라딘을 선물받았다는 사실이 아니라 디즈니와 디즈니가 아닌 것을 추릴 줄 몰랐던 그 당시 엄마의 시선이다. 그때의 엄마는 최선을 다했던 것이다. 매일 알라딘, 이아고, 자스민 따위의 이름을 중얼거리는 딸을 위해 고심해서 선물을 골랐을 것이다. 엄마의 잘못이라면 디즈니 그림체를 판별할 줄 몰랐던, 디즈니 로고 유뮤의 차이를 몰랐던 문화적 빈곤함 뿐이다. 엄밀히 따지자면 그건 잘못이 아니다. 딸이 소비하고 즐기는 것이 무엇인지 자세히 알아볼 심적 여유가 없었던 그때의 상황이 진짜 문제였다.
디즈니와 디즈니 아닌 것을 몰랐던 엄마가 최선을 다해 나를 키운 덕에 나는 디즈니와 픽사를 구분할 줄 아는 눈을 갖게 됐다. 제임스 카메론과 리들리 스콧의 의의와 차이 정도는 설명할 줄 아는 취향도 갖추게 됐다. 나는 부모님의 문화적 무지라는 토양에 취향이라는 씨앗을 파종해 나만의 정원을 가꾸게 됐다. 그래서 나는 가끔 부모님의 고루한 라이프스타일이 답답하다가도, 그 알라딘 테이프를 생각하면 가슴이 먹먹해지는 것이다. 나의 고상함에 취할 겨를이 없어지는 것이다. 연출자가 아닌 영화 타이틀로 영화를 기억하는 부모님 덕에 연출자와 각본가까지 가려볼 수 있게 된 내 삶에 약간의 부채의식을 지니게 되는 것이다. (다행스럽게도 지금의 엄마 아빠는 다양한 취향을 갖춰도될만큼의 여유를 가지게 됐다.)
엄청난 나르시시스트는 아니라서 ‘어려운 유년기를 보냈음에도 취향의 꽃을 피운 나’에 취할 겨를 따위 없다. 나는 분명 엄마와 아빠의 시간의 수혜자다. 그렇다고 또 ‘제 삶에 감사합니다. 사랑으로 보답하겠습니다‘를 선언할 정도의 엄청난 효녀도 아니라서, 이 불편한 진실은 영원히 아물지 않는 생채기처럼 불시에 부어오른다. 의지와 무관하게 이 세상에 태어나 발버둥치며 살아가는 나라는 존재와 그 존재의 발버둥이 어느 정도의 방향성을 갖추도록 물심양면으로 지원하는 부모라는 존재. 혈육이야말로 비합리적이고 비이성적인 감정과 선택의 총체인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