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은 결혼하고 신혼 생활을 즐긴다고 살이 쪘고, (물론 나도 같이 쪘고)
내가 임신을 하자 입덧하는 나를 대신해 먹는다고 살이 쪘고,
내가 출산을 하자 육아 스트레스를 푼다고 또 살이 쪘다.
그러다가 더 이상은 안 되겠다는 것을 자기도 깨달았는지 어느 날 선언했다.
"여보, 나 다이어트할 거야. 나 한약 좀 지어줘."
나는 다이어트로 가장 유명한 한약을 처방해 줬고, 남편은 한약을 먹으며 기특하게도 음식을 잘 참고 절식과 걷기 운동으로 한 달 반 만에 148킬로그램에서 120킬로그램이 되었다.
(친구들은 남편도 출산을 같이 했냐고 물었다.)
그런데 남편이 살이 빠질수록 슬슬 예민해지기 시작했다.
다이어트 한약의 핵심은 마황이라는 한약재다.
마황은 교감신경계를 흥분시킨다.
쉽게 말해서, 초원에서 사자에게 쫓기는 얼룩말을 생각해 보면 된다.
얼룩말은 사자에게서 도망가야 하니까(교감신경 흥분) 소화기능은 현저히 떨어질 것이다(즉, 식욕이 줄게 된다). 그러니까 얼룩말한테 도망가는 것이 중요하지 입맛이 돋는 것은 중요하지 않을 것이다. 또 사자한테 쫓기니까 가슴이 두근거리고, 예민하고, 잠이 잘 오지 않을 것이다.
다시 말해 다이어트한약을 복용하면 식욕이 떨어지고, 불면, 가슴 두근거림 등의 증상이 동반될 수 있다.
그래서 그런지 남편이 살은 빠졌는데 한껏 예민해진 것 같고, 아기를 보는데 밥을 못 먹고 아기를 보니까 힘들어 보이고, 같이 육아를 하는데 힘이 빠지는 느낌이 들었다.
결정적으로, 남편은 밤에 아주 작은 소리에도 예민해져서 잠을 잘 못 자고, 층간 소음이 너무 심하다고 이웃집에 항의를 해야겠다고 그랬다.
(남편이 잘 자고 있는 나를 깨우며)
"여보, 일어나 봐. 들리지. 이 소리. 밤에 무슨 악기를 치나 봐."
아니, 안 그래도 나는 육아하느라 잠이 중요한 사람인데 푹 자고 있는 나를 깨우다니, 나는 화가 났다.
그리고 악기 소리도 들리는 건지 잘 모르겠다. 자세히 들으면 들리는 것 같기도 하고(잠결이라 잘 모르겠다). 아무튼 잠에 방해될 정도는 아니었다.
남편은 그다음 날 낮에 기어코 악기 소리의 근원을 찾겠다며, 이건 드럼소리라며, 위층과 아래층을 방문했다.
씩씩거리며 나갔던 남편이 머쓱해하면서 들어온다.
"위층에 할머니가 사시네. 아래층도 다른 할머니가 사셔. 할머니가 드럼을 연주하실 것 같지는 않은데.."
나는 환청을 듣냐고 놀렸고, 당장 남편의 다이어트 한약에서 핵심 약재인 마황을 빼버렸다. 이제 식욕 억제는 좀 덜 되더라도 이렇게 예민해지지 않을 테고 나도 푹 자고 남편도 푹 잘 것이다.
새로 마황을 뺀, 더 이상 다이어트한약이라고 부를 수 없는, (그냥 소화만 잘 시켜주는) 한약이 왔다. 남편은 아무것도 모른 채 쭉쭉 한약을 들이켜 마신다.
"아, 배고프다. 한약이라도 먹어야지. 먹고 살 더 빼야지."
나는 속으로 뜨끔했지만 아무렇지 않은 척했다. 남편은 약이 바뀌자 더 이상 드럼 소리가 들린다며 나를 깨우는 일이 없었고, 예민해지지도 않고 예전의 다정한 남편으로 돌아왔으며, 나도 푹 잘 수가 있었다.
며칠 뒤 남편이 또 나를 긴장시켰다.
"여보, 148에서 120킬로까지는 금방 왔는데 요즘 115까지 가는 게 왜 이렇게 더디지. 한약 먹어도 식욕 억제가 예전처럼 잘 안돼. 막 먹고 싶어."
나는 뜨끔했다. 다이어트 한약이 진짜구나, 마황의 효과도 절실하게 느꼈다. 아, 대충 플라시보 효과라도 있기를 바랐는데 그럴 수는 없었구나.
"이상하네. 근데 여보 많이 뺐어. 이제 요요 안 오게 관리하는 단계에 도달했나 보지."
나는 당황했지만 들키지 않도록 아무렇게나 얼버무렸다.
그러다 며칠 뒤 결국 들켰다.
사건의 전말은 이랬다.
남편이 살이 하도 많이 빠지니까, 주위 사람들이 나도 그 한약을 먹겠다고 시켜달라고 하였다.
그래서 남편은 자기가 먹은 처방내역을 확인했는데, 알고 보니 마황이 없다는 것을 이제야 깨달은 것이다.
"여보!!!!!! 왜 마황이 없어!!!!
아니!! 어쩐지 잘 안 빠지더라!!
어쩐지
계속 음식 생각이 나고 먹고 싶더라."
나는 철렁했다. 아 들켰구나.
이왕 들킨 것 뻔뻔하게 나가기로 했다.
"내가 대신 오빠 푹 자게 해 줬잖아. 잠 잘 자야지 아기도 같이 잘 보고 일도 잘하지. 그동안 살 많이 뺐어. 이제 유지만 해."
"아니!! 아 어쩐지.
아니!! 마황이 없었다고? 아 그렇다면 난 계속 소화제만 먹은 거구나"
"그래. 맞아. 장이 튼튼해졌을 거야."(난 정말 뻔뻔한 것 같다.)
남편도 진실을 알게 되었고, 그 뒤로 그 한약은 남편이 심심할 때 먹다가 그래도 남아서 양가 어머니분들이 오시면 다이어트 한약이라고 또 뻥을 치고 드리며, 과연 플라시보 효과가 있는지 실험을 또 해보는 재료가 되었다고 한다.
아무튼 남편은 30킬로그램 넘게 뺐고 그 의지에 박수를 보낸다. 나는 아직 모유수유 중이라서 다이어트를 안 하고 있는데, 남편이 내가 단유하게 되면 다이어트를 시켜줄 테니 자기만 믿고 따라오라고 하는데 그 속에 이번 일에 대한 복수의 칼을 갈고 있는 것 같아서 두렵기만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