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nything is Possible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 정연희 역, 문학동네, 2019.
묘사가 좋다. 심리묘사, 외부 묘사로 심리를 묘사하는 방법, 결국 인간의 심리에 대한 이해가 대단하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모든 사람이 '적어도 살면서 가끔은, 몇 번의 순간에 만큼은' 이토록
메타인지가 뛰어나며 자기 자신의 감각과 마음과 깨달음을 잘 느끼는가? 하는 의심이 들었다.
이런식으로 자신을 느끼며 사는 것은 병에 가깝다. 감각으로 살고 감각대로 행하는 게 낫지. 진짜 깨어있는 사람들은 그렇게 사는 거 아닌가? 곱씹는 게 아니라.
그리고 루시 바턴이 어린 시절 함께 학대를 당한 언니, 오빠와 이야기를 나누는 장면에서는 외로움을 느꼈다. 그들은 '함께' 학대당한 것이다... 그리고 물론 이런 생각과 마음이 병적임을 알았다. '내가 더 피해자야!'라는 식의.
13쪽
그러자 토미는 괜찮다는 것을 깨달았다.
36쪽
그 순간 토미는 차를 몰면서 깨달았다. 오, 문제는 어머니였어. 어머니가 문제였어. 그녀가 정말로 위험한 인물이었던 거야.
41쪽
"저는 이런 이야기를 해본 적이 없어요." 피트가 말했고, 토미는 이 아이-어른이 너무 어리게 느껴져 다시 한번 충격을 받았다. 가슴속 깊은 곳에서 피트와 직결된 듯한 작은 신체적 통증이 느껴졌다.
42쪽
"나는 그러고 싶은데." 토미는 말했지만, 그렇게 말하면서도 진심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이내 진심이 아니라는 것을 확실히 알았다. 하지만 그것이 중요한가? 중요하지 않았다.
45쪽
그 순간 토미는 깨달았다. 그들이 함께 살아온 내내 그가 그녀에게 말하지 않고 혼자 간직한 그것이 사실은 그녀도 쉽게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이었음을. 그리고 이제 그가 그녀에게 말하지 않고 혼자 간직할 그것-그의 의심(하느님은 결코 그를 찾아온 것이 아니었다는 그의 갑작스러운 믿음)-은 그 처음의 것을 대체할 새로운 비밀임을. 그가 잡힌 손을 빼냈다. "당신 말이 맞을지도 몰라." 그가 말했다. 그러고는 별스럽지 않게 한마디 덧붙였는데, 그것은 진심이었다. 그가 말했다. "사랑해, 셜리." 그러고는 천장을 바라보았다. 잠시, 그리고 아마 잠시 더, 그는 그녀를 쳐다볼 수 없었다.
53쪽
잠시 그녀의 시야가 흐려졌다. 벽시계가 재깍재깍 움직이는 소리가 들렸다. 그려는 자기 입에서 무슨 말이 나올지 꿈에도 예측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녀는 소녀를 쏘아보았고 자기도 모르게 이런 말을 하고 있었다. "여기서 당장 꺼져, 이런 쓰레기 같으니."
69쪽
이제 그는 이렇듯 너그러웠다. 죽음이 그에게 너그러움을 주었다.
73쪽
타운 전체가 어머니와 딜레이니 선생의 불륜에 대해 쑥덕거렸고, 패티는 마치 자신의 머리가 잘려나가 몸과 다른 방향으로 움직이는 것처럼 느껴졌다. 정말로 이상한 느낌이었지만, 그 느낌은 계속되었다. ...
가정-그전에는 그들 모두 호수 위의 보트 안에서 천진난만하게 앉아 있었던 것처럼 느껴졌다-은 사라져 한 번도 상상해보지 못한 뭔가로 변해버렸다. 타운 사람들의 쑥덕거림은 그치지 않았다. 가장 어렸던 패티는 가장 오랜 시간을 견뎌야 했다.
75쪽
하지만 루시는 그들을 사랑했대. 그녀는 어머니를 사랑했고, 어머니도 그녀를 사랑했대! 우리 모두 너나 없이 엉망이야. 앤젤리나, 우리가 아무리 노력해도 우리 사랑은 불완전해. 앤젤리나, 하지만 그래도 괜찮아.
=>우리는 사랑하면서, 사랑하는 마음을 가지고서도, 사랑하면서도, 얼마나 나쁜 말과 행동을 많이 할 수 있는지. 가끔은 심지어 사랑때문에 그렇게 하기도 한다. 사랑하지만, 부족하고 무능하고 병들어 있어서.
76쪽
패티는 앤젤리나가 자기 이야기를 무척 하고 싶어하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렇다고 패티의 심기가 불편해진 것은 아니었다. 그저 그렇다는 것을 알아차렸을 뿐이었다. 그리고 그녀는 이해하고 있었다. 모든 사람에게 주된, 그리고 가장 큰 관심사는 자기 자신이라는 사실을 이해했다. 시비만은 예외여서 그는 그녀에게 관심을 두었고, 그녀 또한 그에게 엄청난 관심을 쏟았다. 그것이 사람들을 바깥세상으로부터 보호해주는 피부였다-자신의 인생을 공유하는 또다른 누군가의 사랑이.
84쪽
나중에, 앞으로 다가올 세월 동안 패티는 그들이 계단에 앉아있던 것과, 그것이 시간의 바깥에서 일어난 듯 느껴졌던 것을 되돌아볼 것이었다.
89쪽
린다는 그 구두를 보고 이본이 유복한 가정에서 자라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다는 걸 눈치챘다. 늘 구두가 단서였다.
=>예술계에서 활동하며 사람들을 만나면서 나는 거의 언제나 위축되어있다. 나는 돈도 없고, 감각도 없고 애티튜드도 없고 스타일도 없기 때문이다. 카리스마도 없고, 대단한 작업도 없고. 배경도 없고. 나에게는 미약한 의지만이 있기 때문이다. 사람들을 그것은 0.5초 이내에 다 간파한다.
99쪽
그 기간 동안 린다 피터슨-코넬은 가슴속 깊은 곳에 어두운 혼돈의 원판 같은 것을 지닌 채 살아갔고, 남편이 신문기사를 읽고 텔레비전으로 사건의 추이를 지켜보는 모습을 보면서 종종 진땀을 흘렸다. 그녀는 자신이 미친 게 틀림없다고 생각했다. 몸이 왜 그런 식으로 반응하는지, 마음이 왜 차분한 상태를 유지하지 못하는지 그 이유를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그리고 그 사건이 종결되었을 때, 마침내, 마침내 종결되었을 때, 그녀는 자신이 그런 식으로 느꼈었다는 사실을 잊었다. 가끔 기억이 떠오르기는 했지만 실제로 겪었던 신체 증상이 다시 나타난 적은 결코 없었다. 그리고 기억날 때마다 그녀는 생각했다. 나는 어리석은 여자야, 나는 불평할 게 아무것도 없어, 정말로, 그렇겐 못하지, 오 맙소사.
