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사는 돌아오지 않아도

#11 아기가 열어준 연결의 입구들

by 하니맘
내가 머뭇거리자, 할아버지는 한 번 더 힘주어 엄지를 들어 올렸다.
부정할 수 없었다. 그 엄지는 분명 나를 향한 것이었다.


임신 8개월쯤 되었을 때, 내 배는 정말로 남산만했다. 160cm가 채 되지 않는 내 체구와 대비되어, 내가 봐도 남산을 하나 이고 다니는 사람처럼 보였다.


남산만한 배를 안고 남편과 한강을 산책하던 어느 날이었다. 마주 오던 할아버지가 갑자기 엄지를 치켜세웠다. 순간 당황했다. 뒤에 누가 있나 싶어 뒤를 돌아봤지만, 할아버지의 전방에는 나뿐이었다. 내가 머뭇거리자, 할아버지는 한 번 더 힘주어 엄지를 들어 올렸다. 부정할 수 없었다. 그 엄지는 분명 나를 향한 것이었다.


그날 이후로, 내가 이전에는 거의 느낀 적 없던 종류의 호의가 전해져 오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이유 없이 미소를 보냈고, 아파트 공원에서 운동 중이던 할아버지에게는 또 한 번의 엄지척을 받았다. 지하철에서는 사람들이 기꺼이 자리를 내어주었고, 내게 자리를 비켜주라고 나서서 이야기하는 청년도 만났다. 전에 없이 세상에서 환대받는 기분이었다.


나는 원래 세상과 거리를 두는 사람이었다. 굳이 만들지 않아도 되는 연결이라면, 만들지 않는 쪽을 선택해왔다. 그런데 아기를 갖게 되자, 세상이 먼저 말을 걸어오기 시작했다.


그 환대는 아이가 태어난 뒤에도 이어졌다. 하니는 유난히 인사성이 밝은 아이로 자랐다. 더 어릴 때는 상대를 빤히 바라보며 ‘날 예쁘다고 해라’는 표정을 짓더니, 말을 트고 나서는 먼저 “안녕” 하고 인사를 건넨다. “어른한테는 안녕하세요라고 해야지.” 하면, 고개를 까딱 숙인다.


아이의 인사는 생각보다 강력한 스몰토크의 시작점이었다. 사람들은 대개 하니를 귀여워해주며 아기가 몇 개월인지 물었다. 대화는 종종 예상치 못한 방향까지 흐르기도 했다.
“둘째 생각 있으면 바로 낳으시는 거 추천해요.”
“동네 영어유치원 괜찮은 곳이 있는데요.”
“저희 집에 트램펄린 새로 샀는데 놀러 오세요.”
하니의 인사 하나로, 나는 어느새 오지랖과 호의가 뒤섞인 대화 한가운데 서 있었다.


아이의 인사가 언제나 연결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었다. 종종 하니의 “안녕”을 못 들은 척 지나치는 사람들도 있었다. 바쁜 표정으로 앞만 보고 가거나, 휴대폰 화면에서 눈을 떼지 않는 사람들, 새침한 유치원생, 초등학생 언니들. 그럴 때면 괜히 내가 멋쩍게 웃게 되었다. 그래도 나는 아이를 칭찬한다. “인사 잘하는 하니, 멋져.” 하니가 상대를 계속 바라보며 말을 걸려 하면, 이렇게 말해준다. “하니야, 언니는 지금 혼자 있고 싶나 봐. 그럴 때는 언니가 원하는 대로 해줘야 돼.” 하니에게 말하면서, 나 역시 관계를 배워간다.


연구에 따르면 일상에서 모르는 사람과 나누는 스몰토크는 우리가 이 공동체의 일부라는 감각을 되살려 외로움을 줄이고, 삶의 만족도를 높이는 경향이 있다고 한다. 연결이 닿을 수도 있고 끝내 이어지지 않을 수도 있지만, 하니는 그런 연결의 입구를 내 앞에 수없이 만들어놓은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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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니 덕에 알게 된 사람 중 가장 인상 깊었던 이는 옆 라인의 경비 아저씨였다. 아저씨는 하니를 정말 예뻐해주셨다. 비가 오는 날에도 하니가 나타나면 멀리서부터 경비실 문을 열고 나와 우리를 반겨주셨다. “예쁜 아가씨 어디 가세요?” “모자가 너무 예쁘십니다.” “코가 예술이세요.” 같은 칭찬은 기본이었다. “에고, 어린이집 다녀오시더니 폐허가 되셨네요.” “아침이랑 저녁이랑 왜 이렇게 다르세요?” 같은 농담도 자연스럽게 섞였다. 며칠간 그쪽 라인을 지나가지 않으면 “요즘 왜 안 보이셨어요?” 하고 묻기도 하셨고, 바쁘신 것 같아 그냥 지나가려고 하면 "공주님 신고하고 지나가셔야죠!" 하고 불러세우시곤 했다.


사실 처음에는 조금 부담스럽기도 했다. 지나갈 때마다 말을 걸어오시고, 꼭 불러 세우시니 괜히 동선이 길어지는 느낌이 들기도 했다. 그냥 조용히 지나가고 싶은 날에도 “어디 가세요?”라는 목소리가 들려오면, 반쯤은 가짜 웃음을 지어야 했다. 그럼에도 아저씨의 변함없는 호의에 어느새 나도, 아저씨가 당번이 아닌 날이면 괜히 서운해졌다.


시간이 지나며 알게 되었다. 아저씨의 호의는 하니에게만 향한 것이 아니었다. 몸이 불편한 할아버지, 심심해 보이는 초등학생, 하니 또래의 다른 아이들과도 자연스럽게 이야기를 나눴다. 반대로 바빠 보이는 사람들에게는 짧은 인사만 건넸다. 분리수거를 도와주실 때나, 이중주차가 잦은 아파트에서 차를 밀어주실 때는 늘 친절하고 적극적이었다. 어느새 내 마음이 불편함과 반가움 사이에서 반가움으로 기울었던 데에는, 상대를 가늠해 다가가는 아저씨의 섬세함이 있었던 것이다.


그러던 어느 겨울날, 그 경비 아저씨가 보이지 않기 시작했다. 대신 다른 아저씨가 그 자리를 채우고 있었다. 그만두신 걸까, 아프신 걸까, 휴가일까. 별생각이 다 들었다. 우리에게는 지나갈 때마다 신고하라 하시더니, 말도 없이 가셨네. 서운함도 남았다. 어디에선가 그 아저씨가 특유의 긍정 에너지를 그대로 간직한 채 건강하고 행복하게 지내고 계시길 바란다. 그간 따뜻한 음료 한 잔 사드리지 못한 게 자꾸 마음에 남는다. 대신 나는 새로 온 경비 아저씨에게 조금은 어색하게 인사를 건넨다. “안녕하세요?” 다행히 새로운 아저씨는 반색하며 인사를 받아주셨다.


하니는 나와 세상이 조금 더 가까워지게 만들었다. 그리고 나는 이제 안다. 연결이 항상 이어지지는 않는다는 것, 그럼에도 인사는 계속되어도 된다는 것을. 그렇게 나는, 아이와 함께 다시 인사를 건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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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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