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출은 많지만 하고 싶은 것도 많아서
그날 아침, 나는 안 쉬어지는 숨을 억지로 뱉어내며 벌벌 떨고 있었다. 치앙마이에서의 일상은 매우 평화롭게 흐르고 있었는데 호기롭게 스스로 그 패턴을 깨버린 것이다. 한국에서도 안 가본 글쓰기 모임을 치앙마이에서 가기로 한 날이었다. 더군다나 모임은 영어로 진행될 예정이었다. 거짓말 같았다. 내가 정말 영어가 모국어인 사람들과 글쓰기 모임을 하겠다고 했다니. 아침부터 피가 온몸에서 빠져나가는 것 같았다. 사지에 힘이 없고 심장이 쿵쾅거려서 어지러웠다. 가면 인사 겸 자기소개라도 해야 할 것 같은데 뭐라고 해야 할지 난감했다. 나는 왜 이 나이를 먹도록 자기소개에 잼병인 것이고, 가고 싶어서 간다고 한 건 나인데 괴로운 것도 왜 나인가.
이 괴로움의 시작은 일주일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디지털 노마드 그룹에 올라온 글쓰기 모임 홍보 게시글을 본 순간부터 가고 싶다는 마음을 비밀처럼 품게 되었다. 모임의 이름은 무려 Writer's Group이었다. 가고 싶지만 작가는 아니었으므로 참여 신청을 하지는 않았다. 그렇지만 하루가 지나고 이틀이 지나도 가보고 싶다는 생각이 사라지지 않았다. 이런 희망고문에 빠지게 된 이유는 게시물에 쓰여있던 한 가지 조건 때문이었다. '전문 작가가 아니어도 괜찮습니다, 일기만 써도 참여 가능.' 치앙마이에 도착한 날 밤부터 여기서 보내고 있는 시간이 기억 속 저 멀리 어딘가로 사라지는 것이 두려워서 강박적으로 일기를 쓰고 있었다. 그렇다면 나도 참여할 수 있는 조건을 만족시킨 것이 아닌가. 그렇게 갈까 말까 갈팡질팡 대고민의 시대가 열린 것이다. 심지어 모임 전날까지도 차마 참여 신청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스스로의 우유부단함이 지긋지긋해졌을 때, 호스트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저는 작가 비슷한 것도 아니고, 영어 말하기도 익숙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듣기는 말하기보다 훨씬 잘해서 대화는 대부분 이해할 수 있을 거예요. 꼭 한 번 참여해보고 싶은 데 가도 될까요?' 호스트인 존은 금방 답장을 보내왔다. '당연하죠! 환영합니다, 내일 봐요.' 환영하기까지 한다니 왠지 마음이 조금은 놓였다. 바로 참여하기를 클릭했다.
꿈자리는 뒤숭숭하고 밥은 입으로 들어가는지 코로 들어가는지 모를 판이었다. 참여 신청한 내 오른손 검지 손가락이 원망스러웠다. 대체 무슨 짓을 저지른 거냐며 스스로를 윽박지르다가 괜찮을 거라고 달랬다를 반복하다 어영부영 오전 시간을 다 보냈다. 하필 모임 장소도 숙소에서 넘어지면 코 닿을 거리였다. 좀 더 멀어서 아직 도착하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여유롭게 코워킹 스페이스에 도착했다. 미팅룸 문을 살짝 열어 고개만 집어넣고 몇 명이 있는지 동태를 살폈다. 다행히 1:1 대치 상황은 아니었다. 이미 대여섯 명 정도가 자리에 앉아 맥북을 꺼낸 채로 근황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영어 사용에 대한 긴장감과 호스트와 단둘이 미팅룸에 갇혀 다른 이들을 기다리지 않아도 된다는 안도감이 섞였다.
드디어 내 기준 혀 깨물고 기절하고 싶은 순간 탑 10, 자기소개 시간이 돌아왔다. 고맙게도 존이 부담을 덜어주었다. 어떤 정보를 포함해야 하는지를 먼저 말해준 것이다. 이름, 국적, 치앙마이에 얼마나 머무를 예정인지, 원한다면 오늘 어떤 글을 쓸 것인지를 알려달라고 했다. 존이 자기소개를 한 다음은 바로 내 차례였다. 나는 연습한 내용 중에서 70% 정도를 말했다. 30%의 지분을 차지했던 농담은 역시나 용기가 없어 생략했다. 글쓰기 모임에는 다양한 사람들이 있었다. 미국, 영국, 캐나다, 호주, 스코틀랜드. 영어를 쓰는 국가에서는 웬만하면 한 명씩은 대표로 참석한 것 같았다. 비영어권 국가 출신은 나와 이스라엘 사람밖에 없었다. 치앙마이에서 8-10년 정도는 거뜬히 살고 있는 사람들이 절반은 차지하는 것 같았다. 치앙마이만 대여섯 번을 연거푸 여행 오다가 아예 1년 정도 살러 온 사람도 있고, 방콕에서 일하고 있지만 치앙마이에 쉬러 온 사람도 몇몇 있었다. 태국에 연고 없이 여행 왔는데 온 사람은 나뿐이었다.