100쪽
한밤중에-수면제 때문에 정신이 몽롱한 상태로-린다는 남편이 샤워하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게 특별히 이상한 일은 아니었지만 린다는 불안감을 느꼈다. 그런 느낌은 늘 있었으나, 오늘밤은 칠 년 전 그 감정을 상기시켰다. 오로지 그 시간이 이제 끝났다는 안도감에 의지해 그녀는 겨우 다시 잠에 빠져들 수 있었다.
111쪽
"오. 알겠어요. 네, 죄송해요." 그 말이 정곡을 찌른 듯했고, 린다는 이 여자의 자신감이 얼마나 보잘것없는지 대번에 눈치챘다. 이본의 어머니는 아마 그녀를 바르게 키우려고 노력했겠지만 결국은 체념하는 태도를 물려주었을 것이다.
117쪽
린다는 카우치에 앉아 그 말을 이해하려고 해보았지만 자신의 모든 부분이 기능을 멈춰버린 것 같았다. 그녀는 중립이었다. 그녀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벽에 호퍼의 그림이 너무도 무심하게 걸려 있어서, 그 의미가 개인적인 것으로 느껴지기 시작했다. 마치 그 그림이 바로 이 순간을 위해 그려지기라도 한 것처럼. 당신의 고통은 크지만 의미 없다고, 그것이 그렇게 말하는 것 같았고, 그림속 집의 측면에는 햇살만이 비쳐 들 뿐이었다.
120쪽
"나는 트레일러에서 인생을 끝내고 싶지 않아요, 조이." 린다는 이 말을 해놓고 스스로 놀랐는데, 자신이 이런 말을 하리라고는 짐작조차 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조이도 그 말에 놀란 것 같았다. 린다보다 키가 작은 그 여자의 얼굴 위로 순식간에 혼란스러운 표정이 떠올랐다.
아마 서로 놀란 것 때문에 린다는 문을 닫지 못했을 것이다. 그래서 조이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이 말을 할 시간을 벌 수 있었다. "오, 하지만, 린다...... 저기, 당신이 어디 사는지는 중요하지 않아요. 그건 나중 일이에요. 당신이 누구보다 사랑하는 사람이 감옥에서 하루하루를 보낸다면 당신 자신도 감옥에 있는 거나 마찬가지예요. 당신이 실제로 어디 있는지는 중요하지 않아요. 누가 당신의 진정한 친구들인지 알게 될 거예요. 그리고 그들은 당신이 생각하는 사람이 아닐 테고요. 그 점에 대해선 내 말을 믿어도 돼요."
린다는 문을 닫고 잠갔다.
121쪽
린다는 집안을 조용히 서성였다. 그녀는 자신의 마음이 받아들일 수 없는 뭔가를 받아들이려고 애쓴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123쪽
그들은 오가는 사람들에게서 떨어져 함께 통로를 걸어갔다. 키가 큰 캐런-루시가 린다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부인, 이건 진심인데요. 몇 년 전 나 자신의 비극이 있은 뒤로, 이따금 내가 모든 사람들에게 연민을 가지고 있다고 느껴요. 정말로 그래요. 아마 그게 그 일을 통해 받은 유일한 축복일 거예요. ...
129쪽
그날, 가을 흙냄새가 모종삽을 든 채 무릎을 꿇고 있는 그를 가득 채울 때, 그의 마음에는 왈칵 사랑과 보호심이 일었고, 지금은 그의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그것-그녀의 중심에 자리한 순전한 어리석음, 쓸모없고 메스꺼운 다정함-이 그를 조용히 전율케 했었다. 넋을 잃고 그 일에 몰두해 있던 사랑스러운 메릴린, 그녀의 얼굴은 일을 끝냈다는 기쁨으로 빨갛게 달아올랐었다. "얘들이 싹을 틔울까?" 그녀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었다. 애처로운 사람, 늘 걱정만 한다. 그는 그럴 거라고 말했다. 그리고 그렇게 되었다. 몇 개가 싹을 틔웠다. 하지만 그는 그 부분 또한 잘 기억나지 않았다. 그는 정말로 지금 이 순간까지 오래도록 잊고 있던 그것, 그들이 그저 어린아이였던 그 가을의 어느 순수했던 하루만 기억해낼 수 있을 뿐이었다.
...
잽싸게 물살을 거슬러올라가는 큰 피라미처럼 그의 안에서 공포의 감정이 이리저리 돌아다녔다. 그는 갑자기 친척집으로 보내진 어린아이처럼 집이 그리워졌다. 가구는 크고 검고 낯설고 냄새는 이상하고 세부적인 모든 것이 거의 견디기 힘든 다름으로 공격해오는 것 같은 그런 때. 집으로 돌아가고 싶어, 그는 생각했다. 그리고 그 욕망이 그의 숨을 쥐어짜는 것 같았다. ...
그는 자신이 갈망하는 집이 어느 집인지 몰랐지만 나이가 들수록 향수병도 더 심해지는 것 같았다. 지금 같이 살고 있는 메릴린-어쨌거나 그의 고립되고 추방된 가슴을 연민으로 채워주는 여자-을 참아낼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 근심의 강물을 쏜살같이 통과하는 그 피라미는 ... 어느 한 장소도 안정된 느낌을 주지 않았다.
131쪽
그는 그녀의 시선이 자신을 똑바로 향하지 않은 것에 주목하면서 자신은 무엇보다 정직하지 않은 것-혹은 용기 없는 것-을 싫어한다고 생각했다.
그는 그 작은 방이 허용하는 한 그녀에게서 멀찍이 떨어져 반대쪽 벽에 기대섰다.
133쪽
찰리는 아까 그녀가 좋아하는 샴페인을 사왔고, 이제 트레이시가 뒤늦게 서랍장 위 얼음을 채운 모텔 플라스틱통에 담긴 그것을 쳐다보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134쪽
그녀의 얼굴에 잠시 고통의 표정이 스쳐지나가자 그는 희열을 느꼈다. 그는 늘 그가 그녀를 사랑하듯 그녀도 그를 사랑한다고 느껴왔다. 하지만 돌연 어떤 상쾌한 단순함이 방안에 들어와 퍼지는 듯하더니 예상치 못한 어마어마한 안도감, 혹은 상황이 바로잡히는 느낌이 찾아왔다.
135쪽
그에게 면허증을 보여준 그날 이후 그녀는 이제 다시는 자신에게 돈을 주면 안 된다고 강력하게 말했다. 아마 그녀는 그때 일을 이렇게 저렇게 따져본 뒤 이제 자신이 돈을 받아 마땅하다고 결론을 내렸으리도 모른다. 어쩌면 정말 그래야 마땅할지도. 그녀가 나가고 조용히 뭄이 닫혔다. 그는 블라인드 틈새로 그녀가 차에 타는 것을 지켜보고 싶은 충동을 뿌리쳤다.
