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딧불들이 가진 최대의 매력은 희소성인 것 같다.
물론 역설적이게도, 그들이 희소성을 가지게 된 것은 인간의 무신경함 때문이지만 말이다.
아내는 아이들에게 반딧불이를 꼭 보여주고 싶어 했다. 아이들의 동화책에 흔히 나오지만, 평소 흔하게 볼 수 없는 그들을.
사람이든 동물이든, 곤충이든 주변에 흔히 있을 때는 소중함을 잘 모르는 법이다. 어리석게도.
10여 일의 여행이 거의 끝나갈 무렵, 아내가 선택한 곳은 버드파크였다. 솔직히 말해서 이렇게 크고 넓을 것이라고 생각하지 못했다. 어린 시절 내가 가장 많이 가본 동물원은 서울에 있는 어린이 대공원이었다. 자주 가본 이유는 집 근처였기 때문이었고, 그곳에 오래 살았기 때문이었다. 소풍장소였고, 백일장 장소였으며, 심지어는 집에서 학교를 가거나, 친구를 만나러 갈 때 지나가는 곳이기도 했다. 아주 어린 시절 길도 몇 번 잃었고, 그렇게 미아가 된 이후로는 다시는 길을 잃은 적은 없었다. 너무 근처에 있어서 고마움을 몰랐다. 늘 지나다니는 길에 코끼리도 보고, 호랑이 사자도 보았다. 지금은 사라졌지만 서커스 공연장처럼 커다랗게 그물망으로 만든 새장도 있었다. 아주 커다란 공간에 많은 새들이 날아다니곤 했었는데, 각종 조류들의 배설물 냄새가 나긴 했어도 일부러 먼 곳을 돌아 자주 새들을 보러 갔었다.
하지만 쿠알라룸푸르에 있는 버드파크는 완전히 개념 자체가 다른 곳이었다. 공원 안에 새들의 생활공간을 만든 것이 아니라, 공원 전체를 새들의 생활공간으로 만들었다. 그래서 엄청난 공간 전체를 그물망으로 둘렀다. 그리고 새들은 그 안에서 마음껏 날아다닌다. 사람들은 외부에서 새를 구경하는 것이 아니라 새들의 생활공간으로 방문하는 느낌이다. 처음에는 그물망에 구멍이라도 나면 어쩌지 라는 걱정이 들기도 하지만 곧, 그물망으로 둘러싸여 있다는 사실은 곧 잊게 된다. 그만큼 공간은 넓고 새들은 자유롭다. 물론 제한되어 있는 자유라 할지라도.
아이들은 요새, 병아리를 키운다. 사실 병아리라고 이야기해도 될지 모르겠다. 얼마 전까지는 분명 병아리의 형체를 갖추고 있었는데 요새는 거의 닭의 모양새다. 손으로 만지거나 들어 올리면 제법 닭소리로 불만을 표시하기도 한다. 태어난 지 하루 만에 집으로 데려왔는데 사람 손에서 커서 그런지 도망도 가지 않고 야외에 데리고 나가도 우리 아이들 주변만 맴돈다. 집에 돌아가자고 아이들이 품에 안아도 잘 도망가지도 않는다. 손을 내밀면 손 위로 올라오기도 하고, 아이들 어깨나 등위에 올라가기도 잘한다. 물론 그 자세로 응가를 하는 경우가 많아서 나는 질색을 하지만 아내도, 아이들도 태연 그 자체다.
병아리를 키우기 전에도 우리 아이들은 새나 동물을 만지는 것을 주저하지 않았다. 겁이 없는 것인지 아니면, 모든 생명에 대한 사랑이 가득한 것인지는 몰라도 곤충이든 새든 만지지 못하는 것이 없다. 닭 수 십 마리가 방사되어 있는 닭장에도 잘 들어가고, 공원에 풀어놓은 공작새의 꼬리도 끝까지 따라가서 만져보고야 만다. 그래서 그런지 버드파크 내에서 마음대로 돌아다니고 있는 새들을 봐도 겁먹지 않는다. 간식을 꺼내자마자 몰려든 새들 사이에서도 당황하지 않는다. 늘 당황하고 겁내는 건 나뿐이다. 아이들은 태연하게 새들에게 간식을 주고 기회를 봐서 만져보기도 한다. 놀랄 정도로 코앞에서 관찰하고 말도 거는 것을 보면 내 아이들이지만 범상치 않다는 생각이 든다.
여행의 마지막 일정은 반딧불이 구경이다. 하루가 더 있기는 하지만 숙소도 공항 근처로 옮겨야 하고 아이들은 수영장에서 신나게 놀 예정이니, 다른 것을 할 수는 없다. 처음에는 반딧불이 투어를 하려고 이리저리 알아보았는데, 두 가지 문제가 있었다. 하나는 금액. 금액의 많고 적음을 떠나서 금액의 효율성을 생각해본 것이다. 반딧불이도 보고 싶고, 박쥐동굴도 가고 싶다. 저녁 식사도 제공해주는 것치고는 금액도 적절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두 번째 문제가 우리를 가로막는다. 우리 모두 만족할 수 있을 것인가. 그런데 그렇게 하루를 보내기에는 아이들의 체력이 문제였다. 물론 막무가내로 데려갈 수도 있다. 밥도 적당히 먹이고, 둘째 낮잠도 안아서 재우고 버스에서 안고 있으면 될 일이었다. 하지만, 하루 종일 둘러보기만 하는 관광을 아이들이 좋아할 것인가가 문제였다.
