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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어떤 날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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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인애 Oct 04. 2018

딱 자두 네 알 정도의 사치

나에게 만족스러운 순간들

내가 자란 집은 언제나 과일이 떨어지는 법 없는 장소였다.(지금까지도 계속해서)


주에 한 번 정도 트럭에 과일을 가득 실은 과일장수 아저씨가 집 앞으로 찾아왔고, 우리 가족은 과일을 사거나, 질은 좋지만 아직 팔리지 않아 빨리 처분해야 하는 과일을 얻어먹거나 했다. 아니면 나무에 달린 것들을 따먹었다. 산기슭의 산딸기, 집 뒤편에 자라던 앵두나무, 남의 집 담장을 넘어 뻗어 자라던 살구나무, 길가의 대추나무, 우수수 떨어지던 오디 같은 것들을. 어느 계절이던 사과는 꼭 있었고 계절에 따른 그 밖의 과일들이 냉장고의 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었다.


집을 떠난 이후에도 그 습관은 유전처럼 이어져 어떤 과일이든 하나 이상의 과일을 언제든지 꺼내 먹을 수 있는 상태로 유지해야 안심한다. 냉장고 안에 고기 한 점 없더라도 과일은 꼭 있는 편이 좋다. 여름은 복숭아와 자두, 살구의 계절. 그것만으로도 어느 정도의 가치가 있다. 목련 꽃잎이 떨어지는 모습을 보고 그제야 봄이구나 생각하는 것처럼, 자두를 팔기 시작하면 여름이구나 생각한다. 나는 그렇다. (가을은 무화과로부터 시작된다. 무화과를 팔기 시작하면 곧 가을이다. 겨울이 오면 공기의 냄새가 바뀐다. 겨울의 공기는 어떻게 그렇게 겨울 같은지.)


오랜만에 마을버스를 타지 않고 걸었다. 올해의 봄부터 초여름 사이 숱하게 많이 걸었던 길이다. 그 길에서 흩날리는 벚꽃을 보고, 쏟아지는 비를 맞고, 가로등 아래 흔들거리는 나뭇잎을 바라보며 두 계절 정도를 걸었다. 여름이 무르익은 어느 시점부터는 비가 너무 많이 와서인지 너무 심하게 더워서인지 내가 지쳐서인지 한동안 걷지 않았다. 아 퇴사를 해서인가. 그러고 보니 퇴사를 해서 매일 같은 길을 걸을 이유가 사라졌다. 여유롭고, 그만큼 더 가난해진 나는 오랜만에 그 길을 걸었다. 오랜만의 (구)퇴근길은 가을이었다. 가을의 밤공기를 맞으며 이어폰을 귀에 꼽고 음악을 크게 틀고 밤길을 어슬렁 걸었다. 쭉 걷다 보면 나오는 사거리 코너에는 과일가게가 있다. 과일가게가 반가워 과일들을 유심히 들여다보았다. 나는 자주 그곳에서 과일을 사들고 초록불이 깜박거리는 횡단보도를 급하게 건너곤 했다.


(C) 2018. HanInae. All rights reserved. ㅣwatercolorㅣ자두 네 알


‘자두 네 알에 오천 원.’


보통 먹었던 아기 주먹만 한 자두가 아니라 다 큰 어른의 주먹만 한 자두 네 알. 얼마 전 여행 중의 시장에서도 그만한 자두를 봤다. 그만큼 커다란 자두는 여름이 아닌 가을을 제철로 한다는 사실을 그때는 몰랐다. 아무튼 그때도 그 자두를 오래 바라봤는데 결국 사지 않았었다. 여기는 거기보단 싸다. 과일을 살 때도 항상 가장 저렴한 종류의 과일로 나름의 고심을 통해 구매하기 때문에, 오천 원과 고작 네 알의 자두를 맞바꾸는 건 사치 아닌가 싶었다. (크기와 상관없이)그래도 역시 먹고 싶었다.


이런 작은 일에 깊은 고민을 하는 내가 바보 같기도 하다. 커피 한 잔에 육천 원도 칠천 원도 쓰면서 자두 네 알에 오천 원은 못 쓸 이유가 뭔가. 그래도 왠지 모르게 과도한 사치처럼 느껴지는 일이 있다. 그래도 자꾸만 시선이 갈 경우엔 결국 이렇게 생각한다. 오늘은 나에게 딱 자두 네 알 정도의 사치를 허락한다고. 이 자두 네 알이면 평소보다 더 깊은 만족감을 느끼면서 오늘을 마무리할 수 있을 것이라고. 그래서 나는 검은색 비닐봉지에 든 자두 네 알을 손에 쥐고 집에 돌아온 참이다. 움푹 파인 접시에 담아 곁에 두고 글을 쓴다.


생각만큼 만족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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