묘한 희망의 느낌이, 이 상황이 곧 끝날 거라는, 이미-본질적으로는-끝났다는 기분좋은 이해가 그를 떠나지 않았다. 그리고 그 느낌은 확실히 계속 이어질 것 같았는데, 그것은 어째서인지 지금껏 그가 몰랐던 사실이었다.
137쪽
그는 침묵과 함께 방안에 홀로 남아, 앞서 중단된 그것, 지금 그에게 다시 돌아온 그것이 무엇인지 깨달았다. 그것은 거대한 고요였다. 오래전 그는 그것에 자기만의 이름을 붙였다. 엄지 치기 이론. 어린 시절 어느 여름에, 할아버지 집 지붕 위에서 망치로 타일을 세게 내려치다 알아낸 사실이었다. 실수로 엄지를 내려쳤을 때, 이것 봐, 그렇게 세게 쳤는데도 많이 아프진 않은데...... 하고 생각되는 찰나의 순간이 존재했다. 그리고 이어-어리둥절한 채 다행이라고 느끼며 안도하는 착각의 순간이 지난 뒤-살을 짓이기는 진짜 아픔이 몰려왔다.
138쪽
그는 혼자 버스를 타고 워싱턴으로 갔고, 그가 그곳에서 발견한 것은 얼마나 놀라웠던가. 그는 검은 화강암 벽을 따라 걸으면서 자신이 기억하는 이름들을 보았고, 거칠어진 손끝으로 그것을 만지면서 소리 없이 혹은 자각 없이 울었다. 그리고 주변에 있던 사람들-그는 그들을, 아마도 관광객이 분명한 사람들을 감지할 수 있었다-은 경의의 표시로 그를 혼자 두었다. 그는 느낄 수 있었다. 그들이 울고 있는 그에게 경의를 표한다는 것을! 그는 그런 것이 가능하리라곤 한 번도 생각지 못했었다.
칼라일로 돌아온 그게 메릴린에게 말했다. "거기 갔다 오길 잘했어." 그녀가 "나도 기뻐, 찰리" 그렇게만 말해서 그는 깜짝 놀랐다. 그리고 그날 밤 늦게 그녀는 말했다. "저기, 당신이 필요하다고 생각될 때는 언제든 가, 진심이야. 아무때고 당신이 필요하다면 그곳에 갈 수 있는 정도의 경제적 여유는 있어." 사람들은 당신을 놀라게 할 수 있다. 친절로만이 아니라, 무언가를 올바르게 표현하는 갑작스러운 능력으로도.
140쪽
그 단어가 떠올랐다. 깨끗하다. 그의 아들은 깨끗했다.
"난 괜찮아." 찰리가 한 손을 살짝 들어올리며 말했다. "천천히 고르렴."
그는 오래전 자기 자신을 극심히 더럽힌 찰리였기에, 그는 찰리이고 다른 누군가가 아니었기에, 그는 아들에게 이 말을 할 수 없었다. 너는 품위 있고 강하지만 나는 그중 어느 것에도 해당되지 않는단다. 네 어린 시절이 온통 장밋빛은 아니었는데도 너는 그 시기를 무사히 넘겼어. 나는 네가 자랑스럽고 네가 놀라워. 찰리는 자신이 어떤 감정을 느꼈건 그 감정을 희석시킨 말조차 할 수 없었다. 그는 아들에게 어서 오라고 하면서, 혹은 잘 가라고 하면서 아들의 등을 툭툭 칠 수조차 없었다.
141쪽
트레이시는 이번에는 코트를 벗지 않았고 침대가 아닌 책상 옆 의자에 앉았다. 그는 그녀의 얼굴에서 그녀가 미리 마음의 준비를 하고 왔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
"내 아들."
아주 느리게, 그러면서도 대번에-찰리는 그렇게 경험했다-그는 이해했다. 그녀의 아들이 마약 문제로 곤경에 처했다. 어떤 남자에게 만 달러를 빚진 것이다. 그 사실이 날개를 한껏 공포스럽게 펼친 크고 검은 새처럼 방으로 들어왔다.
143쪽
그러자 트레이시의 초록색 눈이 벌름거리는 검은 콧구멍처럼 변했다. 그가 그녀를 보면서 떠올린 이미지는 그랬다. 그녀의 눈동자가 말 콧구멍처럼 오므려졌다 벌어졌다 했다. "내가 이 돈을 마련하지 못하면 내 아들은 죽어요." 이제 눈물은 흐르지 않았다. 그녀가 훅훅 작게 숨을 내쉬었다.
150쪽
그에게서 어떤 소리가 새어나왔다. 특별한 일은 아니었다. 그는 종종 의도하지 않았는데 그런 소리를 내곤 했다. 가끔은 사람이 많은 곳에서도 그런 소리를 내서 사람들에게 겁을 주었다. 한 번은 도서관에서 젊은 사람이 그를 쳐다보는 것을 발견하고 자신이 그 소리를 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르렁거리는 소리. 메릴린, 백치 같은 그 여자가 젊은 남자에게 소곤거렸다. "이 사람이 전쟁에 나갔었거든요."
하지만 그 애송이는 메릴린의 말이 무슨 뜻인지 모르는 것 같았다.
151쪽
"준비 다 됐어?" 그는 코트를 걸치며 유쾌한 목소리로 물었고, 한 걸음 물러서서 그녀가 먼저 문밖으로 나가게 했다. 자신이 스스로를 관찰하고 있다는, 앞서의 그 익숙하고 묘한 느낌이 존재했다. 그가 그녀를 굉장히 사랑한다는-이제 그것은 감정이라기보다 알고 있는 사실에 가까웠다-그 사실은 한 가지를 제외한 어떤 측면에서도 이해할 수 없는 것이었기에, 그는 혼란스러웠다. 그 중요한 한 가지 측면은 그녀가 그를 구원했다는 것, 그에게 숨쉴 공간을 주었다는 것이었다. 혹은 그가 그녀를 통해 이것을 자신에게 주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녀를 보면서 그는 자신이 지금 느끼는 감정을 일으키게 할 만한 그 어떤 것-단 한 가지-도 보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제 다 끝났고, 하느님 감사하게도, 안도감이라는 열린 공간은 여전히 그 자리에 있었다.
156쪽
그는 그녀에게도 그녀만의 고통이 메아리치고 있다는 것을 어렴풋이 알아차렸다. 그들 나이에 그렇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그는 생각했다. 그러다가 많은 사람들이 그렇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자신의 머릿속에 늘 따라다니는, 침묵의 소음이 일으키는 고통의 메아리가 많은 사람들에게는 존재하지 않을 거라고 종종 생각하곤 했다.
163쪽
"엄마는 내 엄마예요!" 앤젤리나가 버럭 소리를 질렀고, 메리는 또다시 눈물을 흘릴 뻔했다. 그건 그 순간 자신이 초래한 것이 분명한 모든 상처들을 한순간에 다 본 것 같아 가슴이 타들어가는 듯했기 때문이었고, 또한 그녀 메리 멈퍼드는 살면서 어느 누구에게도 상처를 줄 생각이 없었고 그러고 싶지도 않았기 때문이었다.
