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주 오광봉 할아버지 이야기를 본 뒤, 알고리즘이 부쩍 따뜻해졌습니다.
덕분에 무심코 넘기던 화면 사이로 '어느 치과 의사 이야기'를 만날 수 있었습니다.
원장님을 만날 때마다 밝게 인사하던 중학생 남자아이. 어느 날은 그 아이가 쭈뼛거리며 원장님을 찾아왔다고 합니다. 부모님은 안 계시고 할머니와 단 둘이 사는데, 그만 할머니 틀니가 낡아 이제 사용을 못하신다고.
혹시 치료비 대신 화장실 청소를 할 테니 틀니를 해주실 수 있는지 물었다고 합니다.
원장님은 아이가 부감 갖지 않도록 말씀하셨습니다.
"돈은 안 줘도 괜찮아. 대신 공부 열심히 해야 한다."
그 뒤로 아이는 꼭 원장님께 인사를 하고 위층 독서실로 올라갔다고 합니다. 때론 모르는 수학 문제를 물어보러 들리기도 하고요. 그러다 어느 날, 독서실이 사라지면서 아이도 볼 수 없게 됐다고 하는데요.
몇 년이 지났을까. 그 아이가 원장님을 다시 찾아왔다고 합니다. 의대생이 되어서요.
저는 오랫동안 누군가를 돕는 일은 큰 결심, 거창한 무언가가 있어야 한다고 여겼습니다.
사명감으로 내 것을 양보해야만 비로소 '좋은 일을 했다' 할 수 있는 거라 생각했지요. 그래서 좋은 사람이 되고 싶을 때마다 어깨에 힘이 들어갔습니다. 내가 충분히 도움이 됐는지 계속 확인도 했고요. 돌이켜보면 그렇게 힘주어 뻗은 손은, 상대를 위한 것보다 나 자신을 증명하려는 것 같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영상 속 두 사람에게는 전혀 그런 기색이 없었습니다.
원장님에게 사명감은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소년도 보은을 다짐하며 비장하게 돌아온 건 아니었고요. 그저 한 사람은 조용히 자리를 내어주었고, 다른 한 사람은 그 자리를 기억하고 다시 찾아온 것뿐이었습니다.
마음의 곁을 내어준다는 건, 그런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삶의 볕이 드는 자리에 빈 의자를 꺼내 두는 일. 억지로 끌어다 앉히는 것도, 내 것을 무리하게 양보하는 것도 아닌, 그저 누군가 잠시 쉬어갈 수 있는 만큼으로.
"저도 원장님 같은 의사가 될 거예요."
5년 만에 어엿한 의대생이 되어 찾아온 소년의 말을 듣고 눈물을 글썽인 원장님. 지쳐가던 자신의 삶에 큰 위로의 선물을 받은 것 같다고 말씀하시는 모습이 제 마음에 계속 남았습니다.
우리는 흔히 베푸는 사람과 받는 사람이 따로 있다고 생각합니다. 주는 쪽은 잃고, 받는 쪽은 얻는다고요. 하지만 삶은 꼭 그렇게 나뉘는 것 같지 않습니다. 기꺼이 비워둔 자리가 오히려 내 삶을 채워주는 순간도 있으니까요.
어느덧 봄이 왔습니다. 어제는 집 앞 공원을 걷다가 볕 아래 놓인 벤치를 만났습니다. 가만히 앉아보니 엉덩이에 닿는 나무의 감촉이 따뜻했습니다. 저기 반대편에서는 우당탕탕 달려오는 아이들 소리가 들렸습니다. "저기 벤치로 가자아!"
저는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습니다. 벤치를 비추던 볕을 그대로 남겨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