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유미 전시 서문
‘할머니’가 그림을 그린다. 미대 교수도, 화가도, 화가의 아내도 아닌 할머니가 그림을 그린다. 자신의 느낌과 감성을 표현하는 할머니, 이런 말 자체가 어색하게 들린다. 나이든 여성도 한 사람이고 느낌과 감정과 생각이 있을 것임을 알면서도 말이다. 작가가 함께 그림을 그리자고 했을 때 ‘할머니’들의 반응도 크게 다르지 않다. 내가 뭐라고 그림을 그리냐. 하지만 이런 말이 진심일까. 자신의 꿈을 부정하고 단념한지 오래 되어서, 다시 실망하거나 마음 상하고 싶지 않아서 그러는 게 아닐까.
할머니라고 하면 가족적 관계 안에서 특정 기능을 하는 인물이 떠오른다. 작가는 이들을 각자의 이름을 부르기로 하지만 이들은 자신의 이름에 익숙하지 않다. 아마도 그의 이름은 그 삶에 일어난 수없이 많은 사건과 그에 대한 감정과 반응들과 함께 어딘가로 멀어졌을 것이다. 그러나 주목받지 못한 채로 지나가는 삶 또한 하나의 역사다. 학업의 좌절, 결혼, 출산, 육아, 자녀의 결혼, 나이듦과 질병 등 개인사에 한국전쟁부터 인터넷의 발달까지 사회의 변화가 촘촘히 섞여들어간다. 그런데 세상이 이렇게 쉬지 않고 변하는 동안 큰 가능성도 도전도 양보한 채 아이를 키우고 밥을 차리던 이들은 무엇에서 의미를 찾으며 살아야 했을까.
이들은 끝없는 겸손이 천성처럼 되어 감히 사회나 역사 같은 거창한 이야기는 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 말과 그림에는 부단히도 뒤로 제쳐지고 온갖 일에 시간과 기회를 빼앗기고도 고집스럽게 남아 있던 타고난 취향과 특성이 드러난다. 평생 아무도 아니었던 그들의 개인됨과 고유한 성격이 끈덕지게 살아남아 서툰 손끝, 붓끝에서 기어이 드러난다. 그리고 이 지점이 작업의 핵심적인 부분이다.
박유미의 영상을 보고 있으면 묵묵히 흘러가는 시간의 존재감이 느껴진다. 관객은 갑자기 시간과, 그러니까 삶과 1대 1로 대면하게 된다. 누구나 삶을 살아가지만 삶을 직면하고 바라보는 일은 또다른 일이다. 지나가는 시간을 목격하고 기록하며 삶에 대해 증언하는 듯한 박유미의 작업은 온화하면서도 비장하다. 거기에는 애도하는 듯한 애틋함과 약간의 사명감이 수반된 결심이 담겨 있다. 영상을 찬찬히 보고 있자면 언제나 어디에나 있는 특별할 것 없는 삶에도 이름이 있다는 새삼스러운 사실을 깨닫게 되는데 노년 여성은 개인성을 억압당하고 착취당한 세대이자 성별이기에 그들에게서 드러나는 개별성과 고유함은 오히려 더 귀하고 상징적이다.
박유미의 작업을 공동체 미술 또는 참여 미술로 본다면 이런 질문이 들 수 있다. 과정이 중요한가 결과물이 중요한가. 작가가 참여자들을 가르치는가 또는 참여자로부터 배우는가. 참여자에게는 어떤 영향을 끼치는가. 하지만 작업이 진행되는 과정에서 작가, 참여자, 그리고 그들이 함께한 작업은 작가와 참여자를 둘러싼 새로운 무언가가 된다. 작가는 오래된 공동체에 불쑥 나타나 그림을 그리자고 한다. 하지만 참여자들을 이끌어나가지 않는다. 오히려 참여자 개개인의 느낌과 표현을 드러내기를 기다린다. 이 과정에서 참여자는 삶의 새로운 자극제를 얻고 작가 또한 새로운 예술적 언어를 배우게 된다. 작가의 의도도, 참여자와 그 그림도 중요하지만 어디까지나 작가는 자신의 작업을 하고 그들은 그들의 그림을 그리는 것이다. 삶이 그렇듯이, 서로가 각자의 삶을 살아가듯이 말이다.
이 작업을 보는 관객도 마찬가지다. 작업 밖에서 이 모습을 보는 관객은 작가와 참여자의 입장을 오가며 생각하고 느끼게 된다. 나도 때로 누군가에게 영향을 끼치는 일을 하고 때로는 누군가의 제안에 따라 내 삶에 한 번도 해보지 않았던 일을 시작하기도 하며 그리고 아무런 상관없는 타인들의 일을 잠시 바라보고 무언가를 얻어 가기도 한다. 이것이 바로 나의 삶과 나의 세계, 그리고 나 자신을 여러 방향에서 보는 행위이기도 하다.
