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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행요 Apr 22. 2021

<걸어도 걸어도> 좋은 사람이 되는 일은 원래 어렵다

걸어도 걸어도(2008)

료타는 형의 기일을 맞이해 부모님 댁에 아내와 아들과 함께 내려간다. 그는 고향으로 가는 기차 안에서 내내 아버지의 뜻에 따라 의사가 되지 못한 자신과 사별한 전 남편 사이에 낳은 아들을 키우고 있는 아내에 대한 시선이 신경 쓰인다. 오랫동안 서로를 이해하지 못하던 그들은 고향에서의 시간을 통해 가까스로 조금 가까워지는 듯하였으나 결국 료타와 아버지가 함께 축구장에 가는 일은 없었다. 그것은 시간의 문제이기도 하고 마음의 문제이기도 했다.

큐슈 여행 당시 노천온천에 가기 위해 가고시마에서 이부스키로 가는 기차를 탄 적이 있다. 기차역 앞 소바집에서 바로 옆 자리에 앉은 한국인 부자를 만날 수 있었다. 꽤나 지쳐있었던 나는 애써 밥을 마저 먹는데 집중하고 있었지만 한국인 아저씨는 내가 한국인임을 단숨에 알아본 듯했다. 그렇게 우리 셋은 함께 기차에 올랐다.


아들은 나와 비슷한 또래인 것처럼 보였고 그는 가고시마 대학에서 교환학생 생활을 마친 후 귀국을 맞아 아버지와 함께 짧은 여행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아버지와 아들의 사이는 누가 봐도 이상하리만치 불편해 보였다. 아저씨는 계속해서 아들에게 말을 붙이고 아들은 짜증만 낸다. 같은 버스 안에서 멀찍이 떨어져 앉은 둘 사이에 흐르는 어색함과 불편함은 나까지 자리를 박차고 나가고 싶게 만들었다. 그러나 머쓱한 마음을 감추지 못하는 아저씨의 표정이 눈에 비쳤고 그건 누구라도 모른척하기 힘든 것이었다. 결국 나는 아저씨의 아들을 대신해 내 옆에 바짝 앉아서 말을 붙이는 아저씨와 대화를 하며 온천까지의 여정을 함께 했다. 둘 사이의 어색한 분위기가 견디기 힘들어 괜히 살가운 척을 했던 나였지만 한 편으로는 그 대화가 즐거웠다. 아버지에게 예의 바르고 살가운 아들 역할을 연기하는 듯한 느낌이었다. 화목한 아버지와 아들 사이 같은 것을 경험해본 적 없는 나에게 그건 분명히 연기에 가까웠다. 그 둘의 사이는 온천욕이 끝나고 다시 가고시마에 가는 기차에 오를 때까지도 여전히 불편해 보였고, 그 긴 시간 내내 아들의 퉁명스러운 반응에 아무렇지 않음을 꾸며내는 아저씨가 괜히 눈에 밟혔다. 결국 나는 더 이상 견디지 못해 어설픈 핑계를 대고 다음 기차를 타겠다며 둘을 먼저 가고시마로 보냈다.


물론 둘 사이엔 내가 모르는 사정이 있을 수 있다. 온천 여행을 떠나기 전 날 큰 다툼이 있었을지도 모르고, 평생 가정에 소홀하던 아버지가 뒤늦게 아들과의 관계를 회복해 보려 노력하지만 뜻대로 되지 않는 것일지도 모르고, 그는 용서하기 힘든 잘못을 저지른 아버지일 수도 있다. 그러나 그 시간은 분명히 내가 처음으로 자식이 아닌 부모의 마음을 더 이해했던 첫 번째 순간이었다. 나는 아들과의 관계가 뜻대로 되지 않는 부모의 눈에 비친 안타까움과 모르는 사람 앞에서 아들과 좋지 않은 모습을 보여준 것에 대한 부끄러움을 보았다. 그리고 그 아들의 모습 뒤에는 내가 있었다.


오랜 시간이 흐르고 난 지금에서야 엄마의 희생과 수고를 이해할 수 있게 되었지만, 가까운 듯 멀어진 사이는 좀처럼 회복하기 어려웠다. 머리로 이해하는 것은 쉬웠지만 그걸 표현하고 전달하는 일은 어렵다. 그런 말들은 입가에 머물다 사라지기도 하고 때때로 다른 의미로 전달되기도 한다. 아저씨와 아들도 그랬을지 모른다. 그런 일은 분명히 나이가 먹어도 여전히 어렵다. 오히려 그 상태 그대로 나이가 들어버려 더 어려울 수도 있다. 영화 속 료타도 그랬을 것이다. 그는 나이가 들어 아들에서 아버지가 되었다. 아내와 아들에게 조금 무뚝뚝하지만 따뜻한 마음을 전달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 그런 그도 가족 앞에만 서면 다시 퉁명스러운 사춘기 소년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가족이라서 애틋하고 가족이라서 어렵다. 외면하고 싶은 가족의 역사가 우리 사이에 언제나 존재하고 그걸 지워버리는 일은 좀처럼 쉽지 않다.


가고시마의 아버지와 아들을 생각하는 내내 예전에 본 문장이 떠올랐다. "축구를 시작한 순간 축구 선수일까. 알에서 깬 순간 매미일까. 자식을 낳은 순간 아버지일까." 좋은 부모가 되는 일은 어렵다. 아니, 그전에 좋은 사람이 되는 일은 원래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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