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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름바다고래 Sep 12. 2023

노스게이트의 여름밤

대출은 많지만 하고 싶은 것도 많아서

 누군가 노스게이트가 무엇이냐고 물어본다면 나는 치앙마이의 대표 관광지라고 대답할 것이다. 단순히 여느 재즈바라고 하기에는 치앙마이를 거치는 여행자라면 모두 한 번쯤은 가보는 장소이기 때문이다. 오히려 태국 하면 떠오를 만한 번쩍거리는 사원들보다 더 유명할 수도 있다. 치앙마이에 와서 음악을 즐겨보고 싶은 여행자라면 대부분 노스게이트를 첫 방문 장소로 고르지 않을까? 나 역시도 음악을 들으러 매일 밤 도시 여기저기를 다니는 여정을 노스게이트에서 시작했다. 매일 밤 좁디좁은 실내 자리를 선점하지 못한 사람들이 가게 앞 도로가 미어터지도록 몰려 있던 곳, 코앞에서 뮤지션들이 굵은 땀방울을 뚝뚝 흘리며 만연한 미소를 짓는 곳, 온갖 악기가 뒤엉켜 여름밤을 달구던 곳, 그립고 그리운 노스게이트.


 먼저 하나 고백할 것이 있다. 한달살이를 가기 전, 나는 음악을 즐기는 사람은 못 되었다. 재즈바니 음악이니 하는 글을 쓰려니 원래도 음악에 관심이 많았던 사람 같아 보이지만 극히 평범한 정도로만 노래를 듣는 사람이었다. 일할 때 집중하기 위해서, 지하철을 타고 다닐 때 심심하니까 에어팟을 꽂고 듣는 딱 그런 정도. 딱히 좋아하는 장르도 없고, 가장 좋아하는 가수도 없고, 제일 부르기 좋아하는 노래도 없었다. 노래 잘하는 가수들의 공연을 보면 좋아했지만 음악 페스티벌이나 콘서트를 일부러 찾아가 본 적도 없었다. 그래도 재즈바를 가 본 경험은 있었다. 한국의 대표 재즈바라며 워낙 공연이 좋다길래 호기심에 2, 3여 년 전에 가본 것이었는데 안타깝게도 내 취향은 아니었다. 돌려 말하면 어렵다고 생각했고, 솔직하게 말하면 너무 지루했다. 해외로 여행을 갔을 때도 라이브 뮤직 바를 가면 어쩐지 부담스럽고 그다지 재미가 없어 굳이 찾아가게 되진 않았다.


 그러니 원래 노스게이트를 갈 생각은 없었다. 먼저 치앙마이를 여행했던 남자친구가 노스게이트 노래를 그렇게 부르지 않았더라면 말이다. 생전 무얼 추천하는 것이 딱히 없는 사람이 꼭 가보라고 했으니 조금은 숙제를 받아 든 기분이었다. 나와 잘 맞는 여행 메이트가 우리의 평소 여행 스타일과 다른 장소를 갔는데, 무려 최고라고까지 하니 묘한 호기심도 생겼다. 이번을 마지막으로 재즈바가 나와 안 맞는다고 느낀다면 이제는 나의 취향이겠거니 받아들이고 다른 할 일을 찾아보겠다고 결심도 했다. 다행히 공연이 본격적으로 시작되기 전에 도착해서 얼마 안 되는 자리를 어떻게 꿰찼다. 아마 조금이라도 늦어서 들어가지 못하고 차도 근처에 서성이며 들어야 했다면 어마어마한 인파에 질리고, 잘 들리지도 않는 음악에 아무 감동도 받지 못하고 돌아갔을 것이다. 그랬다면 치앙마이에서의 나의 생활은 아주 달라졌을 것이다. 치앙마이를 그렇게 사랑하지 않았을 수도 있다. 그리고 나는 나를 재즈바, 뮤직바와는 영 안 맞는 사람이라고 결론 내렸을 것이다.


