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산에서 신병훈련을 마치고 평택 캠프험프리즈에서 후반기훈련을 마친 후 처음 배정된 곳이 용산 미8군 본부중대였다. 내가 살던 막사는 2640막사였는데, 일제시대때 지은 빨간벽돌 건물로서 1층에는 중대본부 사무실이 있었고 2층에는 사병기숙사가 있었다. 리모델링을 해서 내부는 현대적 시설을 갖춘 건물이었지만 외벽에는 아직도 일본군 휘장이 선명하게 남아있던 역사적인 건물이었다. 2층 205호실이 내 방이었는데, 내 옆방 206호실에 살던 미군이 프레디 상병이었다.
프레디는 마르고 날렵한 체격을 가진 흑인이었고 눈이 크고 총명해 보이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한국말을 배우고 싶어서 늘 내게 서툰 한국어로 말을 걸어왔었다. 내가 이병계급장을 달고 막 전입했을 때 프레디는 자기가 선임이라고 많이 도와주었고, 한달에 한번씩 있던 대청소 시간(GI Party)때는 바닥에 왁스칠하는 법이라든가 자국이 남지않게 창문 닦는 방법 등을 알려주었다.
나는 카투사병이라서 5개월만에 일병이 되고 12개월만에 상병을 달았지만 그는 그때도 여전히 상병계급장을 달고 있었다. 내가 너무 빨리 진급한다고 투덜거리던 프레디의 모습이 아직도 기억난다.
프레디와 항상 좋은 추억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한번 대판 싸웠던 기억도 있는데, 그건 신병 전입신고식 때 일어났던 일이다. 신병들이 전입하는 날 내 방에서 신고식을 했는데, 군기가 바짝 든 공이병이 너무 큰소리로 관등성명을 외치는 바람에 옆 방에서 컴플레인이 들어왔다. 엄숙한 신고식 중간에 프레디가 큰소리로 방문을 두드리며, 시끄러워서 잠을 잘 수 없으니 좀 조용하라고 소리질렀고 중대장에게 보고하겠다고 항의했다. 여하튼 그 후 시간이 흘러 프레디는 본국으로 돌아갔고 나도 무사히 군대를 제대했다.
10년의 세월이 흘러 나는 유학생이 되어 미국 애틀란타에 공부하러 오게되었다. 어느날 나와 내 룸메이트 진영이, 정준이 이렇게 세명은 뷰포드 하이웨이에 있는 볼링장에 갔다. 볼링이 너무 재미있어서 시간가는 줄 모르고 쳤는데, 너무 많이 쳐서 요금이 상당히 많이 나왔다.우리가 가진 현금을 다 끌어모았는데도 볼링비에 10달러 정도가 부족했다.
정준이는 지갑을 안 가져왔고, 나와 진영이도 신용카드를 두고 와서 현금 밖에 없었는데, 주머니를 다 뒤져보아도10달러가 부족하였다. 볼링장 직원에게 사정을 설명하고, 집에 가서 돈을 가져올테니 조금만 기다려 달라고 했다. 하지만, 직원은 그건 자기가 결정할 수 없고, 매니저한테 허락을 받아야한다고 하며 사무실로 들어갔다.
이윽고 매니져가 문을 열고 나오는데, 놀랍게도 그는 10년 전 내 옆방을 쓰던 프레디 상병이었다. 뜻밖의 장소에서 옛 전우를 만난 우리는 바로 서로를 알아보고는 얼싸안고 감격을 나누었다. 프레디는 부족한 돈은 걱정하지말고 그냥 가라고 하며, 다음에 또 오라고 하였다. 이 모습을 본 내 룸메들과 볼링장 직원은 이게 무슨 상황인지 놀라고 의아해했다.
세상에! 10년전 용산 미8군 막사 옆방 전우를 미국 애틀란타 볼링장에서 우연히 다시 만날 확률은 대체 얼마나 될까? 미국 인구가 3억3천만인데, 그 중 한 명을 우연히 다시 만나게 된 건 정말 기이한 인연이었다.
살아보니, 어떤 작은 인연도 함부로 하면 안되겠더라. 언제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날지 모르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