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동욱 개인전

전시 서문

by 서한겸

윤이 나며 반짝이는 것들이 한데 모여 있다. 줄무늬가 있는 것은 조개껍데기인가 싶고 자연사 박물관의 광물이나 화석도 생각난다. 좀 더 자세히 보면 흙을 빚어 만든 것임을 알 수 있지만 여전히, 물속에서 오랫동안 닳은 듯 매끄러운 표면과 둥근 돌기, 무언가 붙어 있다가 빠져나간 듯한 구멍, 불룩하거나 오목하거나 갈라진 모양은 한때 살아있던 유기체를 떠올린다. 제각각인 색과 모양 속에서 어떤 패턴과 규칙이 느껴지기 때문이다.

<point> 연작의 생김새는 클라이밍 홀드의 모양에서 시작되었다. 클라이밍 홀드는 인공물이지만 돌, 바위, 절벽의 틈새와 돌출을 본떠 만든다. 지각의 단층 침강 융기 그리고 풍화와 침식으로 만들어진 표면의 모양을 반영한 것이다. 이에 더해 또 다른 자연물인 인간의 손과 발이 잡거나 딛기 좋도록, 또는 어렵도록 고안된다. 그러니 이 작은 덩어리들에서 살아있는 것의 느낌이 나는 게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자연은 굳이 의도를 표명하지 않아도 자신만의 법칙을 따라 규칙성을 띤다. 살아있는 것은 그를 둘러싼 자연, 사물과 끊임없이 영향을 주고받으며 외부 환경에 대한 생명체의 반응이 그 생명체의 생김에 반영된다. 가시꽃 연작에서 가시와 그것에 둘러싸인 둥근 형태는 그 중심점에 흡수의 중심 또는 보호할 것이 있음을 의미한다. 그 가운데는 가시를 모두 희생하고서라도 지켜야 할 너무나 중요한 것이 자리할 수도, 혹은 꽃을 꽂기 위해 비워질 수도 있다. 어느 쪽이든 대칭과 양감, 구멍 모두 어떤 필요와 기능에 의해 부풀고 돋아났을 것이다.


인간은 어떤 필요에 의해 직립했고 두 손의 자유를 얻었다. 그래서 전에 발과 함께 흙을 딛던 손으로 흙을 빚을 수 있게 되었다. <throw it> 연작은 벽과 천장에 던져진 채로 붙어있던 흙을 떼어내 유약을 발라 구워낸 것이다. 그런데 모두 납작하고 둥글다. 흙덩이를 던졌는데 왜, 어떻게 둥글게 되는가? 물을 던지면 둥글게 되는가? 쇳가루를 던지면 둥글게 되는가? 한데 뭉쳐지는 것도, 벽에 부딪혀 원형을 이루는 것도 흙의 고유한 성격과 벽 사이의 물리적 작용에 의해 가능한 일이다.

흙은 원래 흩날리고 부서진다. 하지만 물을 더하면 모양을 갖춰 빚을 수 있다. 불속에서도 타지 않고 더 단단해진다. 흙으로 무언가를 만들어 구워내는 것은 이러한 흙의 법칙, 그 타고난 특질에 인간의 의지와 손의 활동을 더하는 일이다. 그런데 본래 흙을 단단히 하는 것은 지구가 하는 일로, 긴 시간 동안 엄청난 열과 압력으로 이루어진다. 흙을 굽는 것은 이를 모방해 흙의 순환을 앞당기는 행위다. 부드럽게 흩어지던 흙을 여느 광석만큼이나 단단하게, 그것도 내가 뜻한 형태로 만들어, 오래도록 있도록 하는 것이다.

빗살무늬 토기는 그것이 만들어진 당시에 그랬을 만큼이나 지금까지도 마술 같은 탄성을 자아낸다. 이는 생각보다 본능적인 의미를 가지는데 인간은 죽어서 흙으로 돌아간다는 오랜 믿음을 누구나 막연히 체감하고 있기 때문이다. 흙을 굽는 것은 그래서 더 의미심장한 행위가 되며 인간이 빚은 모양으로 단단해진 흙이란 인간에게 오래된 경이가 된다. 그러니 클라이밍 홀드의 생김과 가시의 형태와 던져진 흙덩이에 반응해 빚고 유약을 바르고 구워 반짝이는 덩어리를 만드는 것은 너무나 마땅하고도 신비로운 일이다.


인간은 불에 직접 닿을 수 없으므로 흙이 구워지는 동안은 흙과 불에 맡기는 수밖에 없다. 그러나 흙을 빚고 말리고 굽는 시간과 불의 온도를 조절하는 것은 인간이다. 마침내 단단히 빛나는 결과물을 보면 창조자처럼 뿌듯하면서도 깨지지도 타버리지도 않고 모든 과정을 견디어 준 흙에 고마워진다. 사실 무언가 아름답고 귀한 것, 좋은 것, 소중하고 간직하고 싶은 것, 빛나는 것과 반짝거리는 것, 남기고 싶은 것을 만드는 일은 대체로 이렇다.




서한겸(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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