그래서 우리는 아이들이 새들을 가까이에서 볼 수 있고, 먹이도 줄 수 있는 버드파크를 방문했다. 그리고 둘째를 충분히 쉬게 한 후에 해가 저물 무렵 반딧불이를 보러 출발했다. 개인적으로 이동할 차량을 마련하고 요금을 계산하니 싼 요금은 아니었다. 하지만 아이들은 푹 쉬었고, 수영장에서 놀 수도 있었으며 밤늦게까지 또렷한 정신으로 반딧불이를 관찰할 만큼 체력을 충전했다.
주차장에 버스는 많았고, 줄 서 있는 분들은 대부분 한국사람이었다. 아이들은 줄을 서서 하고 싶은 이야기를 하기도 하고 줄을 벗어나서 이것저것 관찰하기도 했다. 다리가 아팠던 큰아이는 모처럼 아빠의 등에서 쉬기도 하고, 작은 아이는 목마를 타고 즐거워하기도 했다. 꽤 오랜 시간 줄을 섰지만 아이들은 신나 했고 구명조끼를 입고 작은 배에 탔을 때는 조금 무서워하기도 했지만 잠시 뿐이었다. 아이들이 피곤해하지 않고 즐거워 보여서 나는 즐거울 뿐이었다.
우리 집은 크리스마스트리가 없다. 아이가 태어나기 전에는 크리스마스를 집에서 보낸 적이 없으므로 트리가 필요 없었다. 생각해보면 그때는 트리나 크리스마스 장식이 없어서 크리스마스 분위기가 나지 않아도 아쉽지가 않았다. 우리는 주말에 얼마든지 밖에 나가 시간을 보냈고, 둘만의 이야기도 많이 나눴다. 원하면 언제든 어디서든 크리스마스를 즐길 수 있었다. 우리는 경제적으로 충분하지는 않았지만, 우리의 신혼은 함께 있어서 늘 크리스마스 같았다.
아이가 태어난 후에는 크리스마스를 즐길 틈이 없었다. 아이가 태어난 다음 해에는 우리는 둘 다 본인의 생일을 잊고 있었다. 생일 축하한다는 부모님들의 전화를 받고 생일임을 알았을 정도이니 크리스마스를 챙길 여력은 없었다. 아이가 조금 큰 후에는 트리를 준비하면 좋았겠지만 이상하게도 여력이 없었다. 공간도 마땅하지 않았고. 아이들 몰래 크리스마스 선물을 고르고 구입하는 것에만 온통 시간과 노력을 투자했다. 그래서 우리 아이들은 어디 놀러 가서 온통 반짝반짝하는 트리의 불빛을 보면 한참을 구경하곤 한다. 집에서는 볼 수 없는 그 반짝임에 마음을 빼앗기곤 하는 것이리라.
반딧불이가 붙어 있는 나무는 온통 반짝였지만 크리스마스트리처럼 화려하지는 않았다. 은은하게 자신의 존재를 알리는 반짝임이 좋았고, 관찰하려고 노력하지 않으면 잘 보이지 않는 희미함이 좋았다. 아이들은 생각보다 화려하지 않은 불빛이 불만이었지만. 생각보다 화려하지 않고, 소란스럽지 않아서 나는 좋았다. 반딧불이가 반짝거릴 때마다 아이들은 온 정신을 다해 반딧불이를 관찰했고, 아내도 그런 아이들과 함께 정신을 빼앗기고 있었다. 말레이시아 가족여행의 마지막 일정은 화려하지 않아도 아름답게 마무리되고 있었다.
밤늦게 숙소에 도착한 아이들은 피자를, 나는 귀한 맥주 한 잔을 하사 받았다. 아이들은 먹고, 씻고, 잠들었고 나는 잠든 아이들에게 이불을 덮어주고는 아내 곁으로 돌아갔다. 두런두런 새벽까지 이야기 나누다가 아내는 잠들었다. 다음날 하루 종일 아이들은 물놀이를 할 것이고, 우리는 짐을 정리하고 집으로 돌아갈 준비를 해야 한다.
김치볶음밥이 먹고 싶다는 큰아이는 앵무새 인형을 안고 잠들어있다. 집으로 돌아가도 수영장에 가고 싶다고 이야기하는 큰아이도, 분홍 거북이 인형을 안고 잠든 작은 아이도 훌쩍 커 버렸다. 아이들은 늘 곁에 있지만 여행은 늘 아이들을 부쩍 성장시키곤 한다. 우리는 금세 일상생활에 적응하겠지만, 가끔 여행 이야기를 하며 웃을 수 있을 것이다. 가끔 웃을 수 있으면 그것으로 좋다.
아이들끼리 잠든 것이 마음에 걸려, 아이들이 잠든 방으로 돌아갔다. 침대를 온통 차지하고 잠든 아이들을 피해 바닥에 잘 자리를 마련했다. 아내는 넓고 편안하게 잠들어 있고, 아이들은 자신들만의 자세로 편안하게 잠들었다. 바닥은 딱딱했지만 아이들의 숨소리를 들으니 마음이 편해졌다. 아이들은 어디서나 편안하게 잠들어 주었다. 그곳이 비행기든, 숙소든, 집이든. 아마 아이들은 우리가 함께여서 편했을 것이지만, 아프지 않고 편하게 잠들어준 것이 몹시 행복한 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