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재나 개인전
권재나 개인전 Solo Exhibition
<언폴딩 듀오로그 Unfolding Duologue>
/온 /수 /공 /간
마포구 서교동 376-7
2022년 5월 27일 – 6월 19일
12:00-18:00 (무휴)
글/기획 이은수
디자인 이민희
권재나 작가(인스타그램 @jaena_kwon_art)의 작업에 관하여 인터뷰 형식으로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도록에는 발췌본이 실리고 여기에서 원문 전문을 작품 이미지와 함께 볼 수 있습니다.=>
https://cargocollective.com/jaenakwon/2022-Unfolding-Duologue
도록에 실린 발췌본
[UNFOLDING DUOLOGUE]
본 인터뷰는 권재나와 질문자 서한겸이 권재나의 작업에 관하여 22/4/1부터 22/4/10까지 대화한 내용에서 발췌하였다.
서한겸(이하 HS): 셰이프드 캔버스 작업에서 단색을 쓰는 이유가 있는가.
권재나(이하 JK): 색을 보는 감각은 상대적이다. 주변의 색 또는 조명에 따라서도 영향을 받는다. 작품을 ‘캐드뮴 레드 딥Cadmium Red Deep’으로 칠했다면 이 빨간색은 물리적으로는 고정된 특질이지만 환경이 항상 변하기에 실제로는 끊임없이 다르게 보인다. 내가 앞에 서서 그림자가 진다면 그림자가 진 캐드뮴 레드, 내가 새파란 옷을 입고 앞에 서서 반사빛이 비친다면 또 다른 종류의 캐드뮴 레드가 된다. 그래서 한 번에 하나의 색상의 매력을 제대로 관찰해 보자는 의미를 담아 단색을 사용했다.
HS: 캔버스에서 붓자국을 독립시켜 오브제를 만들고 있다. 붓자국을 고르는 기준이 있나? 특별히 끌리거나 매력적인 형태를 찾아내나? 붓자국은 전체 이미지를 만드는 과정에서 나온다. 한 화면은 전체 이미지로 완성되는데 개별 붓자국들이 그 화면보다 더 중요할 때도 있나?
JK: 개별 붓자국이 그 화면보다 더 중요할 때는 없다.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형태를 찾으려는 목적이 있다. 하나의 마음에 드는 붓자국을 발견하면 그것을 모티브로 삼아 시리즈를 만들어 여러 작품에서 이용하기도 한다. 시각적 자극이 범람하는 시대에 스스로 신선함을 느끼는 형태를 찾는다는 것 자체가 매우 힘든 일이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를 포착했을 때 질리도록 응용해 본다. 붓자국을 종이 모델로 구조화하는데 종이 자체의 물질성(두께나 섬유)으로 인해 하나의 붓자국으로도 여러 개의 변주를 만들어 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과정은 그 신선한 자극을 빠르게 습득하고 소비하는 방법이라 또 금방 질리게 된다. 그래서 그 순간을 놓치지 않게 그때그때 속도감 있게 집중하여 작업을 하는 것이 중요하다.
HS: ‘어떤 붓자국 하나를 찾아내고 주목해 확대하고 공들여 오브제로 만드는 일’에는 의식적인 것의 지루함과 한계를 넘어서거나 자극을 얻는 것보다 더 큰 의미가 있을 것 같다.
JK: 다듬어 보려는 시도도 있다. 어떤 붓자국이 특별해서라기보다는 명확한 표현에 대한 열망, 아무도 몰라도 스스로 그 안에서 조금 더 낫다고 생각하는 표현법에 대한 갈망이다. 노래를 녹음할 때 한 음절, 한 마디를 계속해 부르고 또 불러보는 것처럼. 시각표현 안에서 그러한 섬세함을 표현하고 싶다. 반복하고 변주하기도 하고 붓자국 안의 섬세한 뉘앙스를 최대한 분석해서 깨우치려 한다. 더 나은 표현을 향한 지향인데 기준이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니라 말로 표현하기가 어렵다. 그러나 이전의 표현들과 비교하면 더 나아지는 부분을 확인할 수 있다.
HS: 권재나의 작업에서는 하나의 시점time에서 공간을 파악할 수 있고, 한 공간에서 시간의 흐름이 잘 느껴진다. 공간이 언급되는 만큼 시간이 중요한 개념이라고 생각한다. 공간의 정체, 공간이 연결된 실체는 연속된 시간의 흐름 속에서만 파악될 수 있기 때문이다. 어느 건물 내부의 부분들을 찍은 여러 장의 사진과 건물 내부를 이용하며 연속해서 찍은 동영상을 비교해 보라. 이런 점은 폴드fold와 관련해 설명할 수 있을 것 같다.
JK: 폴드의 개념은 종이를 접는 데에서 출발하였다. 팝업 오브젝트를 2009년부터 만들기 시작했는데 종이를 접었다 펼쳤다 하는 구조가 회화를 떠올리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한 장의 종이를 회화의 평면에 비유했다. 폴드란 접혀있어도 펴진 상태의 가능성을 내포하며 회화의 물리적 한계와 정신적 확장을 동시에 이야기하는 개념이다.
HS: 폴드는 주름이다. 공간도 시간도 접었다가 필요할 때에 펼쳐서 쓰는 상상은 본능적인 것이 아닌가? 순간이동처럼 말이다.
JK: 폴드는 공간과 신체에 대한 제약을 극복하는 상상이다. 한계를 넘어서는 자유의 추구, 정신적 해방이란 면에서 볼 때 이러한 상상은 그 자체의 의미를 지니는 듯하다. 하지만 운동 속도에 따라 각자 시간과 공간을 상대적으로 느낀다는 상대성 이론을 보면 시간과 공간의 왜곡, 휘어짐은 어느 정도로는 실제로 일어나는 일인 것 같다. 타임머신을 타고 남들보다 더 길게 살거나 적게 살거나 하는 상상을 하지만, 내가 느끼는 수명은 일정한 것처럼, 기준을 어디에 두는가에 따라 시공간의 개념은 변칙적일 수 있다고 생각한다. 회화도 물질과 공간의 제약 가운데 존재하지만 그것을 벗어나고자 하는 상상이다.
HS: 평면에서 얻고 싶은 게 있어서 셰이프드 캔버스의 형식을 택한 게 아닐까? 이점이 폴드와 연관이 있다고 생각한다. ‘접혔던 것이 펴졌다’는 점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접혔던, 주름졌던, 압축되었던 시공간의 일부를 재발견 재조명 확대 재해석한다는 의미가 있다. 이 점에서 팝업이나 VR이 아닌 캔버스 형식이 더 적절해진다. 평면에서 얻고 싶은 것이 무엇인가?
JK: 압축된 것을 확장하는 확장된 감각. 물질과 평면이라는 어떠한 종류의 프레임 안에서 해방된, 정신적 자유.
HS: 폴드에서 접힌 공간만큼 시간도 접혀 들어가 있고 레이어로 쌓여있다. 회화 또한 시간 신체의 움직임이나 제스처가 모인 것이다. 그 흔적이 남은 것, 그 배경, 공간. 이전 작품과 연관하여 봤을 때 콜라주적인 요소들도 포함하고 있다.
중력, 인간의 몸, 몸의 취약함은 모두 인간의 한계지만 동시에 그냥 인간의 조건 자체다. 중력과 취약함, 몸이 권재나의 작업에 중요한 내용이라고 생각한다.
JK: 작업 내 콜라주의 방식은 아직도 유효하다. 시각 기억과 사건 당시의 느낌을 불러와서 일상에서 본 이미지들을 소재로 편집하고 재해석해서 새로운 콜라주를 만든다. 그 결과로서의 작품을 스스로 확인해보기 위해 그린다. 그리는 행위도 과정도 아니고 과정과 변화할 있는 모든 가능성을 제거한 표현으로서의 완결된 ‘결과’를 그린다.
HS: 회화가 가장 잘, 많이, 효율적으로 폴드될 수 있는 공간인 것 같다. 붓질을 통해 물감들이 면을 만드는데, 어떠한 재료보다도 유연하고 얇게, 그래서 많이 접힐 수 있게 쌓이기 때문이다. 회화 화면이 압축적인 공간인 것 같다.
JK: 그래서 시공간의 감각을 효과적으로 잘 전달할 수 있는 매체이다. 그러나 동시에 함축적이므로 해석의 여지가 다양해질 수 있고, 그를 분석해내는 감각 또한 중요하다고 본다.
HS: 지지체support 문제는 무엇인가?
JK: 회화에서 ‘환영’과 물감 이외의 ‘물질’을 어떻게 다루는지에 관한 문제이다. 회화는 환영이 퇴출된 평면이라는 그린버그식의 명제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면 잭슨 폴록의 그림이 이해된다. 그렇지만 바닥에 깔고 제작된 폴록의 천을 다시 나무로 된 지지체에 동여매는 행위는 단지 관람의 편의를 위한 것인지 혹은 기존 형식을 답습하는 것인지 궁금했다. 지지체가 그림이라는 형식을 유지하기 위해 존재한다면 ‘공간 점유를 위해 어쨌든 필요하니까 기존의 형식을 답습하는 것’ 외의 이유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캔버스의 옆면이 거슬리게 된 이유이자 아예 오브젝트의 형식을 띈 미니멀리즘에 공감했던 부분이었다. 지지체가 있다면 지지체 존재의 이유가 있어야 한다. 그 존재가 내용과 형식에 있어 잘 어우러지는 방향으로 고려되거나 혹은 기존의 형식 자체로 존재하는 이유에 대해 정당하게 설명하는 방식이 되어야 한다.
HS: 셰이프드 캔버스 만들기 시작한 이유를 듣고 싶다.
JK: 셰이프드 캔버스는 확대된 붓자국이자 연속된 평면으로 지지체의 문제를 해결해 보려는 시도이다. 회화에 대한 모종의 부담감에서 실험으로 시작해 보았다. 회화가 어떤 역할을 해줄 수 있다는 믿음에 기반하여 내가 생각하는 회화의 기본 단위인 붓자국을 연구해 보고 싶었다.