164쪽
메리는 곁눈으로 세월이 자신의 아이에게 미친 흔적을 다시 한 번 보았다. 앤젤리나의 입가와 눈가에 메리가 기억하지 못하는 주름이 있었다.
168쪽
"하지만 다들 거기 자주 갔었잖아요." 작은 돌풍이 불어 앤젤리나의 머리카락을 들어올리자 머리끝이 일직선을 그리며 어깨 위로 떠올랐다.
169쪽
"엄마, 나이슬리 아줌마 기억 안 나요? 음, 그 아줌마 어떻게 됐는지 아세요?" 앤젤리나가 선글라스로 가려진 눈으로 어머니를 보았다.
"아니, 어떻게 됐는데?" 메리가 물었다. 엄청난 두려움이 밀려와 그녀 가슴에 둥지를 틀었다.
170쪽
"나 아직 안 죽었잖니." 그리고 메리는 이렇게 말하려고 했다. 내가 아직 안 죽었다니 정말 놀라워. 하지만 그녀는 앤젤리나에게 자신의 죽음에 대해 언급하지 말자고 마음을 다잡았다.
174쪽
오, 메리는 누군가가 상상할 수 있는 것보다 더 많은 시간을 엘비스에 대해 생각하며 보냈고, 결혼생활 초기에 그녀 마음속의 내밀한 기쁨-그것은 그녀의 마음이고 다른 사람들은 알 수 없는 것이기에-은 이런 식으로 만들어졌다.
191쪽
"우리는 그게 어떤 의미인지 알 수 없어." 그녀의 어머니가 말했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뭐가 뭘 의미하는지 알 수 없어. 하지만 내가 너를 봤을 때 뭘 알고 있었는지는 알지. 네가 나를 행복하게 만들어줬다는 것도 알고. 네가 엄마의 가장 소중한 어린 천사라는 것도 알고." (그녀는 소리 내어 말하지 않았지만 스쳐 지나가듯 이런 생각이 떠올랐다. 그리고 넌 늘 내 가슴속 공간을 너무 많이 차지해서 가끔은 그게 짐으로 느껴졌어.)
*
부엌에서 같이 팬과 냄비를 찾아 물을 끓이고 소스를 데우는 동안 메리는 황홀에 가까운 감정을 느꼈다. 행복감이 가슴을 두드렸다-그것을 빵처럼 먹을 수 잇을 것 같았다!
195쪽
앤젤리나는 자신의 어조에서 차가움을 느꼈다. 와인이 작용하기 시작한 것 같았다. 그려는 그 차가움이 어머니에게도 향하는 것이 느껴졌다, 갑자기.
메리가 생각에 잠겨 말했다. "잘 모르겠어, 아가, 하지만 내가 그 일 때문에 떠난 것 같진 않구나."
"우리는 그 일에 대해 이야기해본 적이 한 번도 없어요." 앤젤리나가 말했다.
어머니는 침묵했고, 어머니를 쳐다본 앤젤리나는 어머니의 얼굴에 떠오른 슬픈 표정에 칼로 찔리는 기분이 들었다.
197쪽
메리가 손을 내밀어 딸의 손을 잡았다. 하지만 그 순간 메리에게 갑작스러운 깨달음이 찾아왔는데-지금까지 그것을 깨닫지 못했다니 얼마나 어리석었는가-그것은 딸이 자신의 아버지를 떠난 것에 대해 결코 그녀를 용서하지 않으리라는 사실이었다. 메리가 살아 있는 동안은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메리가 살아 있는 시간은 더이상 그리 많지 않을 것이었다. 그러한 깨달음은 끔찍했다. 메리의 머릿속에서 다시 한번 띵 하는 느낌이 왔다, 화가 난 것이다......!
제발.
앤젤리나가 말했다. "엄마. 나는 엄마가 죽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오로지 그것뿐이에요. 엄마가 늙었을 때 제가 돌봐드리고 싶었는데, 엄마는 그럴 기회를 빼앗아갔죠. 나는 그저 엄마가 죽게 되면, 엄마가 죽을 때 엄마 옆에 있고 싶었어요. 엄마, 제가 원하는 건 그거예요."
메리가 앤젤리나를, 입가에 주름이 생긴 이 여인을 보았다.
"엄마, 하고 싶은 말이 있는데......"
"네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알아." 이제 메리는 신중해야 했다. 이 아이-어른이 그녀의 딸이기 때문에 조심해야 했다. 자신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고, 그것에 거의 준비가 되어 있다고, 완전하게는 아니지만 그렇게 되어가고 있다고 이 아이-지금껏 사랑했던 그 무엇보다 사랑하는-에게 말할 수는 없었다. 그 사실을 깨닫는 것은 무서운 일이었다, 삶이 그녀를 마모시키고 마멸시켜 그녀는 거의 죽을 준비가 되었으며, 아마 지금으로부터 그리 멀지 않은 때에 죽게 된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은. 몇 년이라도 더 살려고 아등바등하는 것은 늘 있는 일이었고, 메리는 주변에서 많은 사람들이 그러는 것을 보았다. 하지만 그녀는 그렇지 않았다. 혹은 정말로는 그렇다 하더라도 그렇게 느끼지 않았다. 그랬다. 그녀는 지칠 대로 지친 느낌이었고 거의 준비가 되었다고 느꼈지만, 이 아이에게 그렇게 말할 수는 없었다. 그리고 그녀 자신도 그 생각에 공포를 느꼈다. ... 다시는 딸들을 보지 못할 테고 남편도, 그러니까 딸들의 아버지인 그 남편도 다시는 보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들 모두를 다시 보지 못한다는 사실에 그녀는 겁을 먹었다. 그리고 그녀는 가장 소중하고 귀여운 딸인 에인절에게, 자기가 그녀에게 어떤 짓을 하고 있는지 알았다면 아마 그렇게 하지 않았을 거라고 말할 수도 없었다.
하지만 이것이 삶이었다! 그리고 삶은 엉망이었다! 앤젤리나, 내 아이야, 제발......
200쪽
메리는 이제 정말로 겁에 질렸다. 침대에 누이고 재우던 숱한 밤, 목욕물을 받아주던 숱한 시간에 그녀에게 온갖 이야기를 다 해주던 귀엽고 수다스럽던 그녀의 에인절. 휙, 그것이 사라졌다, 사라져버렸다!
201쪽
앤젤리나는 어머니가 자신을 안게 놔두었고, 어머니의 가슴에 얼굴을 묻고 울었다. 한참을 울었다. 이따금 앤젤리나가 고통에 못 이겨 소리를 냈는데, 그 소리가 너무 처절해서 메리는 외려 그것으로부터 떨어져나오는 기분이었다.
202쪽
두 사람 모두 눈물이 고일 때까지 웃었고, 그래도 웃음이 멎지 않았다. 하지만 메리는 생각했다. 영원히 지속되는 건 아무것도 없어. 하지만 그럼에도 앤젤리나가 이 순간만큼은 평생 간직할 수 있기를.