이것은 사실 모두의 이야기다. 누구나 어느 정도는 자신의 느낌을 제쳐두고 무시하고 억누르며 산다. 그런데 그림을 그린다는 것은 자신의 정체성을 이해하고 내면을 표현하는 일이다. 매일의 생활에 너무나 밀착되어 개체로 존재하지 못하는 답답함을 느끼는 사람이라면 이들의 그림과 이들이 그림을 그리는 모습에서 자신을 누르고 있던 무게를 떨치고 싶은 욕구를 느낄 것이다. 이러한 느낌을 가치롭게 여기고 표출하고 기록하는 데에 얼마간의 시간과 에너지와 자원을 사용해 보는 일. 이는 자기 자신에게 조금 더 잘해 주는 일이다. 그리고 이를 통해 자신의 새로운 부분을 만날 수 있다.
나는 못한다, 한 번도 안해봤다면서도 참여자들은 그림 그리기를 재미있어한다. 잘한다고 해주니 좋다, 기운이 난다며 기뻐한다. 이들이 쑥스러운 듯이 그려낸 그림은 때로는 깜짝 놀랄만큼 완벽하다. 유명 작가의 드로잉이라고 소개하면 믿을 수도 있을 것 같다! 그림을 그리는 그들의 얼굴과 목소리에서는 억눌러온 자부심과 말, 욕구가 느껴진다. 한 참여자는 ‘토끼풀이라도 그리고 보리잎사귀라도 그리고’ 싶다고 말한다. 이 말은 일상적이라서 더 놀랍다. 그의 삶에서 매일같이 보던 대상에 대한 느낌을 간직하고 곱씹고 그리고 ‘그리고’ 싶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이 말은 잘 생각해 보면 예술가의 작업노트의 한 부분같기도 하다. 발에 밟히는 돌멩이, 아무데나 피어 있는 풀 하나에도 일어나는 마음이 있고 느낌이 있다. 표현하고 싶은 마음이 든다. 왜일까? 왜 그리고 싶고 표현하고 싶을까? 그건 모르겠지만 일단 그리고, 그리면서 가끔 알 것 같다가 다시 모르겠는 것. 이건 바로 예술가들의 매일이 아닌가. 이는 결국 예술이란 무엇인가, 누가 하는 어떤 행위인가에 대한 질문과 직결된다. 자신의 감각을 소중히 간직하고 그에 대해 질문하며 세상에 대한 느낌과 반응을 주변 사물을 통해 표현하는 것. 이것은 모든 예술가가 몰두하는 문제이며 삶의 의미에 대한 탐구이다.
박유미의 작업에 참여한 사람들은 오랫동안 할머니로 불렸을 것이다. 그리고 할머니가 되는 세월 동안 자신의 속도로 자신의 취향대로(상황이 허락하는 한) 자신의 삶을 꾸려왔을 것이다. 자신만의 청소 방법과 살림 노하우, 조리 방법, 그리고 자신만의 생활방식과 습관과 규칙이 있을 것이다. 그들은 집 안의 수십년 경력의 전문가다. 그들이 수십년간 쌓고 다듬어 형성한 삶의 방식은 하나의 고유한 형식으로 자리잡았을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자신만의 스타일을 찾고 그것을 구현해 나가는 것은 또한 예술가들이 매일 하려고 하는 일이다. 예술의 본질이 무질서와 무의미 속에서 의미를 찾는 것이라 한다면 소중하게 생각하는 어떤 순간을 완상하고 거듭 보듬으며 더 중요한 느낌을 위해 시간을 쓰고 자신만의 의미와 형식을 켜켜이 누적하는 것은 예술적인 일이다.
모든 예술가들이 그렇듯이 이들에게도 역경은 남아 있다. 누군가의 밥을 차려 주어야 해서 그림을 그리러 오지 못하는 상황이 있다. 그림을 그리고 싶어도 그 그림을 그릴 시간을 타인의 밥을 차리는 데에 써야만 하는 유구하고도 중대한 사정이 있다. 자신의 시간을 마음대로 쓰지 못하는 사람은 자신의 삶을 마음대로 할 수 없다. 이들은 토끼풀에 대한, 보리잎사귀에 대한 느낌과 마음과 시와 그림을 얼마나 많이 흘려보내야만 했는가.
서한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