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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EKKI May 29. 2021

기억상실이 유행인 세계에서

<애플>이 남긴 것

애플 Apples (2020)

크리스토스 니코우 감독


<메멘토>(의 결말에 대한 이야기를 살짝 할 예정입니다. 메멘토를 안 보셨다고요? 메멘토에 대해서 아무것도 듣지 말고 읽지 말고 보세요. 저는 조금도 말하고 싶지 않아요.)는 단기 기억상실증에 걸린 남자가 자신의 기억의 파편 속을 헤매는 이야기다. 그의 삶의 목표는 단기 기억상실이라는 병으로 인해 끊임없이 벽에 부딪치는데, 결말을 본 사람이라면 모두 알고 있겠지만, 사실 단기 기억상실증은 방해물이 아니라 생존본능에 가깝다. 온전한 기억 속에서는 더 이상 살아갈 수 없는 이가 선택한 삶은 단절된 기억 속에서 반쪽자리 목표를 쥐고 미스터리 안에 남는 것이었다. <이터널 선샤인>은 기억을 매개로 낭만적인 사랑을 이야기한다. 딱 원하는 만큼의 기억만 지울 수 있는 세계에 사는 두 사람은 사랑하는(혹은 했던) 이의 기억을 지우는 일로 유명한 시의 한 구절, "사랑하라, 한 번도 상처 받지 않은 것처럼"을 수행할 수 있다고 믿는다. 하지만 기억은 예기치 못한 방식으로 돌아오고 그들은 상처 받은 마음을 껴안은 채 사랑을 시작한다. 두 영화는 모두 기억을 지우는 방식으로 자신이 직면해야 할 상실의 아픔과 더불어 상실 그 자체를 지워버리고자 한다. 


<애플>의 세계는 <이터널 선샤인>의 세계만큼이나 독특하다. 갑자기 기억 상실증이 유행병처럼 도는 세계다. 이 병은 너무나 흔해서 국가 시스템까지 구축되어 있다. 기억을 잃은 사람들은 지정 병원으로 이동하게 되고, 신원파악이 가능하거나 찾으러 오는 가족이 있는 환자는 자신의 기억을 공유하고 있는 공간과 사람에게 되돌아간다. 하지만 이 영화의 주인공은 두 가지 모두에 해당되지 못하는 사람이다. 최소한의 정보도, 찾아오는 이도 없다. 어느 날 그는 버스 안에서 잠든 뒤 기억을 잃은 채 종점에서 깨어났을 뿐이다. '14842'라는 번호를 지정받은 그는 국가에서 지원하는 회복 프로그램에 참여한다. 미션이 녹음된 테이프를 받고 폴라로이드로 증거 사진을 남기며 새롭게 인생을 시작한다. 자전거를 배우고, 다이빙을 하고, 영화를 보고. 폴라로이드에 찍힌 장면은 앨범의 새로운 기억으로 채워진다. 하지만 남자는 자신보다 몇 단계 앞서 프로그램에 참여한 안나를 만나면서 지난밤의 추억이 오늘의 미션이 되어 날아오는 경험을 한다. 수동적으로 쌓아 올린 기억과 체험은 추억이 되지 못하고, 그 순간 오고 간 감정이 거짓이 아니라 할지라도 그 진심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우리가 치르는 인생의 과업들이 정말 미션이 되어 나타난다면, 우리가 인스타그램에 올리는 수많은 사진이 사실 수행해야 할 임무에 지나지 않는다면, 그것은 어떤 의미를 지닐 수 있을까? 그것이 우리가 배우는 인생의 모든 것이라면. 14842가 쌓아 올린 정사각형의 인생이 인스타그램 페이지와 그리 달라 보이지 않는다.


어딘가 기묘한 세계와 소소한 미션이 만들어낸 에피소드에 웃으며 영화를 감상하다 그 미션이란 것의 허무함과 마주할 때 즈음, 남자는 새롭게 시작한 인생에서 상실을 마주한다. 자신의 비밀을 털어놓은 상대의 죽음이 바로 그것이다. 이때쯤 기억을 잃은 남자는 없다는 것을 안다. 기억을 잃은 남자가 아니라 기억을 지우고 싶을 만큼 아픈 남자만이 남는다. 기억상실증을 자처했던 남자가 놓고 온 기억에는 가장 견디기 힘든 상실이 자리 잡고 있다. 14842. 그가 부여받은 번호는 14,841명의 기억상실증 환자의 존재를 의미한다. 기억을 잃어버리는 유행병과 기억을 지우고 싶을 만큼 아픈 상실 사이의 연결고리를 떠올린다. 사라진 기억과 새로운 인생, 거대한 상실과 상실 이후의 삶. 모든 사랑하는 사람은 기억을 두고 떠난다. 더 많이 사랑할수록 더 그렇다. 떠나간 이후를 살아가는 방법이란 그냥 그 기억 속에서 사는 수밖에 없다. 유행병에 걸려 기억을 모두 잃어버리는 행운 따위는 없기 때문이다. 다시 제집으로 돌아간 남자가 익숙하게 정리하는 옷가지와 애쓰지 않고 놓인 사과는 이 유행병의 백신이다. 난 자리를 정리하고 썩은 부분은 도려내며 다시금 기억하는 것. 놓았던 사과를 다시 주워 담는 것. 이 남자는 <메멘토>의 레너드처럼 미스터리 안에 남지도, <이터널 선샤인>의 조엘과 클레멘타인처럼 똑같은 실수를 반복하지도 않는다. 모든 것을 기억하는 사람만이 누릴 수 있는 온전한 사과의 맛을 즐긴다.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그날 이후, 그 맛은 우리의 본분이나 다름없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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