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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작은손 Aug 09. 2021

수능등급제 다음으로 접한 등급제는 바로 결혼 시장이었다

세속적인 나와 순수한 나의 싸움 (feat. 예비 신부)

2년 전 ‘30대 여자가 모두 예비신부인 건 아니잖아요’라는 글을 썼던 내가 지금 앙큼하게 결혼준비를 하고 있다. 아직은 법적으로 누군가의 아내가 아니지만 결혼 시장에서 내 호칭은 ‘예비신부님’으로 바뀌었다. 처음엔 이 호칭이 오글거리고 낯설었는데 이제는 익숙해져 버렸다.


애석하게도 결혼을 준비하는 동안 펼쳐진 모든 여정이 꽃밭은 아니었다. 나와 상대방의 경제력, 부모님의 지원, 양가의 입장, 나와 상대방의 취향 등 다양한 변수를 하나의 선택으로 귀결하는 과정은 정말이지 머리가 아플 지경이었다.


가장 머리프게 하는   속에서 상충하는  가지 욕망이었다. 전제 하나를 말하자면 나는 결혼식에 대한 특별한 로망이 없는 인간이었다. 웨딩 생태계의 특성이나 드레스 디자인 이런 것도 아예 모르던 상태였다. 하지만 ‘웰컴  예비 신부 문이 열린 순간 수만가지의 선택지 속에서 허덕이기 시작했다.  과정에서 발견한  뼛속까지 내재된 못된 ‘등급제였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유통되는 모든 재화와 서비스가 그렇겠지만, 결혼 시장도 마찬가지로 등급이 지배하는 세상이다. 나는 업체의 인지도와 인스타그램 팔로워 수를 기준으로 드레스 업체를 골랐다. 메이크업 숍은 유명한 연예인이 오가는 곳을 기준으로 선택했다. 그나마 내 취향을 반영해서 고른 건 스튜디오 하나뿐이었다.


내 경제력이 허용하는 선에서 최선의 선택을 한 것 같은데도 어쩐지 가슴이 답답하고 초조했다.이 감정을 ‘메리지 블루’라고 치부하기엔 예비 신랑은 흠 잡을 데 없이 좋은 인격을 지닌 사람이고, 이 사람과 함께할 미래를 의심한 적은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간헐적으로 솟구치는 이 찜찜한 기분의 근원은 무엇일까. 실마리는 오랜 친구와의 대화에서 찾았다.


나: “너 드레스 업체는 어디였어?”
친구: “아 나 ㅇㅇ에서 했어. 홀이랑 연계된 곳이라 선택의 여지가 없었네”
나: “헐 거기 비즈 화려하고 비싼데 아니야? 너 근데 엄청 수수한 거 입잖아”
친구: “아 그런거였어? 몰랐네. 그냥 거기서 제일 심플한 거 달라고 했어”(웃음)


업체의 ‘등급’ 같은 건 안중에도 없었다는 친구의 회고에 나는 머리를 한 대 얻어 맞은 기분이었다. 나는 업체의 팔로워 수, 명성, 연예인 이용 유무 같은 잣대에는 혈안이면서 진짜 내가 원하는 것은 무엇인지 생각해보지도 않았다. 내가 느꼈던 공허함의 정체는 오롯이 웨딩 시장의 ‘등급’만을 기준으로 선택한 데서 온 현타였던 것이다. 내게 결여됐던 것을 깨달은 순간 놀랍게도 불안감이 사그라들었다.


이날 나는 내 안에 뼛속까지 자리 잡은 ‘급 따지는 습관’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비단 결혼 뿐일까. 고백하건대 대다수의 선택이 ‘급 따지기’의 연속이었다. ‘이 정도 대학은 나왔으니 최소 나와 동급인 남자와 어울려야지’, ‘내가 이 급은 되는 것 같은데 지금 이 회사는 내 수준에 못 미쳐서 못 견디겠다’는 식의 사고방식의 주인공이 바로 나였던 것이다.


돌이켜보면 모든 행복했던 순간엔 급 따질 겨를도 없었다. 급이랄 것도 없었던 백수 시절 친구들과 온기를 공유했던 기억, 브랜드는커녕 제조사조차 제대로 알 수 없는 물건을 그저 예쁘단 이유로 사고 ‘득템했다’며 방방 뛰던 여행의 추억. 내게 행복감을 안겨줬던 순간의 가장 큰 지분을 차지한 건 나의 효용이었다. 나는 이 중요한 진리를 망각한 채 결혼 준비를 마치 등급 대결처럼 임하고 있었던 것이다.


나 같은 인간에게 결혼 준비는 양가적인 감정을 가져다준다. 예비 신부에게 허용된 짧은 시간 동안은 온갖 예쁜 선택지에서 황홀하게 허덕일 수 있지만, 큰 선택을 내릴 때마다 나라는 인간에게 내재된 속물성과 남의 시선으로부터 휘둘리는 취약함에 노출돼 괴롭기도 하다. 아주 취향이 확고하거나 그냥 남들 하는 건 다 해야 한다는 주의면 좋겠는데 애매하게 두 속성을 다 가지고 있어 혼란스럽다. 앞으로는 하나만 파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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