203쪽
"그러세요, 엄마." 앤젤리나가 말했고, 어머니는 가서 노란색 가죽 핸드백을 들고 돌아왔다. 잠시 위 앤젤리나가 창가에서 바깥을 내다보니 어머니는 타운과 바다가 바라보이는 벤치에 앉아 있었다. 앉은 자리가 가로등 아래라서, 앤젤리나는 담배를 입에 문 채 이어폰을 꽂고 고개를 까딱거리는 어머니의 형체를 알아볼 수 있었다. 그리고 앤젤리나는 한 여자가 어머니에게 다가오는 것을 보았는데, 발레리아가 틀림없는 것 같았다. 어머니가 그녀를 만나 얼마나 행복해 보이는지! 어머니가 일어섰고, 어머니와 그 작은 여인은 서로 뺨의 잊고 저쪽에 키스했다. 그리고 앤젤리나는 어머니가 손동작을 하는 것을 보았는데, 어떤 시점에 담배를 친구 쪽으로 내밀자 둘 다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고 나서 그 작은 여인이 몸을 기울였고, 그들은 다시 양쪽 뺨에 키스했다. 작은 여인은 떠났고, 앤젤리나의 어머니는 다시 앉았다. 어머니가 벤치에 앉은 채 담배를 길게 두 모금 더 빨더니 바닥에 비벼 껐다. 하지만 꽁초를 버리지 않고 큰 노란색 핸드백에서 꺼낸 작은 비닐봉지에 조심스럽게 넣었다.
어머니는 미동도 않고 가만히 앉아 바다를 바라보았고, 앤젤리나는 어머니를 계속 내려다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던 어느 순간 어머니가 갑자기 일어서더니 거리로 걸어갔다. 한 노인이 비틀거리며 길을 건너고 있었다. 술 때문은 아닌 것 같았고 노환 때문인 것 같았다. 어머니가 노인에게 얼마나 빠르게 다가가는지 앤젤리나는 깜짝 놀랐다. 앤젤리나는 가로등 불빛에 비친 노인의 얼굴을 보았는데, 단순히 어머니를 올려다보며 웃는 방식뿐만이 아니라 그 표정에서 묻어나는 인간적인 느낌, 따스하고 깊은 감사의 표시에 앤젤리나의 마음이 움직였다. 어머니가 그를 부척해 길을 건널 때 가로등 불빛에 잠시 어머니의 얼굴도 보였다. 어쩌면 빛의 각도 때문이었겠지만-어머니가 노인의 손을 잡을 때 ,그리고 노인을 부축해 길을 건널 때-앤젤리나는 어머니의 얼굴이 순간적으로 환하게 빛나는 것을 보았다. 그들은 길을 다 건넌 뒤 잠시 이야기를 나누는 듯했고, 이어 어머니가 보도를 걸어가는 노인에게 손을 흔들어주었다. 앤젤리나는 생각했다. 이제 어머니가 다시 아파트로 올라오겠지.
하지만 어머니는 이번에도 벤치에 앉았다. 그리고 다시 이어폰을 꽂았고, 전화기로 무슨 음악을 듣는지 몰라도 다시 고개를 까딱거리기 시작했다. 분명 엘비스의 노래였을 것이다. 어머니는 바다를 향해 앉아 있었고, 불 켜진 배들을 응시하는 듯 보였다.
=>부모가 자식을 틀 안에서 보듯이, 자식도 부모를 틀 안에서 본다. 이렇게 엄마로서가 아닌 한 사람으로서의 어머니의 모습을 보는 장면이 좋았다.
208쪽
어느 일요일 밤에-그가 그녀의 시카고 북투어에 대해 알게 되고 몇 주 뒤-그의 전화기가 울렸고, 루시가 그에게 "피티, 나 시카고에 가게 됐어. 그리고 그주 토요일에는 차를 렌트해서 오빠를 보러 앰개시로 갈 거야"하고 말했다. 그는 깜짝 놀랐다. "좋지!" 그가 말했다. 하지만 전화를 끊자마자 두려움이 밀려왔다.
209쪽
하지만 문-집으로 들어가는 유일한 통로인 그 문으로 들어가면 곧바로 작은 거실이 나왔고 오른쪽에 부엌 공간이 있었다-을 통해 들어가자 루시의 시선으로 내부가 보였고, 그는 생각했다. 그애가 죽을지도 몰라, 여길 보면 너무 침울해져서. 그는 정말로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210쪽
두시 이십분, 피트는 자갈 깔린 진입로로 차가 들어오는 소리를 들었다. 그가 블라인드 틈새로 내다보니 한 여자가 하얀 차에서 나오고 있었다. 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리자 그는 너무 불안해진 나머지 시력이 어떻게 된 느낌마저 들었다. 그는 햇살이 집안으로 쏟아져들어올 거라고 기대했었는데-자신이 그런 기대를 했었다는 건 나중에 깨달았다-그 말인즉 루시의 존재가 햇살처럼 빛날 거라는 뜻이었다.
218쪽
"하지만 여전히 건강하셔. 부인도 건강하시고. 두 분이 가끔 너에 대해 물어보셔, 루시. 틀림없이 네가 보고 싶으신 거야." 그는 그녀의 표정이 변하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 그녀의 표정이 닫혔다.
222쪽
하지만 그 순간 그는 보았다. 비키의 입술에 발린 립스틱을.
입술에 죽, 윗입술의 곡선과 도톰한 아랫입술을 따라 오렌지색이 도는 빨간색 립스틱이 발려 있었다. 피트는 이전에 립스틱을 바른 비키를 본 적이 있었는지 기억나지 않았다. 피트가 루시를 보니 그녀는 립스틱을 바르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영혼이 치통을 앓는 것처럼 갑자기 몸안에서 작게 몸서리가 쳐졌다.
226쪽
"엄마가 제일 예뻐한 아이." 비키가 말하자, 루시가 말했다. "뭐?"
"엄마가 제일 예뻐한 아이가 너였다고 말했어. 맙소사, 그게 정말 성과가 있었던 거네, 너한테는."
루시가 피트를 보았고, 이윽고 말했다. "엄마가 나를 제일 예뻐했다고?" 피트는 루시가 놀라는 것에 놀랐다. "나를?" 그녀가 물었고, 그는 어깨를 으쓱했다. 루시가 말했다. "엄마가 특별히 누구를 예뻐했다는 건 몰랐어."
256쪽
가끔 사람들은 민박집에서 얼마나 친근한 태도를 보여야 하는지 잘 몰라 혼란스러워했고, 도티는 그것을 이해했다. 그리고 그들을 너그럽게 대하려고 노력했다. 도티는 어른이 되기 전에 엄청 가난하게 살아서 그뒤로 오랫동안-필요 이상으로 오래-옷가게건 정육점이건 빵가게건 백화점이건, 어느 가게에 들어가든 누군가가 자신을 지켜보다가 나가달라고 말하는 순간이 오리라 예상했다. 도티는 그 수치감을 소중히 간직하고 있었고, 누구든 자신의 민박집을 찾는 사람은 결코 그런 느낌을 받지 않게 하려고 애썼다.
