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I』
630. 신념이란 인식의 어느 한 지점에서 절대적인 진리를 소유하고 있다는 믿음이다. 따라서 이 믿음은 절대적 진리가 존재한다는 것과 그와 마찬가지로 그 진리에 이르기 위한 완전한 방법이 발견되어 있다는 것 그리고 끝으로 신념을 가지고 있는 모든 사람은 이 완전한 방법을 사용한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 이러한 세 가지 진술은 곧 신념을 가진 인간은 학문적 사고의 인간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고 있다. 그는 이론적으로 천진난만한 나이로 우리 앞에 서있고 그 밖의 점에서는 얼마나 성숙해 있든 어린아이에 불과하다. 그러나 수 천년 전체가 그 어린아이 같은 전제들 속에서 살아왔고, 그러한 전제들에서 인류의 가장 강한 힘의 원천이 흘러나왔다. 자신의 신념을 위해 희생했던 그 수많은 사람들은 절대적인 진리를 위해 그렇게 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 점에서 그들 모두는 옳지 않았다 : 아마 아직 어떤 사람도 진리를 위해 자신을 희생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적어도 자신의 믿음에 대한 독단적인 표현은 학문적이 아니었거나 반쯤만 학문적인 것이었으리라. 그러나 근본적으로 사람들은 자신이 정당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정당함을 유지하려고 했다. 그의 믿음이 박탈당하는 것, 이것은 아마 그의 영원한 행복을 의심하게 만드는 것을 의미했으리라. 이처럼 극도로 중요한 문제에서 의지는 너무나 잘 틀리게 지성의 대사를 읽어주는 자였다. 어떤 방향의 어떤 믿음을 가진 사람의 전제도 반박될 수없다. 반대의 이유가 아주 유력한 것으로 입증되었다 하더라도, 그에게는 항상 이성 일반을 비방하고 아마도 불합리하기 때문에 나는 믿는다 라는 극단적인 광신주의의 깃발을 꽂을 수 있는 여지가 남아 있었다. 역사를 그렇게 폭력적인 것으로 만들어온 것은 의견들의 투쟁이 아니라 의견에 대한 믿음, 즉 신념의 투쟁이다. 그러나 만약 자신들의 신념을 그렇게 대단한 것으로 생각했고 모든 형태의 희생을 바쳤으며 그것을 위하여 명예와 몸과 생명을 아끼지 않았던 모든 사람들이, 자신이 어떤 정당성을 가지고 이러저러한 신념에 구속되어 있었으며 어떤 길을 통하여 거기에 이르렀는가에 대한 연구에 그들의 힘의 반이라도 바쳤더라면, 인류의 역사는 얼마나 평화롭게 보이겠는가! 인식된 것이 얼마나 더 많이 존재했겠는가! 이단자를 박해할 때의 모든 종류의 그 잔인한 광경은 두 가지 이유에서 불필요한 일이었을 것이다 : 첫째 이유는 심문자들이 무엇보다도 자기 자신의 내면을 심문했더라면 절대적인 진리를 옹호한다는 자만심에서 벗어났을 것이라는 점이며, 다음 이유는 이단자 스스로가 모든 종파의 신도와 ‘정통 신아교도’의 교의들처럼 잘못 규정된 교의들에 대하여 조사를 하고 났더라면 더 이상 그것에 관여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점이다.(『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I』, 프리드리히 니체 지음, 책세상, 2020. p.442)
우리는 "나는 확고한 신념이 있어"라고 말하는 사람을 멋지다고 생각한다. 흔들리지 않는 믿음은 강인함의 상징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복잡하고 불확실한 세상에서 단 하나의 정답을 알고 있다는 확신은 우리에게 안정감을 준다.
니체에 따르면, 신념을 가진 사람은 세상에는 변하지 않는 '절대적 진리'가 존재하며, 그 진리에 도달하는 '완벽한 방법'이 있고 자신은 '그 방법을 알고 사용하고 있다'라는 전제를 마음 속에 깔고 있다고 한다.
이 생각은 마치 어린아이가 "우리 아빠 말이 무조건 다 맞아!"라고 믿는 것과 비슷하다. 세상은 무수히 많은 관점과 변수로 이루어져 있고 끊임없이 변하는데, 단 하나의 정답만 있다고 믿는 것은 지적으로는 아직 성숙하지 못했다는 증거라는 것이다. 신념에 가득 찬 사람은 더 이상 질문하지 않고, 의심하지 않으며, 배우려 하지 않는다. 이미 정답을 손에 쥐고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는 "학문적 사고"를 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믿음이라는 편안한 요람에 누워 있는 셈이다.
우리는 흔히 인류 역사의 비극이 의견의 차이 때문에 일어났다고 생각하지만, 니체는 역사를 그토록 폭력적으로 만든 것은 단순한 의견 차이가 아니라, '내 의견만이 절대적으로 옳다'는 믿음, 즉 '신념의 투쟁'이었다고 말한다.
수많은 사람들이 종교나 이념을 위해 목숨을 바치고, 또 타인을 해쳤다. 그들은 자신이 '진리'를 위해 싸운다고 믿었지만, 니체는 그들이 사실 '자신의 정당함'을 지키기 위해 싸운 것이라고 꼬집는다. 나의 신념이 무너지는 것은 곧 나의 행복과 존재 가치가 부정당하는 것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내가 틀릴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닫아버린 순간, 타인의 생각은 '틀린 것'을 넘어 '악'이 되고, 대화 대신 화형대와 전쟁이 그 자리를 차지하게 된다. "불합리하기 때문에 나는 믿는다"는 광신주의는 이성이 설 자리를 잃게 만든다.
니체는 만약 사람들이 신념을 지키기 위해 썼던 그 엄청난 에너지의 반이라도 "내 믿음은 과연 정당한가?", "나는 왜 이것을 믿게 되었는가?"를 연구하는 데 썼다면, 인류의 역사는 훨씬 평화로웠을 것이라고 한탄한다.
심문관이 타인을 심판하기 전에 자기 내면을 먼저 심문했다면, 자신이 절대 진리를 대변한다는 자만심에서 벗어났을 것이다. 반대로 이단자 역시 자신의 교리가 얼마나 허술한지 검토했다면, 맹목적인 주장에 목숨을 걸지 않았을 것이다.
확고한 신념은 우리를 편안하게 해주지만, 때로는 진실을 가리는 가장 큰 벽이 되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