HS: 미니멀리즘은 ‘이 작품을 전체가 균질하고 순정한 똑같은 색인 정육면체라고 하자’는 암묵적인 제안을 한다. 추상표현주의도 ‘이 작품을 완전히 평면이라고 하자’는 암묵적 합의가 필요하다. 권재나의 작품은 이러한 암묵적인 전제를 없애는 점이 특징이다. ‘이것은 이것이다’라고 집중해서 보여주려 한다. 눌린 자국이나 둥글려진 엣지 등 인체와 피부 같은 표현은 마치 도널드 저드의 작품에 손때가 묻은 느낌이다. 물질은 정신 개념 주의ism가 아니고 물질이다, 몸은 마음이 아니고 몸이다, 같은 메시지를 보낸다. 당신은 거기가 아니고 여기 있어요. 당신은 그때가 아니라 지금을 산다. 다른 무엇을 찾지 말고 바로 이것을 보라. 등등.
반드시 이 모양, 이 색으로, 이 재료로 구현하고 싶은 이미지가 마음속 또는 머릿속에 있는지 궁금하다. 무엇을 그리는가?
JK: 머릿속으로 어떤 이미지를 상상하는 능력은 눈으로 기존의 이미지를 판별하고 조합하는 능력보다 한참 떨어진다. 상상한 색에 꼭 맞는 물감을 찾는 것이 불가능한 것과 비슷하다. 눈은 백만 가지의 색을 구별할 수 있다고 하는데, 머릿속에 있는 색의 범주는 수천 정도면 예리한 사람이고, 평범한 사람들은 언어로서 표현 가능한 수십 가지 정도의 색만 느끼며 살지 않을까. 머릿속에 있는 구체적 이미지는 사실 구체적이라고 믿는 모호한 이미지일 것이다.
이 모양, 이 색, 이 재료를 사용해야겠다는 결정은 한순간에 결정되는 것이 아니다. 과정을 통하여 완성의 단계로 나아갈수록 다양한 변수의 가능성을 최대한도로 없앤 후에야 그 추상적인 뉘앙스가 무엇이었는지 스스로 알게 된다. 그 중간중간의 선택이 결과에 효과적으로 적용되면, 이러면 어떨까? 저러면 어땠을까 하는 질문을 하지 않게 된다. 이런 과정을 통해 기억이나 행위에서 뽑아 나온 모호한 형태, 덩어리, 흐려지며 잊히는 것들, 파편적인 인상, 뉘앙스가 선택의 단계와 물감을 이용하여 분명해지는 결과를 그린다.
HS: 캔버스는 붓자국이 늘어선 무대가 되고, 전시장은 캔버스들이 늘어선 무대가 된다. 사람들은 붓질에, 캔버스는 공간에 대응될 수 있는가?
JK: 그렇다. 캔버스에서의 연극성을 중요하게 생각하고, 캔버스를 연극의 무대처럼 다룬다. 무대의 공간에서 배우의 퍼포먼스처럼 붓자국을 움직이고 싶다. 그리는 순간에는 내가 배우가 되고, 관객이 붓자국을 관람하여 돌아다닐 때에는 관객이 배우가 될 수 있는 배경이 캔버스였으면 한다. 또한 영화가 아닌 연극을 보러 가는 것처럼 이미지(영화)가 아닌 실제의 움직임을 목격하여, 생생한 숨소리를 듣고 싶은 그런 욕구가 캔버스에 존재한다. 무대에만 조명이 밝혀진 어두운 극장에 들어가며 어떤 의도된 공간적 단절과 퍼포먼스 자체의 집중에 참여할 의지를 보이는 것처럼 캔버스도 긍정적인 의미에서의 차단된 새로운 경험으로, 좋은 공연을 보는 것에서 나오는 그런 카타르시스와도 유사한 경험을 유도하고 싶다. 몰입 경험과 상호작용적인 특징을 가져오고 싶다.
HS: 투명성을 띤 사각 캔버스의 사각이 이런 역할을 한다. 다른 외부적 감각을 차단하고, 별세계로 자연스럽고 이물감 없이 이동하게 한다. 각각의 붓자국이 연극의 인물이라면 미시적인 것이 모인 거시적 세계처럼 느껴지겠지만, 퍼포먼스의 흔적이라면 나중에 선택되어 오브제로 만들어지는 붓자국은 주인공이나 특별한 존재가 아니라 한 삶과 사람의 어떤 특별한 순간 또는 우연히 행운적으로 얻어진 매우 흡족하고 행복한 순간의 기록 같다.
작업의 색채가 대체로 밝으며 시각적으로 균형 잡혀 있고 리듬감이 있고 즐겁게 느껴진다. 어떤 감정과 느낌을 가지고 작업을 진행하는가?
JK: 난해한 시각 정보(추상)나 그 단위(붓자국)을 이용하여 유동성, 속도감, 명확성, 호쾌함, 상쾌함 등의 결과를 만든다. 물감이 내포할 수 있는 여러 상태인데 물질을 다룰 때의 속도를 둔하게 빠르게 흐르는대로 급하게 등 다양하게 조절하면 유동성, 호쾌함, 무겁거나 가벼운 느낌을 줄 수 있다. 금방 지루해지는 예측 가능한 패턴을 피해 크거나 작은 붓질, 그리고 예측 불가능한 붓자국을 사용하면 붕 뜬, 신나는, 리드미컬한 등의 감정과 연관된다. 물감 간의 컨트라스트는 명쾌함을, 부드러운 그라데이션은 차분한 느낌을 준다.
이러한 조합으로 시각적 자극을 활성화시켜 물질 이상의 감정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 왜 그러한 자극이 느껴지는지,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호기심이 일어나는 상태다. 눈의 능력은 굉장히 꼼꼼하고 섬세해서 머리로 이해하는 영역보다 더 많은 정보를 본능적으로 관찰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수십 개의 색이름으로 표현되기 힘든 수천수만 가지의 색을 눈이 감지할 수 있는 것처럼 말이다.
인간은 더 이상 시각이 생존의 문제를 결정하는 시대를 살지 않는다. 나는 일상에서 발휘할 수 없는 시각의 능력을 끌어내고 싶다. 배고픈 육식동물이 사냥을 위해 수풀 속 미세한 움직임을 관찰할 때처럼 집중해야 하는 시각적 상태를 만들고 싶다. 장난이나 놀이가 아니라 살아남기 위해 꼭 필요한 먹이다. 배고픔으로 절체절명의 상황에서 먹이를 잡으면 어떤 기분일까. 재미와 신남도 있겠지만 만족, 후련함, 안도감이 더 클 것이다. 적극적인 시각의 활성화와 집중도를 담은 작품으로 후자에 가까운, 무거운 문제를 짊어진 상황에서지만 가능한 삶에 대한 안도감을 전하고 싶다. 삶의 난해한 불확실성은 여전하지만 유쾌하고 호쾌한 붓자국을 통해 걱정들이 없어져 마음이 편해진 상태를 관객 각자의 삶에 전하고 싶다.
원문 전문
[UNFOLDINF DUOLOGUE]
본 인터뷰는 권재나와 질문자 서한겸이 권재나의 작업에 관하여 22/4/1부터 22/4/10까지 대화한 내용에서 발췌하였다.
서한겸이 생각하는 권재나 작업의 키워드
차원, 평면(을 넘어서는 것), 폴드, 촉각의 공간, 단색의 사용, 단색이 위치에 따라 다르게 경험되어 다른 색이 되는 것, 환영이 아닌 것, 실제 공간, 실제 물질, 물질 자체, 물성을 통해 새 공간으로 인도하는 것, 확장성, 환영을 구성하지 않고 실재적 경험을 하게 하는 것, 몸, 중력, 취약성, 피부, 신체, 인체공학적인 둥근 엣지, 눌린 자국
셰이프드 캔버스와 붓자국에 대하여
서한겸(이하 HS): 셰이프드 캔버스 작업에서 단색을 쓰는 이유가 있는 것 같다. 공공조각 작업 Heart as One 도 정면에서 보면 하나의 색인데 조명에 따라 굉장히 다른 색으로 보인다.
권재나(이하 JK): 색을 보는 감각은 상대적이다. 주위에 어떤 색이 있는가도 영향을 미치고 조명에 따라서도 엄청난 영향을 받기 때문이다. 밝기는 물론이고 형광등, 텅스텐, 햇빛(아침, 낮, 밤이 또 다 다름) 등등이 주는 색의 온도가 다 다르기 때문이다. 야외에서는 그러한 면이 더욱 두드러진다. 그래서 상업적으로 이용하기 위하여 하나의 기준으로 색을 보는 환경을 정의한 기준이 있다. 상업 디자인과 사진의 관람환경에 관한 국제 협약 기준, ISO 3664:2009이 그러하다. 이 환경의 기준을 지키면 적어도 이 환경 내에서는 저 사람이 본 색을 나도 동일하게 관람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 외의 모든 환경에서 색은 상대적이다. 어떤 색을 나는 이 작품을 ‘Cadmium Red Deep’으로 칠했다면 이 캐드뮴 레드라는 색은 물리적으로는 고정된 특질이고, 내 머릿속에서도 그렇다고 생각하지만, 환경과 조명이 항상 변하기에 실질적으로는 끊임없이 다르게 보이기 마련이다. 인상주의자들이 관찰했듯 아침에 보는 캐드뮴 레드, 점심에 보는 캐드뮴 레드, 밤에 보는 캐드뮴 레드가 다 다르고, 형광등이냐 LED냐 색온도에 따라서도 다르고, 심지어 내가 앞에 섬으로써 그림자가 진다면 그림자가 진 캐드뮴 레드가 다르고, 내가 새파란 옷을 입고 앞에 서서 색상의 반사빛이 비친다면 그 또한 다른 캐드뮴 레드가 된다. 배경이 흰색이냐 회색이냐 검은색이냐에 따라서도 각기 다 다른 캐드뮴 레드이며 나의 동공이 얼마나 열렸느냐에 따라서도 다 다른 캐드뮴 레드로 감각할 수 있다. 그래서 한번에 하나의 색상이라도 제대로 관찰해보자 라는 의미를 담아 단색을 사용했다.
