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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행인 Jun 09. 2024

유혹인가 장난인가

대리기사 김 대리의 운행일지 (1) 작성일(2009. 7. 24.)

사십 대 중반 신용불량자 신세이던 시절, 대리운전 일을 했습니다. 이른바 세컨드 잡, 아니 써드 잡이었지요. 잡지 편집에 논술 강사에, 세 번째로 밤이면 하는 일이었습니다. 김 대리이던 시절, 끄적여뒀던 일화들을 하나씩 풀어봅니다. 돌이켜보니 벌써 15년 전이네요. 지금하고는 많이 다른 시대이니, 그 시절 이야기로 읽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_김 대리 杏仁


<먼저 간략한 인물소개: 대리운전하는 동안 3년 가까이 나를 단골로 불러 준 어느 레스토랑 여사장, 차량은 BMW. 나이 50대 중반쯤? (본인 주장 50세). 젊은 시절 언더 가수였다고 하며, 평탄치 않은 세월을 보낸 듯함. 가족이 없는 듯함. 가게 단골손님을 위해 몇 번 부르더니, 나중엔 오히려 자기 차를 자주 맡김. 한 달에 네댓 번 정도 부름.> 

3년 전 어느 가을날, 추적추적 비 오는 밤에 헐레벌떡 달려가 보니 반질반질한 외제차. 빗길이라 앞도 잘 안 보이고 혹 사고 날까 봐 천천히 운행했던 건데, 정작 차 주인은 운전을 아주 편안하게 해 준다고 받아들인 것이죠. 기분 좋았는지 어쨌는지 3만 원이나 팁을 얹어줍디다. 그 후 대리운전 맡길 때마다 아예 직접 나를 부르는데, 열 번 부르면 서너 번이나 가고, 대개 사무실에 얘기해 다른 기사를 보내곤 했지요. 내가 원래 시외 운행을 자주 하는 편이라, 공교롭게도 시외에 나가 있을 적이 많았거든요. 전라북도 밖으로 나간 적은 흔치 않지만, 도내 시, 군은 안 가본 곳이 없지요. 

내가 자주 못 가는데도, 한번 박힌 내 인상은 고정돼 있었나 봅니다. 내가 갈 때마다 늘 고마워하며 후한 팁을 얹어 주고, 때론 잠시 기다리는 동안 커피를 주기도 했지요.

귀가 길 대리운전하다 집으로 향하지 않고 두어 시간 시외로 드라이브를 한 적도 대여섯 번 있답니다. 이 분이 답답하다며 바람 쐬겠다고 해서요. 이럴 때 기사 입장은 ‘불편&엉거주춤’이지만 수입이 짭짤해지니 그냥 휭 하니 갔다 오는 거죠. 

수고해 줘서 고맙다고 낮에 식사하러 오라고 한 적 있지만 아니라 하고 가지 않았지요. 자정 넘어 집 앞에 차를 댔을 때 집에 들어가서 차 한 잔 하고 가라 했을 때에도 아니라 하고 들어가지 않았지요. 여자손님이 차 한 잔 하고 가라 한 경우가 어쩌다 한 번 있기도 하지만, 절대 사양이지요. 그이는 자신이 나보다 겨우 세 살 위라 말하지만, 내보기엔 대여섯은 충분히 더 들어 보입니다. 그이는 본인 맘대로 내게 말을 놓습니다. 말을 놓든 말든 나야 운전 잘해주고 수입 올리면 그뿐이지요. 

어젯밤 12시가 다되어 그이가 나를 불렀습니다. 얼큰하게 취했더군요. 운전을 하며, 이제 대리 그만할 거라고 말했지요. 내가 부업하는 건 알고, 달리 하는 일이 글 선생이라는 정도로 알고 있습니다.

“섭섭하네” 하더니, 조금 뒤 “답답한데 용담댐이나 한번 가자” 하는 거예요. 한데 그 말투에서 풍기는 느낌이 왠지 꺼림칙해서 이렇게 대답했지요.

“저 사장님, 제가 내일 아침에 일찍 나가봐야 돼서 오늘은 사장님 모셔다 드리고 후딱 들어가야 합니다. 픽업해 주는 동생도 송천동으로 오라 했거든요?”

“그래?” “그럼 어쩔 수 없지. 그냥 집으로 가줘!”

조금 뒤 그이 다시 하는 말, “대리 그만해도 내 부르면 올 수 있지 않나? 대리 안 하니까 오히려 필요할 땐 금방 올 수 있을 텐데.”

“글쎄요. 밤 시간도 다른 일 많이 있겠지요.”

“뭐 말이 그래, 되면 되고 안 되면 안 되는 거지” 약간 높아진 음성. (엄마? 웬 신경질?)

“아마 거의 불가능할 겁니다.”

“아마가 뭐야 아마가? 남자가 말을 확실하게 해야지?” (엄마? 사람 피곤하게 하시네?)

“제가 이제 대리 안 할 거니 어려울 것 같네요.”

............. “그럼 언제까지 하는 거야?

“이번 주 일요일까지요.”

............. “OO 씨!”

“네?” 3년이나 단골이니 제 이름이야 알지만 지금껏 제 이름을 부른 적은 없습니다. 가게 종업원 부르듯이 ‘삼촌!’ 하는 정도가 호칭이었지요.

“왜? 이렇게 부르면 안 되나?”