262쪽
뚜렷한 이유 없이, 어쩌면 바로 그 순간 견목 바닥 위로 해가 비스듬히 들어왔다는 것 이상의 이유는 없이, 불현듯 어린 시절 어느 여름의 기억이 도티를 찾아왔다. 그해 여름 그녀는 미주리주 해니벌로 보내져 잘 모르는 나이 많은 친척과 몇 주를 보내게 되었다. 그녀는 그곳에 혼자-사랑하는 오빠 에이블은 그들이 살던 지역의 극장 안내원으로 안정된 일자리를 구해 집에 남아 있었다-보내졌고, 도티는 겁에 질렸다. 궁핍에 익숙한 일부 아이들이 그러듯, 그녀는 상황이 잘 이해되지 않았지만 시키는대로 했다. 이전에 그녀를 받아주었던 점잖은 에드나 아주머니가 왜 그해에는 그러지 않았는지 도티는 지금까지도 그 이유를 몰랐다.
264쪽
그 모든 것이 도티에게 중대한 영향을 미쳤다. 그녀는 조용히 울고 싶은 만큼 울었고, 어린 소녀의 눈물은 뺨을 타고 주륵주륵 흘러 종이 위로 떨어졌다. ... 정말이지 사람은 어떻게 살아갈지에 대해 결정을 내려야 한다는 것을 그녀는 깨닫게 되었다.
272쪽
도티는 큰 소리로 웃고 싶었다. 오, 그녀는 정말로 그러고 싶었다. 도티는 이렇게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어본 게 정말 오랜만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흘끗 고개를 들어 셸리를 보았는데, 도티는 자신이 세상에 늘 평온한 겉모습만을 보여준다고 생각했지만, 셸리가 도티의 웃고 싶은 욕망을 눈치채고 몹시 화가 났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래, 그녀가 화날 만하다고, 도티는 받아들였다. 결국 이 여자의 이야기에서 요점은 애니가 자신에게 창피를 줬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창피를 당한 것이 비웃음거리가 되어서는 안 된다. 도티는 그것을 잘 알고 있었다.
274쪽
도티는 그 순간 살펴야 할 다른 일이 있는 것처럼 일어서서 데스크로 걸어갔지만, 그건 그저 셸리에게 자신의 표정을 들키지 않기 위해서였다.
279쪽
그녀는 어린아이가 특별한 날을 추억하기 위해 입장권 반쪽을 기념품처럼 간직하듯 그의 숙박 기록을 간직했다. 그 모든 것이 봄날에 졸졸 흘러가는 개울처럼 숨김이 없었다.
...
다음날 아침식사 시간에 셸리는 도티를 본체만체했다. 통밀 토스트에 대해서도 고맙다고 말하지 않았다. 도티는 깜짝 놀랐다. 갑자기 울컥하며 눈물이 차올랐다. 하지만 이내 그녀는 이해했다. ... 그녀는 자신의 욕구를 충족시킨 뒤에 창피해하는 중이었다. 그녀는 자신이 원했던 것보다 더 많이 털어놓았고, 이제는 어쩐지 도티가 비난의 대상이 되었다.
280쪽
누군가의 이야기를 듣는 것은 수동적인 행위가 아니다. 정말로 듣는다는 것은 능동적인 행위이고, 도티는 정말로 들었다.
281쪽
그녀는 잼에 침을 뱉어 섞었고, 다시 입안에 침을 모을 수 있을 만큼 모아 뱉었고, 스몰부부가 떠날 무렵 잼 그릇이 텅 빈 것을 보며 얼마간 기쁨을 느꼈다. 아마도 태초부터 사람들은 음식을 내가면서 거기 침을 뱉었을 가능성이 높았다. 도티는 이런 행동이 주는 쾌감은 그 생명이 아주 짧다는 것을 경험으로 알고 있었지만, 대부분의 쾌감은 짧았고 삶이란 그런 것이었다.
283쪽
도티가 식사실로 돌아왔을 때 닥터 스몰은 자신이 쓴 냅킨을 오트밀 그릇에 던지듯이 내려놓으며 일어서고 있었다. 도티는 깊은 혐오감을 느꼈다. 그녀가 이용당한 것이다.
285쪽
그녀는 그들이 비행기를 타고 가다가 바닷속으로 내리꽂혀도 상관없었으므로 "편안한 여행 되세요" 하고 말하지는 않았으나 셸리의 빨간 코를, 코끝에서 대롱거리는 콧물 방울을 보자 한순간 슬픔을 느꼈다. 하지만 닥터 스몰이 여행가방을 들고 도티를 밀고 스쳐가면서 "완전히 미친 여자야, 맙소사" 하고 말하자 도티는 자신의 멋진 침착함이 되돌아오는 것을 느꼈다. 그녀가 예의바르게 말했다. "그럼 안녕히 가세요." 그리고 그들이 나간 뒤 문을 닫았다.
289쪽
그러고는 아버지를 올려다보았는데, 그가 그녀를 돌아볼 때 애니는 그의 눈동자에서 앞으로 그녀의 마음속에 영원히 남아 있게 될 뭔가를 보았다. 그것은 뭔가 아버지답지 않았고 좋은 것으로 보이지도 않았다. ... 애니는 샬린이 자기 아버지를 무서워하듯 아버지를 무서워한 적이 한 번도 없었다. 그리고 애니는 어머니를 무서워한 적도 단연코 없었다. 어머니는 부모 중 더 편안한 쪽이었지만 더 중요한 쪽은 아니었다.
293쪽
애니는 여전히 활기차고 끊임없이 수다를 떨었지만, 오래전 기억 속에 묻힌 녹음기와 관련된 사건-그녀와 제이미가 공유한 비밀이었다-이 있은 뒤로 그녀는 얇은 껍질이 자신의 가족을 단단히 둘러싸고 있는 것 같다고 느꼈다. ... 그녀는 그 껍질에 작은 구멍을 내서 빠져나오려고 꿈지럭거렸다. ... 소시지의 껍질은 수치심이었다. 그녀의 가족은 수치심이라는 껍질에 감싸여 있었다. 아이들이 으레 그러듯 그녀는 이것을 생각보다 느낌으로 더 잘 알았다.
297쪽
그 말에 그녀가 놀란 건 아버지의 표정에서 묻어나는 혐오감과 분노 때문이었다.
298쪽
그렇게 그녀는 완전히 떠났다. 그때 그녀의 나이는 열여섯이었고, 부모는 반대하기는커녕 고등학교 과정을 마치라는 말조차 하지 않았는데, 나중에야 그녀에게 그런 사실이 떠올랐다.
303쪽
애니는 불안함이 물리적으로, 거의 전류가 흐르듯 퍼지는 것을 느꼈다.
304쪽
"알았어." 마침내 애니가 말했다. 그녀의 언니 오빠는 한동안 말이 없었고, 중년의 주름살이 생긴 중년의 얼굴이었음에도 그들의 얼굴은 아주 어리고 슬퍼 보였다.