HS: 셰이프드 캔버스 작업은 권재나 본인의 회화 작업에서 찾은/발견한 붓자국인가? 몰입한 순간에 그린, 그러니까 그리는 순간에는 의식하지 못했던 붓자국을 찾아 오브제로 만든 것인가? 아니면 오브제로 그릴 것을 염두에 두고 그린 경우도 있는지. 또는 그것을 그리던 순간이 기억나는 붓자국도 있는지?
JK: 붓자국은 회화 작업에서 찾은, 발견한, 혹은 ‘차후에 해석된’ 붓자국이 맞다. 그리는 순간에는 보다 무의식적으로 붓자국을 넣게 되는데, 사실 이 순간이 무의식적, 직관적이라는 단순한 단어로 표현하기에는 더 복잡한 함의가 있는 것 같아서 그 순간을 면밀히 관찰하려는 의도가 있었다. 붓자국은 몸을 움직였던 기억이 시각화되거나 이미지로 기억했던 형상들이 손과 몸을 움찔거리게 만드는 상황을 거쳐, 아직 실현되지 않은 다양한 시각의 가능성들을 상상해보다가, 그중의 최선을 실행해보는 흔적이다.
HS: 기억과 몸(손)이 시간차 없이 상호작용하며, 그러나 가차 없이 그 순간의 결정, 기억과 몸 중 누가 우위를 차지하느냐에 따라 화면을 결정하는 행위다. 물론 둘이 함께 움직인 결과다. 그 결과는 색, 선, 길이, 두께, 물감의 농도 등으로 화면 위에 결정된다. 한 번 결정되고 나면 덮이거나 긁어내질 수 있을지언정 없던 일이 되지는 않는다. 미정이었던 것들을 끊임없이 매 순간 결정해 나간다. 이 점은 삶과 너무 똑같은 부분이다.
JK: 삶의 결정에 있어서 정확한 계산을 한다고 과연 그대로 실행이 가능하며, 그것이 좋은 결과로 이어지리라는 보장이라는 것이 없지 않나. 여러 가지 시나리오를 돌려봐서 가장 좋은 선택지를 택하는 것은 물론 생존 본능일텐데, 매 순간 결정을 해야만 하는 때는 늘 임박하므로 시시때때로 좋고 나쁜 결정들을 하며 살아간다. 사실 나는 충분한 정보 속에서 그러한 결정을 하며 그 결과에 대하여 책임질 준비가 되어있는가를 생각해보면 그렇지 못한 부분이 많다. 그러나 적어도 회화의 화면 내에서 만큼은 나의 움직임과 결정은 후회 없는 흔적으로 작용하며, 삶의 불안감에서 탈피해 미지의 탐험하는 즐거움을 탐구할 수 있는 영역이 된다. 일부러 나쁜 선택을 하기도 하면서 말이다. 망쳐진 그림은 일부러 찢어버리기도 하면서 교훈을 얻고 새로운 그림을 시작하면 된다. 그러나 삶에서 몸을 망치는 선택은 그렇게 쉽게 하지는 못하는 것 같다.
HS: 그렇게 생각하면 회화 공간, 캔버스, 또는 예술 행위 자체가 굉장히 너그럽고 자유로운 세계다. 비용을 치르더라도 다시 할 수 있으니까.
JK: 그러한 너그러운 자유가 정신적인 해방감을 선사하고 그러한 것이 작품을 제작하는 동기가 되기도 한다고 생각한다.
HS: 붓자국을 독립시켜 오브제를 만드는데 붓자국을 고르는 기준이 있나? 특별히 끌리거나 매력적인 형태를 찾아내나? 붓자국은 전체 이미지를 만드는 과정에서 나온다. 한 화면은 전체 이미지로 완성되는데 개별 붓자국들이 그 화면보다 더 중요시 될 때도 있나?
JK: 개별 붓자국들이 그 화면보다 더 중요시 될 때는 없는 것 같다.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형태를 찾으려는 목적이 있다. 어떤 때에는 하나의 마음에 드는 붓자국을 발견하면 그것을 모티브로 삼아 시리즈를 만들어 여러 작품에서 이용하기도 한다. 미술의 역사는 물론이고 시각적 자극이 범람하는 시대에 살고 있기 때문에 스스로 신선함을 느끼는 형태를 찾는다는 것 자체가 매우 힘든 일이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를 포착했을 때 질리도록 응용해본다. 붓자국이 종이 모델을 통해서 구조화하는 과정도 이러한 이유와 연관된다. 종이 모델 단계를 거치면서 종이 자체의 물질성(두께나 섬유)으로 인해 하나의 붓자국으로도 여러 개의 변주를 만들어 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과정은 동시에 그 신선한 자극을 빠르게 습득하고 소비하는 방법이라 어느새 또 금방 질리게 된다. 그래서 그 순간을 놓치지 않게 그때그때 속도감 있게 집중하여 작업을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HS: 화면 위의 붓자국들은 의식적으로 만들어지기도 하고 무의식적으로 손이나 몸의 감각이 더 우세한 채로 만들어지기도 할 것 같다. 그런데 붓자국은 ‘그 붓자국이 만들어지던 순간과 그 순간의 상황, 몸의 느낌’ 또한 담고 있으므로, 그 붓자국이 만들어지던 때의 의식 상태가 어땠는지가 오브제 작업의 의미에 영향을 줄 것 같다. 캔버스 화면 속의 수많은 붓자국 중에서 선택되어서 오브제로 만들어지는 붓자국은 꽤 특별한 대우를 받는다는 생각이 든다. 그림을 그릴 때는 붓자국 하나하나도 중요하지만 그 때 그리려는 감각이나 느낌 그리고 화면 전체의 조화도 부단히 살피며 그리게 되기 때문이다. 그림을 그리는 중에는 신경 쓰지 않다가 나중에 오브제로 제작할 만한 독특한 붓자국을 찾아보는 것인가? 오브제 작업이 권재나 작업의 반 정도의 비중을 차지할 정도로 중요해 보인다. 그래서 혹시 그림을 그릴 때부터 ‘나중에 오브제 작업으로 만들어 볼만한 신선한 모양의 붓자국을 사용하자’고 의식하게 되지는 않는지 묻는 질문이다.
JK: 그림을 그리는 중 나중에 오브제 작업으로 만들어 볼만한 신선한 모양의 붓자국을 사용하자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제작 당시에는 그 회화의 구성이나 밸런스 자체에 집중하기 때문에 그 부분까지 생각할 여력이 없는 것 같다. 따라서 그려지는 순간에 특별한 대우를 받는다기 보다 차후 골라진다고 봐야 맞다. 만약 오브제 작업으로 만들어 볼 특이한 붓자국을 원한다면 흰 종이에 드로잉처럼 하나씩 계속 연습을 해보는 방법을 택했을 것이다. 캔버스 내부의 관계 때문에 수많은 붓자국이 만들어지고 그중 어떠한 붓자국이 발견되고 주목되는 것이다. 오브제가 되는 붓자국들은 캔버스에서는 주위 환경과의 관계성이라는 필연적인 이유(회화의 구성이나 밸런스)로 만들어졌지만, 선택될 때는 그 관계를 버리고 독자적인 형태성만이 이유가 된다. 문장을 구성할 때 어떤 단어를 문장 전체의 관계 속 의미만을 생각하여 썼는데, 후에 문장 속 모든 단어를 곱씹어보고 그중 모양이나 소리가 아름답고 신선한 특정 단어를 선택하는 것이라 생각해보면 되겠다.
HS: ‘어떤 붓자국 하나를 찾아내고 주목해 확대하고 공들여 오브제로 만드는 일’에는 의식적인 것의 지루함과 한계를 넘어서거나 자극을 얻는 것보다 더 큰 의미가 있지 않은가.
JK: 다듬어 보려는 시도도 있는 것 같다. 어떤 붓자국이 유별나게 특별해서라기보다는, 명확한 표현에 대한 열망, 아무도 몰라도 스스로 그 안에서 조금 더 낫다고 생각하는 표현법에 대한 갈망이라고 생각한다. 노래를 녹음해야 하는데 한 부분, 한 단어를 계속하여 불러보고 또 불러보는 것처럼. 시각표현 안에서 그러한 섬세함을 표현할 수 있는 것 같다. 반복하고 변주하기도 하고 붓자국 안의 섬세한 뉘앙스를 최대한 분석해서 깨우치려는 것 같다. 더 나은 표현을 향한 지향인 것인데 기준이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니라 말로 표현하기가 어렵다. 그러나 이전의 표현들과 비교해보면 더 나아지는 부분을 확인할 수 있다.
HS: 어떤 많은 상황이 다 맞아떨어져야 가까스로 아름다움이나 행복을 얻게 된다. 질리도록 응용하고, 그러니까 몇 번이고 곱씹고 다시 떠올리고 다시 느끼고 싶은 붓자국은, 그러한 ‘생의 한 때’를 떠올린다. 권재나의 회화 또는 세상의 수많은 회화 작업 화면의 붓자국들은 다 저마다의 의미와 역할이 있겠지만, 이토록 아름답거나 적어도 나에게 중요하거나 나의 마음에 드는, 그런 것은 쉽게 만들어지지 않는다. 행운이든 숙련된 기술이든 무언가가 아주 잘 맞아떨어진다 해도 아주 가끔씩만 일어나는 일이다. 그리고 이런 일 순간 기억들로 사람과 삶이 유지된다. 많은 순간을 견딜 수 있게 된다.