국왕 생일과 불교 휴일 때문에 긴 연휴가 예정되어 있었다. 의외로 연휴가 훌륭한 대화 주제가 되어 주었다. 누군가 올드타운에서 종교 퍼포먼스 같은 것이 있을 수도 있다고 하자 각자 준비라도 한 것처럼 태국에 오기 전 거쳤던 국가에서 있었던 종교 퍼포먼스, 신기한 행진 이야기를 주섬주섬 꺼낸다. 내가 캄보디아에 살았을 때는 장례식이든 결혼식이든 7일 밤낮 내내 골목을 다 막아놓고 노래를 틀어댔었어요. 길이 막혀서 집도 마음대로 갈 수 없었다니까요. 아니, 글쎄 나도 인도에 있었을 때 깜짝 놀랐었다니까요. 남자아이들이 성인식을 할 나이가 되면 부모가 아이 등에 고기를 걸어 놓는 고리를 끼워요. 아이들 12명 정도를 그렇게 고리에 껴서 트럭에다가 매달고 행진을 하는 거예요. 아이들은 약에 너무 취해 있어서 고통스러워하지도 않아요. 나는 너무 놀라서 나도 모르게 목소리를 사용하기 시작했다. ‘등에다가 고리를 끼운다고요? 정말 맨 등에다가?’ 문화라는 건 눈에 넣어도 안 아플 자식의 생살을 꼬치처럼 뚫고 매달게도 하는구나. 그런 장면을 실제로 봤을 때의 충격은 정말이지 상상하기 어려웠다. 걱정했던 짧은 스몰톡 시간은 순조롭게 지나가고 조용히 글을 쓰기 시작했다.
나는 치앙마이 시리즈의 초안을 작성했다. 그동안 떠오르는 생각을 아무렇게나 적어놓은 것들을 정리하고 합치고 다듬었다. 집중해서 글을 쓰는 동안 틈틈이 자기비판도 아끼지 않았다. 너는 참 횡설수설, 적당히를 모르는구나. 선을 잘 모른달까. 쭉쭉 써내려 간 초안을 다듬으니 45분 뒤에는 고작 한 문단이 남아 있었다. 이것이 글을 쓰는 세계에서의 나의 생산성이었다. 두 번째이자 마지막 쉬는 시간이 돌아왔다. 글쓰기 모임답게 글을 쓰는 어려움에 대해 이야기했다. 자료 조사 한다고 인터넷 서핑만 하고 아무것도 쓰지 못했어요. 자료 조사라도 했다니 대단하네요. 난 뭘 써야 할지도 모르겠어요. 빈 화면만 보고 있었답니다. 철저하게 검열당하고 난도질당한 나의 짧디 짧은 한 문단이 그렇게 짧아 보이지 않았다. 묘한 위로가 되었다. 아, 이것이 글쓰기 모임의 참맛이구나. 역시 오기를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른 이가 방콕의 시 모임 이야기를 꺼내 미팅룸에 짙게 깔린 좌절감을 환기하려 했다. 그것은 실수였다. 15분 쉬는 시간은 이제 1시간 30분짜리 뜨거운 토론의 장으로 바뀌었다. 그 시 모임의 시스템은 아주 간단했다. 누구나 참여 가능하며 시를 미리 작성해 온 다음 실제 모임에서 낭독하면 되는 것이었다. 몇 년에 걸쳐 시 모임에 참여했던 사람들은 본인의 트라우마를 미주알고주알 이야기하며 소위 시라고 부르는 작자들을 향한 실망과 분노를 감추지 못했다. 치유되지 못한 채 방치되어 온 상처를 '시'라는 이름 하에 밤새도록 들어주는 것의 괴로움에 대해서도 토로했다. 트라우마를 솔직하게 공유했다는 이유만으로 문학 작품이 될 수 없다구욧! 그건 자기 회복이 아니라 나르시시즘이라구욧! 방콕의 시 모임 이야기를 꺼낸 사람은 얼빠진 얼굴로 앉아 있었다. 그녀의 의도는 이런 것이 아니었을 것이다. 나 역시 과열된 분위기에 적잖이 당황했지만 짐짓 괜찮은 척하며 문학과 트라우마 범벅 일기장을 정의하는 기준이 무엇일지 고민에 빠졌다. 좀 전에 내 머릿속을 가득 채웠던 목소리가 또다시 속삭였다. 너는 적당히를 모르는구나. 따끔.
아직도 그 기준은 모르겠다. 무엇이 트라우마를 문학 작품으로 만드는가. 어떤 글이 자기 회복의 도구가 될 수 있는가. 그것을 결정하는 건 누구인가. 역시나 물어볼 걸 그랬나. 그래도 하나 명확해진 것은 세상에는 해보면 별 것 아닌 일이 참 많다는 사실이다. 가기 전에는 다리가 떨리고 과호흡이 와서 공황장애라도 생긴 것인가 싶었는데 다녀오고 보니 그냥 동네 모임이었다. 출간을 한 작가라는 사실은 말해주지 않으면 알 수 없고 서로의 글을 돌아가며 비평하는 시간도 아니었다. 평소 쉽게 나누지 못할 법한 대화 주제를 흥미롭게 들을 수 있어서 심지어 꽤나 재미있었다. 영어도 큰 장애물은 아니었다. 못 알아듣는 말도 없었고 궁금한 건 물어보면 그만이었다. 그러고 보면 금기처럼 보이는 선을 넘어 다른 세계로 일단 들어서는 일이 가장 힘든 것 같다. 해보기도 전부터 겁먹고 할 수 없다고 혀를 내두르는 것. 머리로는 아는데 막상 몸은 움직일 수 없는 오래된 습관. 그래도 그날, 일평생 내 발목을 잡고 늘어져온 습관에 펀치를 한 방 날린 기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