305쪽
"그런 걸 여쭐 생각은 아니었어요." 애니가 부드럽게 말했다.
"그러면 뭔가 흥미로운 이야기를 해줘. 흥미로운 곳 어디어디를 갔다 왔니?"
애니는 그녀를 쳐다보았다. 늙은 여인의 얼굴에 아이 같은 기대감이 떠올랐다. 애니는 이 집에서 오랜 세월 살아온 이 여인에게 예상치 못한, 거의 참을 수 없는 연민이 솟구치는 것을 느꼈다. ...
"오, 모조리 이야기해줘, 애니."
"잠시만 그냥 앉아 있을게요." 그래서 그들은 침묵했고, 할머니는 참을성을 보이려고 애쓰는 젊은 사람처럼 다시 드러누웠다. 그리고 바로 이날까지 자신을 늘 어린아이라고 느꼈던 ... 애니는 이제 자신이 나이를 먹었다는 걸 조용히 느꼈다.
306쪽
"맞아." 아까 언니가 그게 사실이었다면 그들이 진작 알았을 거라고 소리쳤을 때, 애니는 그렇게 말했었다. 그때 애니가 말하지 않은 것은 뭔가를 알지 못하는 방법도 아주 많다는 것이었다. 그 순간 그녀가 지난 세월 겪어온 경험이 각기 다른 색깔-어떤 색깔은 어두웠다-의 털실을 섞어 짠 뜨개질감처럼 펼쳐졌다. 이제 삼십대가 된 애니는 남자들을 사랑했고, 실연에 종종 가슴아파했다. 배반과 기만의 기류는 어디에나 있는 듯했다. 그리고 그녀는 그것이 취하는 형태에 번번이 놀랐다. 하지만 그녀는 친구들이 많았고, 그들 또한 그들 자신의 문제로 좌절했으며, 서로 밤낮으로 위로하고 위로받았다.
308쪽
애니는 그들의 방어적인 얼굴에 고뇌가 스며 있는 것을 보았었다. "오," 그녀는 말하면서 자신이 그들의 엄마나 보호자가 된 것 같았다. "그건 정말로 중요하지 않아."
하지만 중요했다! 오, 그것은 중요했다.
309쪽
"한번은 그들이 숲속에서 너를 봤대, 애니. 아버지는 그뒤로 둘이 있는 걸 너한테 들킬까봐 늘 두려워했어." 애니가 고개를 끄덕였다. 애니의 반응이 성에 차지 않는다는 듯 신디가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동생을 쳐다보았다. 애니는 잠시 동안 언니의 손에 자신의 손을 얹었다.
310쪽
애니는 형제들을 돌아보았다. 그들은 가엾은 샬린처럼 매일매일 두려움을 느끼며 살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진실은 늘 거기에 있었다. 그들은 수치심을 먹고 자랐다. 그것이 그들의 토양을 만든 자양분이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그녀가 가장 잘 이해할 것 같은 사람은 아버지였다. 그리고 잠시 애니는 놀라움을 느꼈다. 착하고 책임감 있고 품위 있고 바른 마음을 가진 오빠와 언니는-그저 그 시간 동안에는 지구를 뒤로하고 떠나온 듯 눈부시게 하얀 태양 가까이에 있기 위해-자신들이 가진 모든 것을 걸게 되는 열정을, 자신들이 소중히 여기는 모든 것을 무모한 위험에 빠뜨리게 되는 그런 열정을 한 번도 알았던 적이 없었으리라는 사실에 대해.
314쪽
그녀에 대한 그의 염려-사랑-는 진심이었지만, 그녀에 대해 느끼는 책임감은 어느 누구에게도 인정하고 싶지 않은 방식으로 그의 마음속에 불쾌함을 일으켰다. 그는 눈을 뜨면서, 그것은 그녀가 혼자이고 행복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
에이블의 혼란스러운 마음은 동생의 삶에도, 자식들의 어린 시절에도 오롯이 머물러 있지 못했다. 흘러가는 시간은 붙잡을 수 없는 것이라는 생각에 그는 잠시 가슴이 먹먹했다.
315쪽
그가 소피아를 흘끗 보니 아이는 열중해서 무대를 보고 있었다. 조이를 흘끗 보니 그녀도 그를 쳐다보았는데 에이블로서는 이해되지 않는 차가운 눈빛이었다. ...
어떤 생각이 처마에서 휙 내려오는 박쥐처럼 에이블을 덮쳤다. 조이는 행복하지 않은 것이다. 그 생각이 그의 무릎 위에서 검은 형체를 얻었다. 마치 그가 그것을 거기에 붙들고 있어야 한다는 듯이.
319쪽
조명이 사라졌다. 무대는 암흑에 빠졌다. 배우들이 대사를 멈췄다. 문 위로 출구 안내판만이 빛을 밝혔다. 그리고 통로 바닥에 환한 단추처럼 줄줄이 켜진 불빛. 에이블은 주위에서 두려움이 검은 물처럼 차오르는 것을 느꼈다. 소피아가 울기 시작했고, 다른 아이들도 울고 있었다.
320쪽
"내 생각엔 여기서 나가는 게 좋을 것 같은데, 에이블." 그의 아내가 말했다. "그리고 만약 당신이......"
결혼생활을 오래하면 말로 나눈 것도 많고 일어난 일도 많아서 누적된 효과 또한 존재한다. 그 모든 일이 에이블의 가슴속을 빠르게 지나갔다. 남편과 아내 사이의 다정함이 줄어든 지는 오래되었고, 그는 그것 없이 남은 평생을 살아야 할지도 몰랐다. 그에게서 어떤 소리가 새어나왔다.
321쪽
마침내 공연이 재개되나 그들은 다시 관람했다. 하지만 그 사건이 일으킨 긴장감은 완전히 소멸될 수 있는 게 아니어서 마지막으로 조명이 꺼졌을 대 터져나온 박수갈채는 안도감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322쪽
"엄마, 이 문제는 그만 놔둬요." 조이가 고단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마 조이는 자식들이 어른이 되면 흔히 그러듯 부모의 결혼생활에서 흠을 발견했을 것이고, 세월이 흐르면서 다정함이 사그라지는 것을 보았을 것이고, 부모에 대해 깊은 혐오감을 느꼈을 것이다. 제 결혼생활은 결코 엄마 아빠 같지 않을 거예요, 아빠. 좋구나, 그는 그렇게 말했을 것이다. 그거 좋구나, 얘야.
326쪽
에이블은 말하고 싶었다. 제가 언제까지 여기 있어야 할까요? 하지만 그것이 생각에 그쳤을 뿐임을 깨달으며, 그는 자신이 뚜렷하고 이상한 방식으로 스스로에게서 유리되어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327쪽
그가 웃자 이를 때운 충전재가 드러나 보였고, 에이블은 그 순간 깜짝 놀라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는 자신이 얼마나 오랫동안 이곳에 있어야 아내-혹은 조이-가 기다리다못해 극장으로 차를 몰고 올지 궁금했다.