JK: 동의한다. 너무 아름다운 인생의 때가 의식하지도 못하고 쉽게 지나가는 경우도 너무나 많다. 예를 들어 젊음처럼. 근데 그런 아름다운 순간이 쉽게 만들어지지 않는다는 것은 그것이 지나간 다음이나 혹은 그런 것들이 부재할 때 깨닫게 되는 것 같다. 쉽게 얻어지거나 결핍이 없는 상황에서는 잘 모르기 때문에, 비교나 경험을 하기 위해 더 힘든 사람이나 상황에 조언을 하기도 하고 봉사를 하기도 하고 여행을 하기도 하는 것 같다. 내 인생으로 한 편의 연극무대를 쓴다면, 아름다웠던 생의 한때를 끊임없이 되새기는 기회가 있을 것 같지 않나? 우리 엄마는 젊었을 때 사진을 계속 들여다보면서 현재는 사진을 찍지 않는다. 지금이 남은 삶에서 가장 젊었을 때인데. 그러다가 이제는 나도 딸인 나도 잘 안 쳐다보고 나의 20대 때 사진을 본다. 아름다운 생의 한때라는 것은 물론 내가 생각하기 나름이지만, 꼭 특정성을 띄는 것은 아닌 것 같다. 어느 선에선 쿨하게 현실을 인정하고 현재를 즐기는 태도로 그 자체를 아름다운 생의 한때로 만들어 버릴 수도 있다. 엄마가 예쁘게 화장하고 한복을 곱게 차려입고 내 결혼식에 왔던 모습도 좋지만 손녀와 함께 같이 낮잠 자는 모습도 그에 못하지 않으므로 몰래 사진 찍는 것. 시시한 붓자국도 맥락에 따라 신선할 수 있기에 주인공으로 만들어 보려는 것.
폴드fold와 확장에 대하여
HS: 권재나의 작업에서는 하나의 시점time에서 공간을 파악할 수 있고, 한 공간에서 시간의 흐름이 잘 느껴진다. 공간이 언급되는 만큼 시간이 중요한 개념이라고 생각한다. 공간의 정체, 공간이 연결된 실체는 연속된 시간의 흐름 속에서만 파악될 수 있기 때문이다. 어느 건물 내부의 부분들을 찍은 여러 장의 사진과 건물 내부를 이용하며 연속해서 찍은 동영상을 비교해 보라.
JK: 폴드의 개념은 종이를 접는 데에서 출발하였다. 팝업 오브젝트를 2009년부터 만들기 시작했는데 종이를 접었다 펼쳤다 하는 구조가 회화를 떠올리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한 장의 종이를 회화의 평면에 비유했다. 폴드란 접혀있어도 펴진 상태의 가능성을 내포하며 회화의 물리적 한계와 정신적 확장을 동시에 이야기하는 개념이다.
HS: 폴드를 편다는 것은 압축되었던 시간을 펴는 것과 같다. 어느 한 시점에서의 흔적을 집중하여, 확대하고 자세히 살피는 느낌이 있는데 그 과거의 흔적이 의식적인 것인지 무의식적인 또는 잊혀진 것인지에도 차이가 있을 것 같다.
JK: 폴드의 방법을 이용하여 붓자국이 흔적으로 남겨지는 그 순간을 집중해서 확대하여 살폈다. 붓자국을 선택하고, 종이에 드로잉하고, 다시 입체성을 지닌 종이 모델로 만들어보았다. 이 과정은 머릿속에서 무의식으로 잊혀진 것들을, 몸에 새겨진 기억을 이용하여 시각적 형상으로 다시 한번 기억해내는 행위라고 생각했다. 의식적인 것의 지루함과 한계를 무의식의 영역에서 소재로 찾아오려는 시도라고 볼 수 있겠는데, 이러한 과정을 통해 스스로에게 자극이 되는 함과 시각적인 자극을 유지하려는 목적이 있었다.
HS: 붓자국은 의식적으로 만들어졌지만 잊혀져서 무의식적인 것이 되었다가 그것들을 다시 한번 기억해낸다는 뜻인가? ‘몸에 새겨진 기억을 이용하여’는 어떤 뜻인가?
JK: 모호한 형태, 덩어리, 흐려지며 잊혀지는 것들, 시각기억의 파편적인 것들이 무의식적인 것들이라고 (혹은 의식에서 무의식의 상태로 향해가는 것들이라고) 보았다. 붓자국은 이런 무의식적인 기억들을 불러오는 것 같다. 몸에 새겨진 기억이란 시각으로 기억된 것 외의 그 당시 기억 중 몸으로 느끼거나 몸을 움직였던 기억을 말한다. 예를 들어 자전거를 탄 경험을 사진을 찍어놨으면 ‘자전거를 타는 나와 배경’으로 그 사건을 시각적으로 기억할 수 있지만 ‘자전거 위에서 덜컹거리는 감각, 피부에 바람을 스치며 지나가는 속도감’을 기억할 수 있는 것처럼 말이다.
표현하려고 하는 바 중에 명확하게 기억되는 것들도 있고(의식적으로 만들어지는 붓자국) 무의식적인(모호한 형태, 느낌, 파편적)것을 몸에 맡겨서 만드는 것도 있다. 무엇을 그리냐면 시각기억/사건 당시의 느낌을 그리거나 몸으로 표현해본다고 볼 수 있겠다. 예를 들어 봄날의 기분이 좋아 봄날의 왈츠를 작곡하는 것처럼 말이다. 왈츠는 봄의 어떠한 것과 일대일 대응하지는 않지만 분위기를 전달할 수 있다. 그러나 봄날이라는 것을 알지 않고 왈츠만 듣는다면 바로 봄날이다 이렇게 추측이 힘든 것처럼 추상 캔버스도 그런 것 같다. 근데 그 감상을 그냥 허밍으로 불러버리고 지나가면 그 감상 자체가 힘들어지므로 왈츠라는 어떤 형식을 지니는 것이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 캔버스라는 물질로서 구체화시키는 것이 의미가 있는 것은 나 스스로도 명확한 감상이 가능하고 그렇지 않으면 타인이 감상할 수 없으므로 표현적 의미가 있다고 본다.
HS: 폴드는 주름이다. 공간도 시간도 접었다가 필요할 때에 펼쳐서 쓰는 상상은 본능적인 것이 아닌가? 순간이동처럼 말이다.
JK: 폴드는 공간과 신체에 대한 제약을 극복하는 상상이다. 한계를 넘어서는 자유의 추구, 정신적 해방이란 면에서 볼 때 이러한 상상은 그 자체의 의미를 지니는 듯하다. 하지만 운동 속도에 따라 각자 시간과 공간을 상대적으로 느낀다는 상대성 이론을 보면 시간과 공간의 왜곡, 휘어짐은 어느 정도로는 실제로 일어나는 일인 것 같다. 타임머신을 타고 남들보다 더 길게 살거나 적게 살거나 하는 상상을 하지만, 내가 느끼는 수명은 일정한 것처럼, 기준을 어디에 두는가에 따라 시공간의 개념은 변칙적일 수 있다고 생각한다. 회화도 물질과 공간의 제약 가운데 존재하지만 그것을 벗어나고자 하는 상상이다.
HS: 폴드에서 접혀진 공간만큼 시간도 접혀 들어가 있고 레이어로 쌓여있다고 느꼈다. 회화 또한 시간 신체 움직임이나 제스처가 모인 것이다. 그 흔적이 남은 것, 그 배경, 공간. 이전 작품과 연관하여 봤을 때 콜라주적인 요소들도 포함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중력, 인간의 몸, 몸의 취약함은 모두 인간의 한계다. 하지만 인간이 인간 외의 다른 존재를 생각하지 않는다면 (새, 강철 사이보그나 순간이동 초능력자, 신 등등) 딱히 한계일 것도 없다. 그냥 인간의 조건 자체다. 중력과 취약함, 몸이 권재나의 작업에 중요한 내용인 것 같다. 한편 인간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는지 궁금하다.
JK: 작업 내 콜라주의 방식은 아직도 유효한 것 같다. 시각기억/사건 당시의 느낌을 불러와서 일상에서 본 이미지들을 소재로, 이 소재들을 편집하고 재해석해서 새로운 콜라주를 만든다. 그 결과로서의 작품을 스스로 확인해보기 위해서 그린다. 무엇을 그리는가의 무엇은 결과이다. 그리는 행위도 과정도 아니고 과정과 변화할 있는 모든 가능성을 제거한 표현으로서의 완결된 ‘결과’를 그린다.
인간은 나약하고 고달프기에 삶의 부분을 공유하고 나누어서 아무렇지 않게 살아가야 하는 존재라고 생각한다. 예술이 그런 역할을 할 수 있기를 바란다.
HS: 회화가 가장 잘, 많이, 효율적으로 ‘폴드될’ 수 있는 공간인 것 같다. 붓질을 통해 물감들이 면을 만드는데, 어떠한 재료보다도 유연하고 얇게, 그래서 많이 접힐 수 있게 쌓이기 때문이다. 회화 화면이 압축적인 공간인 것 같다.
JK: 그래서 시공간의 감각을 효과적으로 잘 전달할 수 있는 매체이다. 그러나 동시에 함축적이므로 해석의 여지가 다양해질 수 있고, 그를 분석해내는 감각 또한 중요하다고 본다.
지지체support 문제와 존재의 이유
HS: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다고 말한 지지체support 문제는 무엇인가?