 우기에 들어서 습기가 공기를 가득 채우던 8월의 어느 토요일 밤, 모든 것이 변했다. 그날의 일기장에는 '안 갔으면 나에게 빚을 지는 것이다.' 라고 적혀있다. 여행을 다닐 때마다 아직 경험해보지 못한 행복이 얼마나 많을지 생각한다던 누군가의 말을 내내 곱씹은 여름밤이었다. 분명 경험해보지 못한 기이한 행복이었다. 보컬 하나 없는 연주를 장장 3시간 동안 들으며 사운드와 공간에 빨려 들어갔다. 누군가의 연주를 보면서 환희를 느낀다고 생각한 건 태어나서 처음이었다. 에어컨은 커녕 선풍기 바람도 없는 좁아터진 공간, 등받침 하나 없는 불편한 의자에 앉아 미지근해진 맥주를 들이켜는데 집에 가고 싶지 않았다. 드럼, 일렉트릭 기타, 색소폰, 건반, 베이스 각각 순서를 돌아가며 솔로 연주와 합주를 하는 동안 남 눈치보기 1등인 내가 무려 리듬을 조금씩 타고 있었다.


 한 번쯤 들어본 것 같은 노래도, 생전 처음 듣는 노래도 있었는데 언제 어떤 악기가 튀어나와 무엇을 할지 예측하기 어려웠다. 그들은 종종 시작하기 전에 어떤 노래를, 무슨 코드로 할지 이야기를 나누는 것 같았다. 연주 중간중간에도 눈을 맞추거나 손짓을 하여 솔로 연주 시간을 몰아주었다가 혼자 다른 시공간에 있는 것처럼 빠져서 솔로 연주를 하던 멤버가 다 보여줬다는 듯한 눈짓을 하면 다시 조화롭게 연주하기도 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본인들도 정확히 어떻게 흐를지는 모르는 것 같았다. 솔로 연주를 하는 멤버의 연주를 흥미롭게 듣고 받쳐주며 합류하고 빠질 지점을 찾고 또 자신이 빛날 순서를 기다렸다. 땀을 뻘뻘 흘리며 미지근한 맥주로 목을 축이고, 가끔은 진지하게 미간에 주름을 잡으며 그보다는 더 많이 활짝 웃으며 시간을 빼곡하게 채워갔다. 허리 아픈 의자에 앉아 조금만 움직여도 옆 사람의 살이 찐득하게 닿는 공간에 갇혀있는데 정말 이상하게도 그들을 따라 자유롭고 행복해지는 것 같았다.

 

 동시에 무언가 뜨끈한 것이 왈칵 쏟아져 흐를 것 같았다. 이 음악을 들을 수 있는 기회가 한 번뿐이라는 것을 직감했기 때문이었다. 똑같은 멤버가 똑같은 장소에서 똑같은 노래를 연주한다고 해도 나는 지금 들은 연주를 다시는 들을 수 없을 것이다. 오늘밤의 기분대로 정석과 변주를 내키는 대로 버무려 만들어진 이 연주를. 지금의 터질 것 같은 심장과 이 낡은 가게와 여기 모인 사람들이 만든 바이브도 다른 무언가가 되어 있을 터였다. 아, 왜 좋은 것은 모두 이렇게 빨리 지나가버리는 것일까. 지루한 모든 것은 그대로인 것 같은데, 왜 내가 좋아하는 것들은 매일 똑같이 내가 좋아하는 대로 머물러 주지 않는 것인가. 늦기 전에 이 순간을 담으려고 아무리 노력해 봐도 영상은 현장감을 1도 담아내지 못했다. 그래도 그날 밤, 그 유일한 음악을 그때의 내가 분명히 사랑했음은 소중하게 기억하고 있다.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의 여주인공 엘로이즈는 음악은 말로 설명할 수 없다고 대답한다. 나도 그때 내가 들은 것을 글로 설명할 재주는 없다. 다만 당신이 치앙마이에 가게 되는 행운을 누린다면 당신에게만은 유일할 그날의 음악을 들어보길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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