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도 '그것'을 느껴보고 싶나요?
메이든의 젖가슴. 약 281m의 쌍둥이 봉우리. 샌프란시스코를 모두 아우르는 황홀한 경치를 감상할 수 있는 곳. '바람의 도시 샌프란시스코'를 제대로 맛본 곳.
이번 여행지는 트윈픽스다.
트윈 픽스로 올라가는 구불구불한 오르막은 세련된 스포츠카 대신 투박한 밴이 올라가도 광고 찍기에 모자람이 없는 듯 보였다. 자유롭고 역동적인 길을 따라 부푼 기대를 한가득 싣고서 올라가니 엄마의 젖가슴처럼 봉긋 솟은 두 언덕이 보였다.
초기 스페인 정착민들이 트윈픽스를 "메이든의 가슴"이라고 부른 이유를 알겠다. 나란히 솟아있는 트윈픽스는 모양새나 높이도 꼭 젖가슴처럼 보였다. 이 꼭대기에 누가 이렇게 만들어놓았을까. 눈앞에 솟아있는 자연의 신비가 새삼 새롭게 느껴졌다.
'와우~'
내리는 순간 코끝을 찔러오는 땅바닥의 찌린내. 다시 인간 세계로 내 정신을 회귀시켜 주는 꼬리꼬리 한 냄새가 차문을 열면서부터 콧구멍을 찔러댔다. 근처에 화장실이 안보이더니 바닥에다 시원하게들 싸질렀나 보다. 치안이 좋지 않아서 밤에는 조심해야 하는 지역에 있는 트윈픽스 건만 여기서 보는 야경은 또 끝내준다고 하니 쫄깃한 심장과 멋진 야경이 합쳐진 흥분된 조화가 궁금하다.
바람이 많이 불어 안개를 다 날려 버린 모양이다. 멀리까지 툭 터진 시야가 마음까지 툭 터지게 만든다. 멀리 태평양에 떠 있는 색색깔의 배들, 바둑판의 격자무늬처럼 질서 정연하게 늘어선 집들, 저 멀리 보이는 빨간 금문교, 하늘을 찌르는 높다란 건물들이 오밀조밀 모여있는 샌프란시스코 시내.
높이 올라가면 또 다른 신세계가 펼쳐질 거란 기대감에 세찬 바람 따위는 아랑곳 않고 꼭대기까지 올라갔다. 소진 남매는 이제 탐험을 좀 즐길 수 있게 되었는지 바람이 불어도 흥겹다.
"정글 숲을 지나서 가자~엉금엉금 기어서 가자~
늪지대가 나타나면은 악어 때가 나올라 악어 떼!”
바람 한 번 휙 불면 6개의 손과 다리가 휘청 휘청거렸다. 서로 손에 손을 꼭 잡고 바람소리에 제대로 들리지도 않는 "조심해 조심해"를 바람에 흩날리며 113(윤이와 내려오는 길에 하나씩 세어봤다.) 개의 계단을 아슬아슬 올랐다. 태풍 같은 바람이 조금의 방심의 틈을 노리다 나와 소진 남매를 태평양 바다로 날라다 줄 것 같았다.
꼭대기에는 신세계는 없어도 두 개의 바위가 있었다. 꼭대기에서 사정없이 불어대는 바람에 소진 남매의 안전을 확보하기 위해 그 사이로 피신해야 했다. 전장 속의 벙커같이 그 좁은 공간이 아늑했다.
그렇게 한참 샌프란시스코의 멋진 전경을 보며 바람과 놀다 보니 또 인간 세계보다 신들의 세계에 가까워지는 기분이었다. 하늘에서 내려온 신선이 되어 샌프란시스코를 바둑판 삼아 놀다 배고프면 메이든의 젖가슴에서 배를 채울 수 있을 것 같았다.