JK: 내가 생각하는 지지체의 문제는 회화에서 ‘환영’과 물감 이외의 ‘물질’을 어떻게 다루는 것인지에 관한 스스로의 입장 문제이다. 예를 들어, 회화는 환영이 퇴출된 평면이라는 그린버그식의 명제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면 잭슨 폴록의 그림이 이해되지 않나. 그렇지만 바닥에 깔고 제작된 폴록의 천을 다시 나무로 된 지지체에 동여매는 행위(또한 바닥에서 제작된 작품을 벽에 걸며 90도 회전시키는 행위)는 단지 관람의 편의를 위한 것인지 혹은 기존 형식을 답습하는 것인지 궁금했다. 물감 이외의 물질이 그림이라는 형식을 유지하기 위해 존재한다면 ‘공간 점유를 위해 어쨌든 필요하니까 기존의 형식을 답습하는 것’ 외의 이유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캔버스의 옆면이 거슬리게 된 이유이자 아예 오브젝트의 형식을 띈 미니멀리즘에 공감했던 부분이었다. 처음 셰이프드 캔버스를 만들어 본 이유도 정면과 옆면이 존재하지 않는 연속된 평면을 만들어보기 위한 시도였다. 요약하자면, 내가 생각한 지지체의 문제는 지지체 존재의 이유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 존재가 내용과 형식에 있어 잘 어우러지는 방향으로 고려가 되거나 혹은 기존의 형식 자체로 존재하는 이유에 대해 정당하게 설명하는 방식이 되어야 한다고 본다.
HS: 그림이 ‘벽’에 걸리는 것은 동굴벽화 때부터의 감각일까? 인간이 직립보행을 하기 때문에 그 시선에 맞춰 땅과 수직하게 된 것인가. 좀 더 구부정하던 시절에 인간은 땅에 그림을 그렸을까. 직립하기 전에는 손이 자유롭지 못해서 그림을 그리지 못했을까? 캔버스의 옆면에 거슬리게 된 이유에 공감한다. 그러면 캔버스의 뒷면은 어떻게 생각하는지 궁금하다. 권재나의 셰이프드 캔버스의 뒷면, 벽에 걸리는 면은 어떻게 처리되어 있는가? 그 부분에도 색이 칠해지는가? 여전히 벽에 걸리기는 해야 하는가? 왜? 조각과 다른 점이 무엇인가? 사실 관념적인 면이 아닌 실제적인 모든 면은 3차원이라는 사실을 보여주고 싶은 건가?
JK: 벽이라는 것은 본격적으로 공간 점유를 시작하면서 발달했다고 본다. 벽에 걸린 ‘평면’의 작업을 바닥과 수직이 되는 ‘직립보행’ 자세를 취하고 있는 관객이 머리에 위치한 눈으로 관람한다면 그 수직과 똑같은 각도를 유지하는 것이 보다 많은 정보를 대체적으로 ‘한 번에’ 관찰할 수 있는 각도가 아닐까? 시각은 생존을 위해서 발달되어 왔지만 시각의 둔함이 생존의 여부를 당장 결정할 만큼 중요한 요소는 더 이상 아니게 되었고, 일상, 취향을 위한 선택 등의 즐거움을 위한 목적이 더 크게 작용하고 있는 것 같다. 바닥에 놓여진 그림은 왜곡으로 나에게서 가까운 쪽의 정보를 먼 쪽보다 덜 받아들이게 된다. 그러나 벽에 있는 그림은, 적어도 내가 서있을 때에는 스스로 움직일 수 있는 능력이 있으므로 화면의 거리를 조정할 수도 있고(좌우로 움직인다던가, 사이즈가 작으면 다가가서 보고, 사이즈가 크면 멀리서 본다. 화면의 모든 부분을 비슷한 거리에서 균등하게 보고, 또 크고 작게 볼 수 있는 조건을 형성하게 된다. 그림을 사람의 평균 키의 높이에 맞춰 전시하는 이유도, 눈높이의 평균이 고려된 사항이 아닌가. 사실 네모난 평면의 그림이라는 것은 그림을 ‘창문’이라고 보던 시대에 지구도 평평하고 세계도 평평했던 그런 개념에서 나온 형식이 아닌가? 유선형의 스크린 같은 디자인이 망막에 상이 맺히는 것 등의 시지각의 방식과 인체공학적으로 보다 적합하게 디자인되는 형식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평면의 형식도 ‘대체적으로’ 효율적인 그런 부분은 아직도 존재하는 것 같다.
캔버스의 뒷면은 영원히 이어지는 2차원의 평면이란 물질세계에선 존재할 수 없다는 (3차원의 조각이 아닌 이상) 한계를 보여주는 것 같다. 개념의 자유로움과 물질이 현실적으로 적용될 때의 한계같은 것 말이다. 뒷면은 개념상 눈에서 사라짐으로써 없는 것과 같이 취급되는데, 현실적으로는 작품이 공간에 위치하기 위한 걸림 장치가 뒷면에 붙어있고, 벽과 유사한 재료로 칠해져 색의 이염이나, 벽에서 오는 습기 등의 문제를 차단할 수 있게 만들었으나 이러한 것들이 보이진 않는다. 꼭 벽에 걸리지 않아도 되지만 대체적으로 효율적인 방법은 벽에 거는 것이고 공간의 중간에 위치하는 방법도 생각중이다. 뒷면을 지키는 문제가 중요하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HS: 위의 질문들은 셰이프드 캔버스와 캔버스 위의 붓자국 그러니까 회화 과정 자체와 관련된 문제였던 것 같다. ‘하나의 붓자국’도 다른 붓자국들과도 깊이,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음으로 의식적/무의식적 상태로 간단히 나눠지지 않는다고 느껴진다. 다른 붓자국에 의해 일부가 가려진 붓자국도 선택하기도 하는가? 붓자국 오브제 만들기 시작한 이유를 듣고 싶다.
JK: 일부가 가려진 붓자국은 선택하지 않는다. 붓자국 오브제(셰이프드 캔버스)를 처음 만들기 시작한 이유는 회화에 대한 부담감에서 나온 게 맞는 것 같다. 회의감보다는 희망을 찾고자 하는 열망에 가까운 무엇인가 새로운 나만의 형식을 얹거나 찾아야 하겠다는 부담감도 있었다. 새로운 것을 발견하려는 시도로 참여형 미술이나 공공미술로 확장을 해보았지만, 캔버스 형식 평면에 대한 매력과 관심은 그대로 있었다. 회화가 어떤 역할을 해줄 수 있다는 믿음은 여전하다. 지금은 붓질이 많이 있는 캔버스 회화 작업을 붓자국 오브젝트들이 모인 극장의 세트 정도로 생각하고 있다. 극장의 세트라는 생각은 연극성 개념에서 나온 것으로 사실 연극의 세트는 부조 같은 느낌이기도 하고 회화 같은 느낌이기도 하다. 그런 몰입 경험과 상호작용적인 특징을 가져오고 싶다.
HS: 캔버스는 붓자국이 모이고 중첩되는 공간. 오브제는 하나의 붓자국의 독사진, 즉 거시와 미시의 접근법처럼 보인다. 혹은 전체와 개별자의 문제로도 연결시킬 수 있을 것 같다. 다만 주인공과 단역과 같은 위계가 있는 화면은 아니다. 권재나의 회화는 추상적 특성이 강하다. 예를 들어 정물화에서 과일은 중요하고, 그다음으로 그릇이 중요하고, 그다음으로 식탁보가 중요하고, 그다음으로 벽지와 배경이고. 이런 식으로 위계가 있지 않다. 크든 작든 모든 붓질이 동등하게 화면을 차지하고 구성하고 있다. 그래서 폴드 개념이 중요하게 느껴진다. 쭉 그어진, 접힌 곳, 구김 없는 붓자국은 오브제로서 선택될 수 없나? 자꾸 붓자국들을 하나의 무대 위의 인물처럼 생각하게 되는데, 혹시 폴드는 시련, 곡절, 사연 같은 것으로 비유해도 무방한가?
JK: 쭉 그어진 붓자국, 레이어가 없는 단면의 셰이프드 페인팅도 있다. 초창기 작업이 그러하다. 그렇지만 완벽한 직선의 붓자국이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폴드는 시련, 곡절, 사연보다 자의에 의해 압축되어 있는 상태라고 보는 것이 더 맞다. 넓은 공간에서 다리를 쭉 벌리고 앉아있을 수 있지만 자의로 다리를 꼬고 좁게 앉아있는 것처럼 말이다.
HS: 식물 잎 모양을 분류하듯 지금까지 선택된 붓자국을 카테고라이징해보는 것도 재밌을 것 같다.
JK: 앞서 얘기했다시피, 오브젝트 작업은 붓자국의 모양에서 따온 것이다. 먼저 기다란 종이띠를 만들고 붓자국의 모양을 관찰하여 붓자국이 꺾인 모양과 유사하게 이 종이띠를 접음으로써 종이 모델을 만들고, 이를 다시 드로잉으로 정리하거나 세분화하는 과정을 거치면서 형태를 결정한다. 붓자국의 모양을 눈으로 좇으면서 종이를 찢어 붓자국의 꺾임, 구부러짐, 갈라짐 등을 표현해보기도 한다. 모델과 드로잉 단계를 거치고, 물감-종이-나무로 재료와 크기가 바뀌면서 기존의 형태와 일대일 대응 관계를 벗어나게 되므로 직접적인 재현의 과정이라고 보긴 어렵다. 카테고라이징 관련해서는 오브젝트 작업을 기준으로 원폴드, 투폴드, 쓰리폴드 정도까지는 생각하고 진행했었다. 이름도 그와 연관해서 짓곤 했다. 그런데 4번 이상 접힌 이후부터는 굳이 의미를 두지 않았다. 앞으로 진행되는 형태, 뒤로 접혀가는 형태 등의 전진과 후퇴로 구분할 수도 있고, 시작점과 끝점이 명확한 상태와 숨겨진 상태 (연결된 띠의 형식으로)로 구분하여 접근하기도 했다. 접히거나 꺾인 지점이 명확한 붓자국이 있고, 어떤 식으로 접혔는지 명확하지 않으나 뒤섞여 뭉쳐져버린 붓자국 오브젝트들도 있다.
HS: 회화에서 원근법은 앞뒤, 크고 작음을 나타내는 투시 원근법도 있고, 공기 원근법도 있는데 오브제의 투명도나 채도(재료 자체의 채도)를 다르게 하는 방법도 생각해 보았는지?
