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학년때 우리 반 담임선생님 집에서 과외를 한 적이 있다. 물론 불법이었지만 선생님 사모님이 우리 어머니와 고교동창이어서 나는 그 빽으로 간신히 들어갈 수 있었다. 처음 과외를 갔을 때 너무나 놀랐다. 우리 학교 퀸카 여학생 다섯 명이 과외멤버였고 남학생은 오로지 나 하나였기 때문이었다.
예쁘고 집안 좋고 공부도 잘하는 여학생 사이에서 청일점으로 끼어 어울리는 일은 아주 힘들었다. 그 애들은 나를 대화에 끼워주지도 않고 걸핏하면 따돌리기 일쑤였다. 하지만 처음엔 대놓고 나를 무시하던 여학생들도 점점 시간이 지나자 태도가 누그러졌고 우린 서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가 되었다.
오직 하나 밖에 없는 남학생이란 희소성 덕분에 그들은 경쟁적으로 내게 다가오기 시작했다. 난 사실 아빠가 외과의사였던 혜원이를 혼자 몰래 짝사랑하고 있었는데, 이렇게 가까운 거리에서 매일 한 방에서 혜원이와 같이 공부하게 돼서 너무 행복했다.
어느 날 학교에서 사건이 하나 있었다. 우리 반 일진이었던 오현이가 혜원이를 괴롭혔다. 둘 사이에 사소한 말다툼이 있었고 폭력을 쓰지는 않았지만 오현이가 혜원이의 가방을 엎어서 가방 안 내용물이 모조리 교실 바닥에 흩어지게 되었다. 언뜻 생리대도 보였다.
혜원이는 엉엉 울었다. 혜원이가 슬프게 우는 걸 본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오현이에게 다가갔다. 난 오현이 눈을 똑바로 노려보며 “야! 너 왜 혜원이 괴롭혀? 당장 그만 두지 못해?”라고 소리쳤다. 평소 같으면 감히 입도 뻥긋하지 못했을 나였지만 그때는 어떻게 그런 용기가 생겼는지 지금도 모르겠다.
오현이는 같잖다는 듯 웃으며 “이 새끼가! 니가 뭔데 남의 일에 참견이야?”라고 하면서 갑자기 내 왼쪽 따귀를 세게 때렸다. 따귀를 한 대 맞은 나는 갑자기 눈이 팽 돌아가면서 나도 모르게 어릴 때 배웠던 태권도 동작인 돌려차기가 반사적으로 튀어나왔다.
내 오른발은 나보다 키가 좀 컸던 오현이의 목 왼쪽을 정확히 강타했고, 불의의 일격을 당한 오현이는 교실 바닥에 쓰러졌으며 난 쓰러진 오현이의 배 위에 올라타고 계속해서 얼굴을 때렸다. 싸움이 격해지자 반 아이들이 몰려와서 우리 둘을 떼어놓았고 둘은 씩씩거리며 싸움을 멈췄다.
이 사건 이후로 혜원이가 나를 대하는 태도는 180도 바뀌었다. 내게 너무나 친밀하게 대해줬고 내가 하는 말에 항상 동조해 주었다. 그룹의 리더 격인 혜원이가 내게 잘해주자 나머지 여학생들도 내게 너무나 살갑게 대해 주었다. 나를 자신들의 그룹에 완전히 끼워주었고 우리 사이에는 못하는 이야기가 없었다.
차츰 우리들은 진심 허물없는 사이가 되었고 그 나이 또래 애들이 궁금해하고 관심있어 하는 그 어떤 이야기도 나눌 수 있는 사이가 되었다. 별다른 성교육을 받지 못한 세대라서 우리들은 아기가 어떻게 생기는지에 대해 생물학적, 심리학적, 해부학적 관점에서 우리가 아는한 심도 깊은 이야기를 나누었고 아무래도 남자보다 여자가 2차성징이 빨리 나타나니 난 어디에서도 듣지 못할 오묘하고 신비로운 얘기를 들을 수 있게 되었다.
심지어 유경이는 어릴 때부터 심장이 안 좋아서 계속 치료를 받으러 다닌다면서 티셔츠를 내려 자신의 가슴을 조금 보여주었는데, 살짝 봉긋해 지려고 하는 가슴골 바로 위 하얀 살갗에 겨울 나무가지처럼 펼쳐져 있던 파란 정맥은 지금도 내 기억에 생생하다.
하지만 그 무엇보다도 더 좋았던 건 과외 시간에 선생님이 열심히 가르치는 동안 책상 밑에서 몰래 발가락으로 혜원이와 접촉하는 거였다. 어느 날 우연히 내 발이 혜원이의 하얀 타이츠 신은 발에 닿았는데, 분명히 발이 부딪쳤음에도 혜원이는 내 발을 피하지 않았고 오히려 더 꼼지락거리며 나를 간지르는 게 아닌가! 그 후에도 우리는 수업시간 마다 발가락을 부비며 둘만의 짜릿한 감정을 교환하게 됐다. 발가락끼리 마음을 확인한 후 눈과 눈이 마주칠 때 피어오르는 그 몽글몽글함은 이루 말로 표현할 수가 없었다. 아무도 모르는 둘만의 비밀을 갖는다는 건 정말이지 가슴이 터질만큼 즐거운 일이었다.
나는 과외 수업이 너무 재밌어서 수업이 없는 주말이면 빨리 월요일이 왔으면 기대했고, 주위에서 누가 무슨 소리를 해도 과외 수업만 생각하면 한없이 행복해지는 아이가 되었다. 생전 처음으로 사랑을 경험한 초딩은 이 친구들 외에는 세상 그 어떤 것도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했다. 나는 학교에서 제일 잘나가는 여학생들과 점심도시락을 같이 먹고 스스럼 없이 대화를 나눌수 있는 특별한 아이가 되었다. 나와 친한 남자아이들은 내게 비결이 뭔지 묻기도 했지만 난 비밀을 지켰다.
학교를 졸업하고 각기 남중, 여중으로 진학하게 되어 우리의 관계는 서서히 멀어졌다. 그 후 5년이 지난 고2 때 무슨 걷기운동 행사에서 우연히 혜원이를 다시 만날 기회가 있었는데 이때는 서로 너무 쑥스러워서 인사도 제대로 건네지 못했다.
첫사랑은 이루어지지 않는 편이 더 애틋한 것 같다. 수십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당시 초딩이었던 첫사랑 혜원이와의 추억은 내 가슴 속에 아련하게 남아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