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문을 열고 현관문을 들어 서면 나를 반기는 건 오직 전날 먹은 떡볶이 플라스틱 용기일 뿐이다.
하루 종일 나의 모든 무게를 버텨주던 또각 구두를 벗으니 이제야 집에 들어온 것만 같은 기분이 든다.
봄이 다가오고 있는 3월, 혹자는 봄일 수도 있는
지금, 왜 나는 한 겨울 12월에 살고 있는 걸까. 온몸이 쓰라리고 추워 누군가 나를 감싸줬으면 하는 바람이 나의 온 방을 감싸고 그 바람을 이불 삼아 잠에 드는 하루도 나만의 봄이라며 애써 둘러대며 잠에 든다.
하나밖에 없는 창문 바로 앞, 나뭇가지에 앉아 있는 새 두어 마리가 나를 깨우는 소리에 멍하니 천장만 바라보았다. 평소대로라면 기계음이 묻어나는 소리를 들으며 짜증과 아쉬움으로 일어났겠지만, 오늘부터 난 백수이기에 몇 시에 일어나든 상관이 없었다. 따스한 햇빛을 보며 일어나도 늦었다고 뛰어나가지 않아도 되고, 버스를 놓칠까 전전긍긍하지 않아도 된다는 스쳐 지나가는 생각만으로 뭔가 모를 편안함이 느껴졌다. 대학 졸업 후 바로 중소기업의 사무직에 취직하고 6년을 단 하루도 쉰 적이 없었다. 사람의 인생으로 따지면 그리 길지 않고 그저 삶을 이루는 작은 부분이라고 볼 수 있는 6년, 의자가 꺼지도록 앉아 한숨이 회사 안을 가득 차게 할 만큼 쉬며 6년을 보냈다. 얼마 전 입사 동기이자 남자친구였던 그이와 만남을 접었고, 같이 12년을 함께한 반려묘가 세상을 떠났다. 어릴 적 다니던 교회서 분명히 말했다. "하나님은 우리가 견뎌낼 수 있는 만큼의 고통을 주십니다"라고 말이다. 그는 분명히 말했다, 견딜 수 있는 고통이라고. 나는 아직도 그 말이 진실이기를 바라며 자리에서 일어나 이부자리를 걷었다.
나는 오늘자 비행기를 타고 일본으로 갈 것이다. 왜 일본이냐는 물음에 답을 해보면 간단하다. 세상 어떤 이보다 내가 가장 힘들 거라는 멍청한 생각이 나의 머릿속을 뒤집고 있을 때 유튜브 알고리즘에 의해 일본 홋카이도에 사는 한 유튜버의 일상을 보았다. 그저 행복해 보였다. 불도 키지 않은 채 이불속에서 한 없이 무기력해하는 내 세상과 영상 속 세상은 너무나 다른 세상 같았다. 마치 흰색 물감으로 온 세상을 칠해둔 듯한 홋카이도의 절경은 나의 결심을 낳았고 지금 내가 공항으로 떠나는 이유이기도 하다. 얼마 만의 바깥나들이인지, 3월이 봄이긴 봄이구나라는걸 새삼 다시 느낀다.
터미널에 도착해 한쪽에 짐을 두고 혹시 모를 상황을 대비해 잠시 화장실에 들렀다. 오랜만에 느끼는 여유로움에 공항에 도착하면 김치찌개를 시켜 먹고 면세점 구경하다 비행기를 타고 홋카이도에 도착해 우동 한 그릇 먹을 상상을 하며 화장실 문을 열려한 것뿐이었는데 누군가는 나의 여유로움이 아니꼽지 않았던 건지 문이 갑작스레 열리지 않는다. 이게 무슨 일인가. 하필 지어진 지 얼마 안 된 터미널이라 시공은 더럽게 잘 되어있어서 내가 쳐도 부서지지 않을 거 같다. "문이 안 열려서 그런데 관계자분 불러주실 수 있나요?"라고 크게 소리쳤지만 아무런 대답도 인기척도 느껴지지 않는다. 방금 전까지 엄마에게 휴게소에서 회오리 감자를 먹고 싶다는 아이의 목소리와 손 씻는 소리로 채웠던 화장실은 꿈을 꾼것마냥 소리친 그 순간부터 정적이 흘렀고, 이게 무슨 상황인가, 싶어 핸드폰을 확인했지만 통신이 안 터진다. 통신이 안 터진다니 아니 이게 21세기에 심지어 2개월 전 완공된 터미널에서 일어날 일이야? 나 오늘 일본 가야 하는데.... 112를 쉼 없이 누르고 전화를 걸어도 걸리지 않고 쓸데없이 문만 높고 내 키는 턱없이 작아서 더 이상 나갈 방도가 생각나지 않는다. 변기에 앉아 커다랗고 깊은 한숨을 쉬다가도 이곳도 회사마냥 한숨으로만 그득 채우고 싶지 않았다. 그래 이렇게 좋게 시작하면 나의 인생이 아니지... 가 아니라 너무나 억울하다. 수로 따질 수 없을 만큼의 고민의 결과인 사직서, 새로운 시작을 기약하는 것의 시발점인 터미널 화장실 변기에서 이런 상황이 생긴 것이 너무나도 억울하다. 앞으로 버스 출발까지 22분이 남았다는 사실에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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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윤아 씨 맞으신가요?"
문을 두드리는 소리와 함께 남자인지 여자인지 구분이 안 가는 목소리로 누군가 나에게 말을 걸어왔다. 이건 또 무슨 일인가 문 밖에 있는 저 사람은 나의 이름, 심지어 개명 전의이름을 어떻게 알고 있는 건지, 그리고 10여 분만의 정적의 끝이 나인지 아닌지 물어보는 질문? 내가 여기에 뭐라고 대답을 해야 하는 거지?라는 당황과 함께 "네..??"라는 대답을 하였다. 너무나 당황스럽고 이질감 드는 이 상황, 물음표 만으로 나의 시야를 채워버린 지금, 나는 그저 버스를 타고 공항을 가고 싶은 마음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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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날에 어떤 날은- 1화 마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