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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애송이 Dec 15. 2019

28살의 기타 사용법

8년 만에 다시 기타를 배우기 시작했다.

"아앜..." 출근 후 메일 창을 열고 '안녕하세요'의 안녀..ㅇ자를 다 쓰기도 전에 나도 모르게 고통스러운 탄식이 새어나왔다. 키보드 자판을 누를 때마다 왼손가락 검지, 중지, 약지 끝에서 징-하며 쓰라린 진동이 울렸다. 새로운 곡을 연습하기 시작하면 겨우 굳은 살이 배긴 손가락 끝에 또 다시 새로운 줄 자국이 새겨진다.


기타를 배우기 시작한지 어느새 6개월째. 따가운 여름 햇볕이 지독하게 느껴지던 7월의 어느 날, 나는 기타 학원에 등록했다. 무려 8년 만이었다.

 


첫 수업날, 연습실 문 앞에 서자 마치 소개팅 장소에 도착한 것 마냥 긴장과 설렘이 뒤섞여 가슴이 두근거렸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앳돼 보이는 남자 선생님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어색한 인사를 나누고는 기타와 악보를 받아들었다.


어설픈 폼으로 기타를 무릎 위에 올려놓고 왼손으로 유일하게 기억하고 있는 G코드를 슬며시 짚어봤다. 혹시 기타를 배운 적이 있냐는 선생님의 질문에 8년 전 몇 개월 깔짝댄 게 전부이니 그냥 처음부터 알려달라고 말했다. 첫 곡은 A, E, D코드가 반복되는 '섬집아기.' 분명 다 아는 음, 예전에 배웠던 코드인데도 내 손가락은 마치 슬로우가 걸린 듯 멍청하게 움직였다. 악보와 기타 위를 두 눈과 손가락으로 정신 없이 훑는 내 모습이 왠지 웃겨서 수업 중간중간 나도 모르게 피식 비웃음이 새어나왔다. 그렇게 악보 속 음표와 기타 줄 사이를 허둥지둥 뛰어다니다가 첫 수업이 끝났다.   


악보를 가방에 넣고 학원 문을 나서며 '이곳에 오길 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기타를 치는 그 한 시간 동안만큼은 어떤 잡생각도 내 머릿속을 비집고 들어오지 못했기 때문이다.



8년 만에 다시 기타 학원에 다니기로 마음 먹은 이유는 취미보다는 '생존'에 가까웠다. 당시 나는 연인의 갑작스럽고 일방적인 이별 통보에 몸과 마음 모두 닳을대로 닳아 있는 상태였다. 하루하루 눈에 띄게 바스라져가는 나를 맥없이 바라보기만 하던 어느 날, 문득 이대로 가다간 정말 내 자신마저 잃어버릴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완전히 닳아 없어지기 전에 뭐라도 붙들고 일어서야 했다. 그 도구로 기타를 선택하는 데에는 그리 오랜 고민이 필요하지 않았다.


어떻게든 다시 제대로 살고 싶다는 절박함 때문이었을까. 나는 8년 전 처음 기타를 배웠을 때보다 훨씬 빠르게 기타에 빠져들었다. 유치원 때 이후로 들어본 적 없던 각종 동요들이 내 작은 손가락 끝에서 익숙한 선율로 흘러나오는 게 신났고, 그 선율 위에 내 목소리를 슬쩍 얹을 때면 수많은 관중을 앞에 두고 공연을 펼치는 아이유라도 된 것 마냥 마음이 붕-떴다. 음악을 들을 때도, 정신 없이 일을 하는 와중에도, 친구를 만나 밥을 먹을 때도 문득문득 '아 기타 치고 싶다'는 생각이 떠오르는 횟수가 점점 잦아졌다. 퇴근 후에는 가방을 바로 던져놓고는 옷도 갈아입지 않은 채 1시간 씩 기타 연습을 했다. 야근을 하고 12시에 집에 돌아오는 날에도 마찬가지였다. 주말에는 2~3시간씩 기타를 붙들고 있다가 기타 옆에서 깜빡 잠이 들기도 했다.



모든 고통에는 시간이 약이라고 했던가. 그렇게 6개월 동안 일주일에 한 번 꼬박꼬박 기타 수업이라는 약을 챙겨 먹자 어느새 내 왼손가락 끝에도, 그리고 내 마음 깊숙한 곳에도 굳은 살이 배기기 시작했다. 어두운 방 안에 앉아 혼자 서툴게 기타를 치며 노래를 부르는 내 모습이 좋아지기 시작했고, 열심히 연습해서 선생님께 칭찬이라도 받은 날에는 대단한 일을 해낸 것 마냥 뿌듯함이 온 몸을 가득 채웠다. 무엇보다 내가 나의 행복을 위해서 이렇게 새로운 도전을 할 수 있는 사람이라는 사실이 나를 다시 일으켜세웠다.


요즘 나는 동물원의 '널 사랑하겠어'를 배우고 있다. 언젠가 다시 누군가를 사랑하게 된다면 기타를 치며 이 노래를 꼭 불러주고 싶어서다. 이별의 아픔을 이겨내기 위해 다시 배우기 시작한 기타로 이제 나는 새로운 사랑을 준비하고 있다. 기타가 앞으로 내 삶에 또 어떤 마법 같은 순간들을 가져다줄지 두고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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