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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예지 May 26. 2021

어엿한 작별과 떳떳한 혼자

<혼자 사는 사람들>이 남긴 것

혼자 사는 사람들 Aloners (2021)

홍성은 감독


참 신기하다. 가끔 전혀 상관없는 것들이 서로가 서로를 위해 지금 이 순간 내 인생에 등장한 것처럼 연결된 상태로 내 앞에 나타난다. 25일 아침에 <일간 이슬아> 오혁 인터뷰 상편을 읽고 나서 혁오 앨범을 정주행 하기 시작했는데, 그날 본 <혼자 사는 사람들>에서 2002 월드컵 이야기가 나온 것. 그래서 영화를 보며 그날 내내 들었던 혁오 앨범 <23>의 수록곡 "2002 WolrdCup"을 떠올리는데 1초도 걸리지 않은 것. 집에 가는 길 <23> 수록곡 중 내가 가장 좋아하는 곡 "Paul"을 오랜만에 주의 깊게 듣게 되었는데 전에는 분명 슬펐던 가사가 이상하게 위로가 되어있는 것을 알아차린 것. 오래간만에 아무것도 듣지 않고 고요하게 잠들게 된 것. 아무것도 아닌 우연들이 갑자기 누군가 준비해둔 이벤트처럼 하루를 휩쓸고 지나간다. 이런 하루를 보내고 나면 모든 것을 결정하는 것은 늘 아무것도 아닌 것에서부터 시작하는 게 아닌가 하고 생각하게 된다. 바꿔 말하면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했던 것이 사실은 모든 것과 다르지 않다는 것을 깨닫는다. 작은 프로폴리스 스프레이 하나가, 빈 의자 하나가, 어쩌면 모르고 지나쳤을 사람 하나가 진아를 움직이게 한 것처럼. 


귀찮은 신입 교육, 엄마의 죽음과 엄마의 이름으로 말을 걸어오는 아버지, 성인 잡지에 깔려 죽은 이웃과 그를 위한 제사를 차리는 새 이웃, 고장 난 케이블과 영상 속 엄마와 아버지. 모든 것이 따로 존재하면서 한꺼번에 우르르 진아의 인생에 쳐들어온다. 혼자라는 것이 환상에 불과한 것처럼. 늘 누군가가 어떤 방식으로든 침범해 들어온다. 이때 <혼자 사는 사람들>의 '혼자'는 결코 물리적인 혼자에 얽매이지 않는다. 함께 있어도 혼자가 될 수 있듯이 혼자인 동시에 함께가 될 수 있다. 의도적으로 연결을 차단하는 진아가 스스로를 혼자가 편한 사람이라고 규정짓고 있을지 몰라도 사실은 단 한 번도 제대로 혼자인 채로 있어본 적이 없는 것처럼 말이다. 


<혼자 사는 사람들>은 서로 혼자인 채로 혹은 혼자라고 믿는 채로 사는 사람들 사이에 어떤 연결의 희망으로 작별인사를 꺼내 든다. 사람이 죽어나간 집이 아니라, 집에서 홀로 죽은 이에 주목하는 것. 어차피 돌아오지 않을 사람을 붙잡는 대신 떠나간 사람에게 제대로 인사하는 것으로 보이지 않는 연결을 확인한다. 옆집의 제사가 없었더라면, 진아가 수진에게 전화를 걸지 않았더라면, 진아와 아버지의 통화는 지금과는 전혀 다른 의미로 다가왔을 것이다. 어엿한 작별이 떳떳한 혼자를 가져온다. 결코 위태롭지 않은 형태로. 다시 한번 신기하다. 온갖 방향에서 불어온 바람이 결국 꽃씨를 옮긴다. 꽃 한 송이를 피운다. 온갖 바람이 불어온다. 


영화를 보면서 눈물을 찔끔 흘렸는데 아마 내가 해내지 못한 수많은 작별과 함께 영화 속 얼굴들에서 나의 얼굴을 찾기 때문일 것이다. 홀로 죽은 사람이 내가 될 수도 있다는 현실과 그럼에도 나에게 정성 들여 인사를 건네 줄 사람이 있을 것이라는 바람이 얼굴을 바꿔가며 찾아온다. 카메라 너머의 사람과 나 사이가 이어폰만큼 가깝게 느껴지다가도 결국 우리는 각자 섬처럼 떠있다는 것을 안다. 그 엄청난 거리에도 불구하고 나는 연결되어 있음을 믿는다. 나는 오늘도 혼자라는 환상에 빠진다. 이 세상에 나 혼자라는 환상. 홀로 밥을 먹고, 혼자 영화를 보고, 혼자 잠드는 것만으로 혼자가 되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짧은 노랫말 하나에 그 환상에서 깨어난다. 지금 내가 혼자 인 것은 사실이지만 동시에 환상이란 것을 잊지 않는다. 혼자 사는 사람 뒤에 붙은 '들'이 점점 더 크게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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