JK: 잘 보이지는 않지만 물감의 투명도를 이용해서 유사한 시도를 해보았다. 물감을 12-20겹정도 칠해서 깊이를 나타내는 방법을 사용해 본 것인데 그것이 어떤 효과로서 잘 보이지는 않는 것 같다. 아마 단색의 홑겹으로 칠해진 작품이 바로 옆에 있으면 좀 더 비교가 될 수도 있겠다. 최근에는 평균 10겹정도는 들어가는 것 같다. 오브제 자체의 투명도를 다르게 하려는 시도는 레진, 아크릴 등을 사용하여 구상중이다.
HS: 회화 전체를 공간 전체로 즉 회화의 모든 붓질을 오브제로 만들고 회화에서 그들이 차지했던 위치에 배치, 그 사이는 투명한 건축물, 계단 등으로 채워 관객이 그 사이를 걸어다니는 방식으로 구현하는 것도 가능할지? VR로 했던 것을 물리적으로 구현하는 것 말이다.
JK: 해보고 싶었던 시도이다. VR은 장소와 상황이 받쳐주면 진행할 수 있도록 스케치를 하는 것과 같았다. 오브젝트의 투명도를 해결하고 재료적 구현의 방법을 구체화해서 미리 준비를 해놓을 계획이다. 보다 빠른 실행의 시기가 왔으면 좋겠다.
투명해진 사각형과 해방된 평면
HS: 셰이프드 캔버스는 사각형을 벗어난 데에 큰 의미가 있다. 벗어났든, 깨뜨렸든간에. 사각형은 효율적이며 작품의 제작 측면에서도 훨씬 쉽게 주어지는 형태이다. 사각형과 원 등은 오랜 시간 동안 인간에게 상징적으로 쓰인 형태다. 자신이 벗어난 ‘사각’ 캔버스의 사각형에 대해 생각해 보면 좋겠다. 그리고 사각형도 형태shape인데 거기서 벗어난 것을 형태지어졌다shaped고 부른다는 것은, 사각형이 너무나 기본적으로 쓰여서 형태의 성격을 잃었다는 뜻이다. 사각형은 아예 투명해져버렸다. 사각형을 잃거나 벗어날 때 캔버스는 자신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권재나가 셰이프드 캔버스에 붓질이나 선, 색, 면을 이용해 무언가를 그리기보다는 단일한 색으로 전체를 덮은 것도 캔버스가 ‘투명성을 잃은’점과 관계가 깊어 보인다. 셰이프드 캔버스에 2011년작
<
돌고래
>
와 같은
‘
그림
’
을 그렸다고 생각해보면 차이가 느껴질 것이다
.
이 상상 속에서
<
돌고래
>
작품은 무척 환영적이거나 재현적으로
,
거의 무언가를 구체적으로 그린 구상 작품처럼까지 느껴진다
.
단색의 셰이프드 캔버스는 그만큼 그 자체로서 오브제가 된 느낌이 강하다. 하지만 벽에 붙어 있으면 오브제의 느낌이 덜하다. 그런데 아예 모든 면이 다 보인다면 조각 작품과 비슷해진다. 평면에서 얻고 싶은 게 있어서 셰이프드 캔버스의 형식을 택한 게 아닐까? 그것은 폴드와 연관이 있다고 생각한다. ‘접혀졌던 것이 펴졌다’는 점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접혀졌던, 주름졌던, 압축되었던 시공간의 일부를 재발견 재조명 확대 재해석한다는 의미가 있다. 이러한 점에서 팝업이나 VR이 아닌 캔버스 형식이 더 적절한 이유가 된다. 평면에서 얻고 싶은 것이 무엇인가? 회화 작업은 사각의 캔버스에 하고 있나? 그렇다면 그 이유는?
JK: 평면에서 얻고 싶은 것은 압축된 것을 확장하는 확장된 감각이다. 물질과 평면이라는 어떠한 종류의 프레임 안에서 해방된, 정신적 자유.
HS: 작가를 통해 온전히 분해된 후 재구성되는 세계를 원하는 것 같다.
JK: 회화적 공간을 확장된 감각으로 재구성될 수 있는 세계로 파악하고 있다. 그 공간을 내가 어떻게 느끼고 의식하고 있는가를 다룬다.
HS: 사각의 투명성을 이용하는 것인가? 사각형의 재료를 선호하는 것은 효율성이나 남는 부분을 최소화해서 재료를 최대한으로 쓰는 데에 도움이 된다. 비용도 절감이 되고 공간 활용 측면과 제작 자체에 있어서도 용이하다. 사각형 캔버스는 창문의 느낌을 주기도 한다(창밖의 다른 공간으로 이어지는 듯한 느낌). 창문은 왜 사각형이 많은가. 둥근 창문이 더 만들기 어려울 것 같다.
미니멀리즘은 ‘이 작품을 전체가 균질하고 순정한 똑같은 색인 정육면체라고 보기로 하자’는 암묵적인 제안을 한다. 추상표현주의도 마찬가지로 ‘이 작품을 완전히 평면이라고 보기로 하자’는 암묵적인 합의가 필요하다. 권재나의 작품은 이러한 암묵적인 전제를 없애는 점이 특징이다. ‘이것은 이것이다’라고 집중해서 보여주려는 느낌이다. 눌린 듯한 자국이나 둥글려진 엣지 등 인체공학적인 피부 같은 표현은 마치 도날드 저드의 작품에 손때가 묻은 듯한 느낌이다. 물질은 정신/개념/ism/주의가 아니고 물질이다. 또는 몸은 마음이 아니고 몸이다 와 같은 메시지를 보낸다. 당신은 거기가 아니고 여기 있어요. 당신은 그때가 아니라 지금을 살아요. 등등. 다른 무엇을 찾지 말고 바로 이것을 느껴주세요.
JK: 이렇게 보기로 하자라는 암묵적인 동의 부분과 디폴트의 투명성 이 부분은 같은 지점을 건드리는 듯하다. 사각형과 직선이라는 것은 산업시대의 생산물인 것 같다. 누군가가 정해놓은 규범을 단지 편리해서 따르기 싫었다. 셰이프드 캔버스를 만들 당시에는 사각형이거나 직선이라면 최단거리라거나 어떠한 이유가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수학적으로 계산된 곡선은 개념이 형식이랑 일치되며 형성되는 아름다움이 있는 것처럼 말이다.
HS: 사각형이 너무나 디폴트로 느껴져서 아예 의식조차 안 하게 되고, 다른 형태를 봐도 '사각형에서 주변을 잘라내서 만든' 것 같은 느낌조차 받게 된다. 대부분의 재료가 '내가 가공하기 전' 상태일 때 사각형으로 와서 그런 것 같다.
JK: 동의한다. 물감도 안료와 미디엄을 섞어서 만드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물감도 튜브 이전에는 각 작가의 작업실마다 독특한 레시피로 만들어 썼었다. 이와 같이 물감도 제작해서 쓰면 원하는 바를 정확히 표현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HS: ‘그렇게 만들어져 나온 물감을 편리하기 때문에 그냥 쓰기’보다는 내가 원하는 바로 그 색을 만들고 싶다는, 필연성에 대한 추구가 있어 보인다. 어떤 작가가 떠올린 바로 그 색이 이미 만들어진 튜브 물감에 똑같은 색으로 있기는 어려울까?
JK: 떠올린 색이라는 것은 애매모호한 것이므로 똑같은 색으로 있기는 힘들 것이다. 인간의 머리가 떠올릴 수 있는 색의 뉘앙스보다 눈이 판별할 수 있는 색의 종류가 독보적으로 많다. 인간의 눈은 각기 100개의 다른 색상을 감별할 수 있는 세 가지 각기 다른 타입의 원추세포를 지니고 있어 대략 백만 개의 색을 구별할 수 있기 때문이다.
HS: 지지체가 있다면 지지체가 있는 이유가 있어야 한다는 문제와도 통한다. 어떤 행위를 하거나 무엇을 만들려고 한다면 그 행위나 목적에 가장 적합하도록 해야지, 편하니까, 그렇게들 해왔으니까, 쉬우니까 그렇게 하면 안 된다는 생각이 보인다. 그토록 반드시 이 모양, 이 색으로, 이 재료로 구현하고 싶은 이미지가 마음속 또는 머릿속에 있는지 궁금하다.
JK: 반드시의 모양은 머릿속에 존재하지 않고 과정을 통해 결정된다. 머릿속으로 어떤 이미지를 상상하는 능력은 눈으로 기존의 이미지를 판별하고 조합하는 능력보다 한참 떨어지기 때문이다. 앞서 말했던 색을 상상하고 그것에 꼭 맞는 물감을 찾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말했던 것과 비슷하다. 눈은 일반적으로 백만 가지의 색을 구별할 수 있다고 하는데, 머릿속에 있는 색의 범주는 수천 정도면 예리한 사람이라고 볼 수 있을 것 같고, 평범한 사람들은 언어로서 표현 가능한 수십 가지 정도의 색의 범주만 가지고 살아갈 것 같다. 머릿속에 있는 구체적 이미지는 사실 구체적이라고 믿는 모호한 이미지일 것이다. 예를 들어, 하나의 사진을 완벽하게 머리에서 상상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아무리 뛰어난 화가라도 사진을 5분간 응시하다가 그 사진을 치워버리고 그 사진을 100% 재현할 수 없지 않나.