“아니, 갑자기 그렇게 부르시니.....”

......... “우리 말 놓자! 내가 가족도 없고 이제껏 남자친구 하나도 없어! 앞으로 말 놓아!”

그냥 그러겠다고 하고 넘어갈 걸, 왜 그 순간 반항했을까요? 하기야 반항 안 했으면 이야기가 또 어찌 될지도 모르지요.

“제가 운전도 못 해 드릴 텐데요?”

“아아니, 말 놓으라니까! 친구 하면 가게에 놀러 와서 밥도 먹고, 술도 한잔 하고, 그래야 자주 만나지. 대리 안 하면 오늘 같은 날 내 차 끌고 우리 집에 같이 와서 놀다 가도 되잖아? (에그머니. 이 양반 성격 참 화통하네!)

“아. 예에.....”

“왜 대답을 흐려?

“아이고 사장님 혼자 계신 집에 어떻게 함부로 놀러 가겠어요?”

“아니 뭐 어때서? 내가 놀러 오라는데. 왜? 내가 너무 늙어서 싫어? 자기도 같이 늙어가면서 뭘 그래?”........(자기라굽쇼? )

“나 같은 여자 만나기가 쉬운 줄 알아?”.........(나 같은 여자라고? 이 무슨 뉘앙스?)

“나 아직도 인기 많아! 가게에 오는 손님들 보면 몰라? 전부다 멋쟁이들이고, 잘 나가! 나 혼잔 줄 알고 어떻게 해보려고 안달들이지! 친구 해주기는 너무들 삭아서 탈이지만.....”

........(이 양반이 취했나?)

차가 달리는 동안 그이는 점차 혀가 꼬부라져 가고 있습니다. 결국 못 참고 한 마디 던집니다.

“사장님, 오늘은 저한테 듣기 좋은 농담도 하시네요? 오늘 약주가 과하셨나 봐요”

“과하긴 뭘 과해? 이제 대리기사 안 한다며? 그러니까 편하게 놀러 오라고 얘기하는 거지....... 딴소리하지 말고, 자기 내 친구 하는 거야?”

“어...... 아니, 한 번도 그런 생각을 안 해봐서.....” 그 사이 차는 아파트 주차장에 도착했습니다.

“그럼 동생을 하든지..... 내가 좀 양보하지 뭐! 누님이라고 불러봐!”

“아이고, 참 내..... 너무 그렇게 몰아붙이지 마세요!”

“잘해 줬더니 내 말을 무시하네? 지금 싫다는 거야?”(그럼 사장님은 지금 떼쓰시는 거요?)

“아이고, 뭘로 보나 누님이시죠! 이제 들어가 쉬셔야죠?” 빨리 들어가게 하려고 어영부영 누님이라고 말하며 인사를 합니다. 하지만 그이는 차에서 내리질 않습니다. 시동을 끄고 차 열쇠를 빼내 넘겨줍니다.

“사장님, 열쇠 받으세요!”

“사장님이 뭐야? 제대로 불러봐!”

“아이고! 누님, 여기 열쇠 있습니다.” 마음이 내키지 않지만 어서 이 상황을 벗어나려고 응해 줍니다.

“엎드려 절 받네. 자기 그럼 자주 놀러 오는 거야?” (와. 이 화끈한 멘트. 어쩌라고요?)

“예. 예! 어서 들어가세요!”

“알았어. 들어가는 거는 내가 알아서 할 거니까. 빨리 약속이나 해!” (움마 가깝 헌 거.....)

“예. 예! 그럴게요.” 얼른 내려 차 옆에 서 있습니다. 대리비 받아야지요.

“오늘 대리비는 외상 해! 낼모레 내가 또 전화할 거니까. 그때 줄게?” (엥? 이건 또 무슨 시추에이 송? 에라. 모르겠다.)

“잘 가 OO 씨!”

“예. 그러세요. 고맙습니다! 들어가세요.” 후다닥 몸을 돌려 빠져나오는 뒤통수가 따갑습니다.

오늘 대리비 못 받은 거야, 그냥 말더라도 손해 볼 거 없다고 칠 수 있습니다.

그나저나 이거 하루 이틀 사이에 틀림없이 또 부를 텐데, 어떻게 해야 할지 신경 쓰이네요. 술 취해서 한 소리라 다 잊어버리면야 편하겠지만. 이 연장선상에서 무슨 말을 또 한다면 불편할 텐데. 그냥 아는 누님 한 분 생겼다고 속 편하게 생각하고 살아도 될지 모르나, 도저히 마음 내키지 않습니다. 이거 참, 난감하네요? 아무리 생각해도 다음 일곱 가지 방법 중 하나를 택해야 할 텐데, 과연 어떻게 하는 게 좋을까요? 

(1) 아예 전화를 받지 않는다.

(2) 전화를 받아 먼데 가 있다고 둘러댄다.

(3) 가서 만나 냉정히 뚝 잘라 말하고 그이가 어떻게 하든 상관없이 거절한다.

(4) 가서 내 입장을 분명히 밝히며 그이를 설득한다.

(5) 그냥 적당히 둘러대고 어영부영 돌아온다.

(6) 그냥 그이가 하자는 대로 하는 척하고, 경과를 보아 점점 멀리 한다.

(7) 일단 그이의 말을 들어주면서 함부로 행동을 해 스스로 멀리하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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