329쪽
스크루지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그러고는 에이블을 가리킨 둘째손가락으로 자신의 말을 강조해가며 말했다. "우리는 모두 관객이 필요해요. 우리가 뭔가를 하는데 아무도 우리가 그걸 했다는 사실을 모른다면? 음, 나무가 혼자 숲에서 쓰러졌다면 쓰러지지 않은 거나 마찬가지겠죠."
329쪽
"나는 그런 것에는 관심이 없어요." 에이블이 말했다.
"내일은 생길지도 모르죠. 혹은 그다음날에는."
"내 관심사는 저 조랑말을 다시 손녀에게 갖다주는 거예요."
한참 가만있던 스크루지가 이윽고 말했다. "그거 참 묘한 일이네요. 하지만 그 말을 들으니 질투가 나서 마음이 아프군요. 아마 당신은 이렇게 말하고 싶겠죠. '당신에게 손녀가 있다면, 괴짜 동성애자 배우 양반, 그 사랑을 이해할 거예요'라고."
"그런 생각은 전혀 안 했어요. 그건 내가 생각하고 있던 어떤 것과도 거리가 멀어요. 나는 소피아를 생각하고 있었어요. 조랑말을 기다리고 있을 그애를. 지금쯤 잠들었기를 바라지만."
332쪽
에이블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수치심의 은밀한 대못이 그의 가슴에 박혔다. ...
에이블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메슥거리는 느낌이 원반처럼 빙빙 돌며 그를 통과했고, 갑자기 입안에 침이 가득 고이는 것 같았다. 그의 마음에 온전한 이해가 찾아왔다. 조이는 행복하지 않았다.
333쪽
그러니 이제 더이상 남편과의 잠자리도 좋지 않을 거예요. 그것도 이제는 허드렛일인 셈이니까요. 그리고 남은 인생을 바라보며 생각하는 거예요. 맙소사, 이게 뭐지? 아이들은 자랄 테고, 그러면 정말로 지독히 따분한 세상이 시작되는 거죠. 새 팔찌를 사고 새 구두를 사고, 어쩌면 그게 오 분 동안은 도움이 되겠지만 점점 더 불안해져서 곧 그 때문에 발륨이나 항우울제를 먹게 될걸요. 사회는 오랫동안 여자들에게 약을 줘왔으니까......"
334쪽
바로 그해에 6학년이던 어린 동생이 반 친구들 앞에 불려나가 옷에 묻은 얼룩을 지적받으며 생리대를 살 돈도 없을만큼 가난한 사람은 없다는 말을 들었다. 그 일이 있은 뒤로 도티는 학교에 가기 싫다고 했고, 에이블은 동생에게 뭔가를 약속했지만 그게 뭐였는지는 기억나지 않았다. 기억나는 것은 월급수표의 위력이었다. 열여섯 살에 그는 돈의 위력을 알게 되었다. 돈으로 살 수 없는 유일한 것은 도티의 친구가 되어줄 상대였지만(혹은 그의 친구가 되어줄 사람이었지만, 자신의 문제는 그만큼 중요하지 않았다), 돈이 있으면 반짝거리는 팔찌를 살 수 있었고, 동생이 받은 것은 그것이었다! 그리고 동생은 그것을 받고 웃었다. 그리고 무보다 돈으로 먹을 것을 살 수 있었다.
=>나는 내가 돈의 위력을 느낀 적이 없거나, 있어도 거의 25살이 넘어서임을 알았다. 그때도 위력을 느끼기보다는 '돈이 있는 사람들이 무서웠다.' 어릴 때는 돈이 없어서 못한다, 싸운다, 괴로운 거다 라는 이야기만 들었을 뿐, 돈이 있으면 무엇을 할 수 있고 얼마나 좋은지 잘 몰랐다.
335쪽
에이블에게 삶이 수수께끼인 부분은, 사람들은 많은 것을 잊어버린 후에도 그것을 지닌 채 살아간다는 사실이었다-환각지같은 거라고, 그는 생각했다.
338쪽
그의 목소리는 거의 속삭이는 듯했다. 그는 마음을 어디에 두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피로가 한 폭의 옷감처럼 그를 덮고 있었다. ...
에이블은 거의 미소를 지었는데, 왜 미소를 짓겠다는 충동이 일었는지는 알 수 없었다. 그리고 놀랍게도-공포스럽게도!-그는 울고 싶어졌다. 가까스로 참아냈지만 그것이 그의 말투에 영향을 미쳤다.
341쪽
키스가 암으로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에이블은 깜짝 놀랐다. 그가 놀란 것은 죽음, 한 사람이 싹 지워지는 것, 그 남자가 그렇게 간단히 사라져버렸다는 사실에서 느껴지는 어리둥절함과 관련이 있었다. 사라지는 것의 단순함은 에이블에게 익숙한 것이었다. 그는 젊은 사람이 아닐뿐더러, 아버지가 사라진 것부터 시작하여 타인들의 죽음을 봐왔다. 하지만 그때 놀라움에 뒤따른 감정은 활활 타오르는 수치심이었다. 마치 지난 세월 키스에게 자신의 옷을 만들게 한 것이 뭔가 불미스러운 행동이었던 것처럼. 그는 자신의 차에 탔을 때나 혼자 사무실에 있을 때, 혹은 아침에 옷을 입으면서 이 말을 소리 내어 중얼거렸다. "미안해요. 오, 정말 미안해요."
346쪽
혈관에 액체가 도는 서늘한 느낌이 들어 그는 아마 자신에게 장치를 연결하고 약을 투입하는가보다고 생각했지만 그것을 물어볼 적당한 단어가 떠오르지 않았다. 곧 구급차가 속도를 높이자 에이블은 공포가 아닌 묘하고 강렬한 기쁨을 느꼈다. 온갖 문제들이 그 껍질이 벗겨진 채로, 혹은 지금도 계속 벗겨지면서 돌이킬 수 없이 그의 통제를 벗어나는 데서 오는 지극한 행복감을. 하지만 그의 손이 닿을 수 없는 곳에서 불빛이 반짝이고 있는 것처럼, 거기 크리스마스 창문이 있는 것처럼, 다른 무언가가 기다란 흔적을 그리고 있었다. 그는 그것을 보며 어리둥절해지기도, 기분이 좋아지기도 했는데, 고단한 황홀경 상태에서 그것은 거의 그를 향해 다가오는 것처럼 느껴졌다. 링크 매켄지의 목소리가 들렸다. "당신은 좋은 사람이에요." 에이블은 가슴에 돌무더기가 쌓여 있는 것 같았음에도 그 말을 들으니 미소가 지어졌다. 멋지고 덩치 큰 여자의 차분한 목소리가 "블레인 씨, 견디셔야 해요"하고 그에게 말했다. 그래서 그는 어쩌면 그 미소가 그들에게는 고통에 찬 찡그림으로 보였겠다고 생각했지만 그게 무슨 상관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