색을 고를 때에도 마찬가지이다. 예를 들면 나는 푸른빛이 도는 빨강이라는 큰 범주를 가지고 접근하여, 그 상황에서 구할 수 있는 모든 종류의 안료나 물감을 모으고, 그중 내 머릿속 추상적 뉘앙스와 가장 잘 맞을 것 같은 상품을 선택하고, 그리고 그것들끼리 섞거나 용매를 더해서 가장 미묘한 단계까지 뉘앙스를 맞춘다. 최종 단계에 가야만 내가 처음에 생각했던 추상적 색 뉘앙스의 끝이 이것이었구나 하는 생각을 할 수 있다. 나는 빨강을 그린 것이 아니라 푸른빛을 도는 빨강이라는 뉘앙스를 가지고 시작해서 투명성이 가장 높은 빨강의 안료를 택하고 물이냐 기름이냐 각기 다양한 용매의 성질을 더해봄으로써의 결과가 노란빛이 나지는 않는지, 빨강이 뉘앙스로 가진 푸른빛이 나뉘어져 초록 계열인지 보라 계열의 뉘앙스인지 확인 후 선택을 하고, 두께와 적용의 방법을 다양하게 해서 표현된 최종 상태를 원하는 것이다. 그래서 이를 빨강이라고 말할 수 없는 것 같다. 따라서 이 모양, 이색, 이 재료를 사용해야겠다는 결정은 한순간에 결정되는 것이 아니다. 과정을 통하여 완성의 단계로 나아갈수록 다양하게 느껴지는 변수들의 가능성을 최대한도로 없앤 후에야 그 추상적인 뉘앙스가 무엇이었는지 스스로 알게 되는 것이다. 그 중간중간의 선택이 결과에 효과적으로 적용되면 이러면 어떨까? 저러면 어땠을까 하는 질문을 하지 않게 된다. 무엇을 그리는가? 기억이나 행위에서 뽑아 나온 모호한 형태, 덩어리, 흐려지며 잊혀지는 것들, 파편적인 인상, 뉘앙스가 선택의 단계와 물감을 이용하여 분명해지는 결과를 그린다.
HS: 사각 캔버스의 투명성이 중요하고 자유를 준다. 근데 본질적인 것에 대한 추구와 어떤 수학적인 간결성과 아름다움에 대한 고집 때문에 지지체 문제가 너무 신경 쓰여서 붓자국 셰이프드 캔버스 같은 작업을 하게 된 것 같다. 붓자국을 기리는 의미가 있어서 개인적으로 멋지다고 생각하는데 사각 캔버스가 주는 만큼의 자유를 본인에게 그리고 보는 사람에게도 주기는 어려운 것 같다.
JK: 그래서 캔버스 작업을 하게 되는 것 같다. 셰이프드 캔버스는 단색, 형태, 붓자국, 레이어, 확장, 폴드 등으로 연구의 주제가 타이트하다. 그 타이트한 범위는 그렇기 때문에 효율적이고 아름답지만.
HS: 하나의 작품으로서 그리고 상품으로서도 매력적이다. 작품세계에서 일관성만큼이나 변주나 다양성도 중요하기 때문에, 평면에 대한 사랑을 기본으로 셰이프드 캔버스나 이를 앞뒤로 붙인, 또는 변형한 공공미술도 해나가도 당연히 좋다고 생각한다.
되돌아온 캔버스 형식
HS:
다시 사각형 캔버스 작업도 같이 하고 있다
.
팝업과
VR
에서 어떤 한계가 있었나
?
접혀 있거나 펴져
/
확대되어 있는
‘
붓질 오브제
’
또는
‘
레이어
’
를
,
물성을 느끼고 움직임을 유도하는 방식으로 가장 잘 보여주는 최선의 시점이나 상태가 있는 것인가
?
JK: 2010-2012년 경에는 종이 엔지니어링의 기법을 활용하여 팝업 카드, 팝업북의 형태를 지닌 팝업 작업을 했었다. 추상으로 만들어진 확장된 형태의 팝업 조각을 만들었다. 펼쳐졌다 접혀질 수 있는 레이어가 회화의 개념을 잘 보여줄 수 있는 작업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회화와의 차이점은, 팝업 작업은 매 레이어들끼리 접혀지며 붙어있는 접점이 있다는 것이었다. 종이가 접혀지며 연결되어있는 지점을 폴드라고 보기 시작했다. 폴드 하나의 평면이 접혀짐으로서 입체가 될 수 있게끔 만드는 역할을 했다. 팝업 작업의 한계는 각 레이어들이 폴드되는 바로 그 지점을 어떻게 다룰 것인지에 관한 것이었다. 종이에서는 쉽게 성립하는 구조들이 나무나 알루미늄 등으로 크기와 무게가 확장되었을 때는 성립하기가 어려웠다. 종이가 가진 강도와 유연함이 없으므로 다른 방식으로 해석되어야 했다. 각 면들이 경첩으로 연결되는 점들이 거슬렸고, 경첩 자체를 면의 일부로 제작하거나(리쟈 클락Lygia Clack의 알루미늄 조각처럼) 숨기려는 시도를 해보기도 하였으나 각 레이어들의 두께와 형식적 조화를 이루지 못했다. 또한 팝업으로 움직임이 성립하기 위한 구조라는 것이 정해져 있어서(대칭성과 각도)그 법칙에서 레이어의 형성이 자유롭지 못하다는 것도 한계로 느껴졌다. 팝업은 접혀 있거나 펴져 있는 ‘붓질 오브제’나 ‘레이어’를 움직임을 유도하는 방식으로 보여주는 것에 있어서 형식적 아이디어로서는 적합했으나, 물질적 구현의 방법에 있어서 대칭성, 각도 등 종이 엔지니어링 방법이 가져야만 하는 특징의 한계에 부딪혔다.
VR에서는 착시 효과로 인해 공간감을 느껴보거나 간접 경험을 해볼 수 있다는 점은 장점으로 느껴졌다. 그러나 시각적 착시를 이용하는 것이기 때문에 몸으로 이동을 장려한 경험을 제공하기에는 제약이 있다는 점이 한계로 느껴졌다. 또한 현실에서는 물질성과 중력의 문제가 중요한데, 이러한 점들이 디지털 공간에서는 작용하지 않아 이러한 부분을 구체적으로 연구하기 어려웠다. 구성과 스케치의 방법으로는 재미있었으나 몸과 물질성에 관한 관심이 당장 있었던 상황에서 어떤 답을 얻지는 못했다. 대신에 가상성이라던가 스크린과 눈의 관계라던가 다른 문제들이 연관이 되었다.
HS: 권재나가 하는 장소 특정적 공공 작업이나 VR은 관객에게 추상을 쉽고 가깝게 소개하는 면도 있지만 관객의 움직임을 제시하고 동선을 정리하며 더 아름답다고 생각하는 방향으로 유도하는 면이 있는가? 일부 공간을 장악하려는 욕구가 존재하는 것처럼 보인다.
JK: 다양한 각도와 거리를 이용하여 시각적 정보를 받아들이는 관객의 효율적인 동선의 라인이 있긴 있다고 생각한다. 이 작품이 무엇인지, 어떤 방식으로 만들어졌는지, 부분과 전체, 정면과 측면에서 어떤 정보들을 포함하고 있는지 이해를 하고 그 이상의 감상을 위해 본능적으로 움직이는 것 말이다. 작품과 연계하는 관객의 움직임은 어떤 본능적인 춤과도 같고 그래서 아름다울 수도 있는 요소라고 생각한다.
HS: 캔버스는 붓들이 늘어선 무대가 되고, 전시장은 캔버스들이 늘어선 무대가 된다. 사람들은 붓질에, 캔버스는 공간에 대응될 수 있는가?
JK: 그렇다. 캔버스에서의 연극성을 중요하게 생각하고, 캔버스를 연극의 무대처럼 다룬다. 무대의 공간에서 배우의 퍼포먼스처럼 붓자국을 움직이고 싶다. 그리는 순간에는 내가 배우가 되고, 관객이 붓자국을 관람하여 돌아다닐 때에는 관객이 배우가 될 수 있는 배경이 캔버스였으면 한다. 또한 영화가 아닌 연극을 보러 가는 것처럼 이미지(영화)가 아닌 실제의 움직임을 목격하여, 생생한 숨소리를 듣고 싶은 그런 욕구가 캔버스에 존재한다. 무대에만 조명이 밝혀진 어두운 극장에 들어가며 어떤 의도된 공간적 단절과 퍼포먼스 자체의 집중에 참여할 의지를 보이는 것처럼 캔버스도 긍정적인 의미에서의 차단된 새로운 경험으로, 좋은 공연을 보는 것에서 나오는 그런 카타르시스와도 유사한 경험을 유도하고 싶다.
HS: 투명성을 띈 사각 캔버스의 사각이 이런 역할을 한다. 다른 외부적 감각을 차단하고, 별세계로 자연스럽고 이물감 없이 이동하게 한다. 붓자국 각각이 연극의 주인공이라면 미시적인 것들이 모인 거시적 세계처럼 느껴지지만, 그게 아니라 권재나의 퍼포먼스의 흔적이라면 나중에 선택되어 오브제로 만들어지는 붓자국은 주인공이나 특별한 존재가 아니라 한 삶과 사람의 어떤 특별한 순간 또는 우연히 행운적으로 얻어진 매우 흡족하고 행복한 순간의 기록 같다.
회화에 관하여
HS: 작업의 색채가 대체로 밝으며 시각적으로 균형잡혀 있고 리듬감이 있고 즐겁게 느껴진다.
JK: 난해한 시각정보(추상)나 그 단위(붓자국)을 이용하여 유동성, 속도감, 명확성, 호쾌함, 상쾌함, 떠있는, 빠른, 예측하기 힘든 어떤 결과를 만들어내려 하였다. 이는 물감이 내포할 수 있는 여러 가지 상태인데, 인간의 어떤 밝고 긍정적인 감정과도 연결이 된다. 예를 들어 물질을 다룰 때 시간을 어떻게 사용하는지, 둔하게 빠르게 흐르는대로 급하게 이런 부분을 조절해 나가면 유동성, 호쾌함, 무겁거나 가벼운 느낌을 줄 수 있다. 예측 가능한 패턴은 시각적 자극 또한 패턴이 되어 금방 지루한 느낌을 줄 수 있다. 이를 피해서 큰 붓질, 작은 붓질, 패턴이 없는 다양한 예측 불가능한 붓자국을 사용하면 붕 뜬, 신나는, 리드미컬한 등의 감정들과 연관이 된다. 물감 간의 컨트라스트를 강조하면 명쾌함을, 물감 간의 부드러운 진행(그라데이션)은 차분한 느낌을 준다.