내려와서 차에 타고 보니 거센 바닷바람에 양 볼은 빨갛고 뚫린 구멍들 제각기에서 나온 눈물 콧물 침이 허옇게 자국을 남겼다. 싸구려 미용실에서 방금 드라이를 마치고 나온 양 머리칼이 바람의 방향대로 모두 바싹 서있어 차에 앉아 한참을 머리를 빗고 얼굴을 닦았다.
두 번째 목적지, 지난번에 바람맞은 타르틴 베이커리로 향했다. 트윈픽스에서 차로 10분이면 닿을 수 있는 거리다. 가게 안에는 6~7명의 사람들이 앉아 있었다. '샌프란시스코'라고 제목이 달린 여행책을 보는 관광객스러운 사람도 몇몇 보였다.
"투 바나나 크림 타르츠, 원 플레인 크라상, 원 레몬 빵 앤 커피, 플리즈."
"34 달러스."
빵 4개에 커피 한잔이 뭐가 이렇게 비싸. 속으론 우리 가족 한 끼 밥값인 빵값에 뜨헉했지만 초라한 행색일지언정 초라한 지갑 사정은 들키고 싶지 않아 카드를 주는 떨리는 손을 짐짓 자신 있게 내밀었다. 온화한 미소를 입술에 장착한 채.
바나나 크림 타르트 한 조각과 커피 한 모금은 가격과는 다르게 황홀했다. 소진 남매도 맛있는지 큰 크라상을 다 먹어치웠다. 생크림 위에 얇게 썬 초콜릿 토핑, 그 밑은 부드러운 바나나 크림, 그 안에 큼직큼직 썰어진 바나나, 그 밑엔 다크 초콜릿이 코팅된 쌉싸름하고 바삭한 쿠키. 처음 먹어본 달콤 쌉싸름한 그 맛은 비싸더라도 다음에 또 오고 싶은 맛이었다.
"오늘 뭐가 제일 재밌었어?"
항상 아이다운 시선으로 그 또래의 아이들처럼 재밌었던걸 말하곤 한다.
랜달 뮤지엄에서는 "과자요."였고 돌로레스 파크에서는 "미끄럼틀이요."였다.
소윤이의 대답.
"춥고 바람도 많이 불고 고생하고 별로였어요."
역시. 아이들은 솔직하다. 아이들에겐 놀이터가 최고다.
"그런 게 탐험이야 소윤아."
셰릴 스트레이트의 [와일드]라는 책을 보면서 그런 힘든 여행(?)을 해보고 싶었다. 그 험난한 과정을 통해 얼마나 사람이 바뀔까 나도 바뀔 수 있을까 궁금하다. 겪어본 사람만이 안다는 그것. 그것을 통해 나도 인생을 새롭게 보고 다시 새롭게 살아갈 수 있는 힘을 충전받고 싶다.(지금의 삶이 엉망진창이라는 건 아니다.) 삶의 원초적인 도전을 해보고 싶다.
한 달 동안 온갖 동물과 벌레들이 득실거리는 위험하고 험난한 산에서 혼자 죽을 고생을 하고 싶지는 않지만 흉내라도 내보고 싶다. 지금 내가 소진 남매와 할 수 있는 탐험은 이 정도가 최선이지만(사실 이 정도도 아이들은 싫어한다.) 아이들이 커가면서 탐험의 강도도 높여볼 생각이다.
살면서 풍요 속의 빈곤에서 고뇌하지만 '살아있음' 하나에, 정말 원초적인 '의식주'에만 초점을 맞춰야지 살 수 있다면 쓸데없는 생각으로 가득 찬 뇌도 좀 쉴 수 있지 않을까. 그 옛날 우리 선조들은 그렇게 살아냈고 그 후손인 우리도 크게 다르지 않은 뇌구조일 텐데 그 옛날로 잠시라도 돌아갈 수 있다면 뇌도 좀 건강해지지 않을까. 나와 아이들도 '그것'을 조금이라도 느껴볼 기회가 있다면 인생이 더욱더 풍성해질 거라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