이러한 조합으로 시각적 자극을 활성화시켜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물질 이상의 감정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고 생각한다. 왜 그러한 자극이 느껴지는지, 무슨일 이 일어나고 있는지 호기심이 일어나는 상태이다. 눈의 능력은 굉장히 꼼꼼하고 섬세하므로, 머릿속에서 이해가 되는 영역보다 더 많은 정보를 본능적으로 관찰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수십 개의 색상 이름으로 표현되기 힘든 백만 개의 색상이 눈을 감지할 수 있는 것처럼 말이다. 나는 일상 속에서 발휘할 수 없는, 일상적 이해의 단계를 넘어서는, 시각의 능력을 끌어내 보고 싶었다. 인간은 더 이상 시각이 생존의 문제를 결정하는 시대를 살지 않는다. 하지만 배고픈 육식동물이 생존을 위해 수풀 속 미세한 움직임을 최선을 다해 관찰하는 상태와 같이 시각적 집중을 해야 하는 상태를 마련해보고 싶었다.
HS: 재미있고 신나고 싶어서도 충분히 이유가 된다고 생각한다.
JK: 배고파서 절체절명의 상황에 먹이를 잡은 동물은 어떤 기분일까를 상상해 보았다. 게임을 하듯 놀면서 잡은, 언제 놓아줘도 되는 먹이가 아니라 삶을 지속할 수 있는 에너지로서 꼭 필요한 양분이 되는 먹이이다. 물론 재미와 신남도 있겠지만 만족, 후련함, 안도감 등의 감정이 더 크지 않을까 생각한다. 나는 적극적인 시각의 활성화와 집중도를 담은 작품이라는 결과를 내고 이를 통해서, 후자에 가까운, 어떤 무거운 문제를 짊어진 상황에서지만 가능한 삶에 대한 안도감을 관객한테 전하고 싶었다. 삶에 대한 난해한 불확실성은 여전하지만 유쾌하고 호쾌한 붓자국을 통해 걱정들이 없어져 마음이 편해진 상태를 관객 각자의 삶에 전하고 싶었다. 이러한 안도감이라는 것이 긍정적인 기분이므로 대체적으로 그림의 분위기가 밝은 느낌이 난다.
HS: 화면이 다 차 있고 물감이 매트하게 발라져 있고 물감의 두께가 느껴지고 불투명함에도 가볍고 산뜻한 느낌과 색. 붓자국의 속도감 등이 특징적이다. 물감의 양감(뭉친 부분)도 물론 고려할 것일 텐데, 물감이 약간 굳은 상태에서 그렸을 때 덩어리져서 되어서 부분 부분 튀어나오게 되는 효과도 많이 활용한다. 평평해 보이게 그려진 물감층 위에 다소 똑 떨어지는 물감을 올려서 콜라주처럼 보이게 하기도 하고.(BAU_3700, 370
3
)
묽고 투명하며 두께감 있는 물감층이 그 옆의 다른 부분들에 비해 엄청 입체적이고 무게감 있게 보이기도 한다
.(BAU_3717)
이런 표현을 위해 용매
(
기름
)
도 신중히 선택하는 편인가
?
JK:
그렇다
.
다양한 종류의 용매를 실험해보는 편이고 점성과 농도 그리고 무광인지 유광인지에 관하여 다양한 시도를 한다
.
마르는 속도에 따라서 표현법이 달라지므로 현대적으로 개발된 알키드와 레진 등의 활용에 흥미가 있고 두꺼운 표현을 위하여 비즈왁스나 바디감 있는 미디엄을 활용하기도 한다
.
HS:
회화를 평면이라고 하는데 물감이 발려져 있는 것을 자세히 보면 꽤 입체적임을 알 수 있다
.
평면
(
화면
)
위의 이런 입체감과
,
그 입체감의 효과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나
.
JK: 입체감 있게 발려져 있는 것은 보다 대조적인 표현이나 현존하는 느낌을 극대화하기 위해서이다. 예를 들어 부드럽게 그라데이션 되어있는 색조들 위에 입체감 있는 표현이 들어가면 그라데이션은 뒤로 후퇴하는 효과, 입체감 있는 표현은 앞으로 돌출되는 효과를 내서 공간의 분리와 같은 효과를 낼 수 있다. 입체감의 효과는 실제로 두꺼운 피막을 형성하기에 물감을 더 불투명하게 보이며 그 아래의 색이 비치는 효과를 차단할 수도 있다. 입체감 자체는 붓자국 자체의 독립성을 강조해주고, 이러한 독립성은 셰이프드 캔버스로 붓자국을 발전시켜보는 계기가 되기도 하였다.
HS: BAU_3704의 가장 가운데 있는 흰 부분과 그 왼쪽에 있는 흰 부분은 위치가 다르게 보인다. 왼쪽에 있는 것이 앞에 튀어나와 보인다. 그 튀어나와 있는 선 때문에 전체 화면에 입체감이 생긴다. BAU_3709의 흰 부분의 왼쪽은 다른 색과 함께 부드럽게 흡수되어 있고 오른쪽은 뚜렷한 경계를 이루고 있어서 마치 서로 다른 차원에 걸쳐 있는 것 같다. BAU_3729에서는 5개의 작고 밝고 빠른 터치가 더해짐으로써 그 아래의 레이어들이 공간적으로 물러나 보인다. 물감의 층과 경계, 레이어에 의한 미묘한 표현들인데 이런 것을 느낄 때 작가도 신나고 재밌을 것 같다.
JK: 때로는 의도적으로 표현하고, 때로는 직관적으로 순간 포착된 순간을 응용하거나 과장하여 이러한 효과들을 극대화하기도 한다. 물감의 층과 경계, 레이어에 의한 미묘한 표현은 항상 새롭고 재미있고 늘 항상 발견과 응용의 재미가 있다. 특히 새로운 것을 발견했을 때는 아주 신이 나서, 그것을 활용하는 방법을 반복해 보며 기억하려 한다.
HS: 망쳐서 숨기는 그림들은 어떤 그림들일지가 궁금해진다.
JK: 망쳐서 숨기는 그림들은 질서 없이 늘어져있는 사물들과 유사하다. 각 부분이 어떠한 그룹으로 묶여지지 않고, 조화가 되지 않는 느낌이다. 보통은 될 때까지 그려서 어떻게든 망쳐서 숨기지 않으려고 하는데, 이러한 시도와 노력에도 불구하고 망치는 그림이 가끔 있다. 그런데 그런 그림들은 또 몇 개월 묵혀두었다가 다시 그리면 다시 마음에 드는 상태로 완결지을 수 있을 때도 있다.
HS: BAU_3690, BAU_3695 같은 경우 굉장히 밝은 색들을 이용해서 큰 컨트라스트를 이루고 있다. 색(물감)의 농도나 채도 명도 모두 컨트라스트에 영향을 미칠텐데 치밀하게 계산해서 색을 고르는 편인가? 그리고 전체적으로 컨트라스트가 커서 리듬감과 경쾌함이 느껴진다. 시원한 느낌, 그러면서도 일반적으로 ‘어둡다’고 할 수 있을 만한 색은 거의 사용하지 않는다. 짙은 푸른 색도 밝은 색과 섞여 채도가 낮아져 있다. 밝은 색조들만을 가지고 그 질감 두께 등을 이용해 큰 컨트라스트를 구성해보려는 목적이 있는지?
JK: 색상의 조합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실험을 해보는 편이다. 아무래도 기존의 주어진 조건(진행중인 현재의 상태)을 기반으로 그다음 요소를 결정하다 보니 대조가 되는 입장이 크게 느껴지는 듯하다. 작품의 첫인상은 컨트라스트가 크고 시원해 보일 수 있다는 것에 공감한다. 그러나 잘 보면 그 내부에서 보면 볼수록 미묘한 표현이 더 많을 수도 있다는 것이 회화의 매력인 듯하다.
HS: BAU_3695와 BAU_3699는 얼핏 봤을 때 색조가 비슷한데 그 질감과 두께감 때문에 아주 다른 느낌이다. 플랫함/입체감. 일부러 이런 두 가지 모두 실험하는 건가?
JK: 그렇다. 플랫함 입체감에 따라 아주 다른 작업이 되기도 한다. 입체감이 큰 회화 작업을 플랫한 회화 작업보다 덜하고 있는 것 같아서 의식적으로 더 만들어보기도 한다. 위의 예들이 그러하다.
HS: 작업의 제목은 어떻게 붙이고 있나?
JK: 제목은 최대한 스스로 기억할 수 있을 만한 것을 붙인다. 몇 년 후에도 그림의 이미지를 보면 내가 그 이름을 기억하여 말할 수 있으면 좋겠다. 작업 내의 어떤 특징을 잘 담아낸 이름을 붙이면 쉽게 기억할 수 있다. 잘 까먹어지는 이름은 그 작업과 거리가 먼 것이라 생각한다. 잘 기억되는 작업, 잘 기억되는 이름을 만들고 싶다.
앞으로
HS: 다음 작업은 어떤 걸 하고 싶나?
JK: 공간의 중간에 위치한, 셰이프드 캔버스가 앞뒤로 붙은 작업을 하여 공간 내에 설치를 해보고 싶다.
HS: 마지막으로 자신의 작품이 관객에게 어떤 의미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나. 예술가로서의 목표가 있다면.
JK: 내일 만드는 작업을 생각하면서 살고 싶다. 예술가로서의 목표는 내 작품으로 어떤 사람들이 연대하는 계기가 되었으면 하고 생각한다. 한 템포 쉬어가고 기분을 전환하는 것도 괜찮고, 선순환할 수 있는 어떤 효과가 있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