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기로 병원에 다녀온 날, <장송의 프리렌>을 샀다.
프리렌의 시간 개념과 느린 감정선이 꼭 나를 보는 것 같아서.
(물론 나는 천년을 산 엘프 프리렌은 아니지만.)
"하지만 난 이 사람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르고...
고작 10년 함께 여행했을 뿐이고...
인간의 수명이 짧다는 걸 알고 있었으면서...
왜 좀 더 알려 하지 않았을까..."
- <장송의 프리렌> 중에서 -
"평생을 함께하자."
그래서 그리 될 줄 알았다.
하지만 그와 나의 '평생'은 너무나 짧았다.
그의 군대는 고작 2년, 그의 해외 연수는 채 1년도 되지 않았고,
내 뉴욕은 4년, 런던·LA·토론토·홍콩은 모두 1년도 안 되는 시간들이었다.
우리가 함께했던 시간은, 앞으로 함께할 날들 중 고작 9년이었다.
헤어지고 나서야 알게 되었다.
나는 그에 대한 기억이 없다는 것을.
그가 무얼 좋아했는지, 어떤 음식을 즐겼는지, 어떤 사람인지조차 모른다는 사실을.
MBTI 같은 언어로도 설명할 수 없을 만큼, 그가 E인지 I인지조차 여전히 알 수 없다.
물론 어렸기에, 사람은 변하기에, 좋아하는 것들도 바뀌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가 내게 "한국에 없는 동안 다른 누군가를 만나 마음이 변했다"고 했을 때,
나는 그를 낯설게 느꼈다.
"도대체 이 사람 누구지?"
기억나는 것은 단 하나,
상냥한 사람이었다는 것
내가 잘되기를 진심으로 응원해주었다는 것
그렇게 내게 참 잘해주었다는 것
다들 그와 나를 두고 참으로 잘 어울리는 커플이라고 했지만,
나의 가장 가까운 친구였던 내 생에 마지막 베프였던 남자사람친구는 이렇게 말했다.
"그는 그런 사람이 아니야. 단지 너와 함께 있기 때문에, 네가 바라는 모습을 하는 것뿐이야."
그때는 그 말이 무슨 뜻인지 몰랐다.
작은 오빠는 담담하게 말했다.
"너희는 연애 기간은 길었어도 함께한 시간은 많지 않으니 다행이네.
곧 잊혀질꺼야"
그 말도 이해하지 못했다.
헤어지기 전 그는 말했다.
넌 나를 좋아하는 게 아냐.
너를 사랑하는 나를 좋아하는 것 뿐이야.
그 말을 들었을 때는 왠 말장난인가 싶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 깨달았다.
그는 현명한 사람이었다.
자기 자신을 알고, 자신의 감정에 충실했다.
오랜 관계를 정리하고, 새로운 관계를 향해 나아갈 용기를 가졌다.
그래서 내가 한국에 돌아왔을 때,
그와 나를 기억하는 사람들에게 나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그에게 고마워."라고
그들은 내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뭔 헛소리냐고 했다.)
하지만 나는 안다.
나는 나를 찾는 데는 그보다 앞서 있었을지 몰라도,
타인을 알아가고 관계를 일구는 데 있어서는 그보다 한참 뒤쳐져 있었다는 것을.
그의 말은 맞았다.
나는 그를 좋아하는 게 아니었다.
나를 사랑하는 그를 좋아했을 뿐이었다.
참 재미있어.
그 100분의 1이 너를 바꾸었으니 말이야.
- <장송의 프리렌> 중에서 -
고작 9년 함께했을 뿐인 그와의 시간의 끝은 나를 바꾸었다.
그 관계의 끝은 내게 커다란 교훈을 주었다.
먼저 나 자신을 온전히 좋아할 수 있는 사람이 될 것.
상대를 있는 그대로 보고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이 될 것.
상대와 함께 관계를 만들어가며 그 과정을 즐길 것.
그것이 나에게 맞는 사랑이고, 연애라는 것.
헤어짐은 나에게 소중한 교훈을 남겼고,
돌이켜보고 싶은 기억을 소중히 여기는 법을 가르쳐 주었다.
그 기억을 더 향기롭게, 더 아름답게 만들어가고 싶다는 바람도.
그래서 나는 말한다.
"삶의 마지막 날, 돌이켜보고 싶은 추억을 만들어가자." 라고
돌이켜보고싶은 소중한 기억을 많이 만들고 싶은 건
그 때 그 헤어짐 덕분이다.
그리고 그것이 내가 향수를 통해 기억과 감정을,
생에 마지막 날 돌이켜보고픈 추억을 향기롭게 만들어가자고 말하는 이유이다.
그리고 이제는 절절하게 안다
인간의 삶은 너무도 짧고
삶의 시간은 저마다 다르기에 살아있는 지금을 충실히 살아야 함을.
오늘은 어제 세상을 떠난 이들이 그토록 바란 내일이니까.
나는 내 감정에 충실하게 살고자 한다.
그래서 내가 알아나가고싶은 사람을 만나려 한다.
그런 나를 존중하고 고마워할 수 있는 다정한 사람을 만나려 한다.
나 역시 그런 사람이 되려한다.
성숙한 사랑을 하기 위해 노력하려 한다.
그리하여 함께하는 일상이 기억하고 싶은 시간이 되게하고 싶다.
고작 9년의 시간이 있었기에 갖게 된 그 이별이 내게 준 큰 가르침이니까
삶의 마지막 남는 건 결국 '사랑'이다.
애정하는 문구가 떠오른다.
“내가 진실로 한 사람을 사랑한다면,
나는 모든 사람을 사랑하고,
세계를 사랑하고,
내 삶을 사랑하게 된다.
내가 누군가에게
‘나는 당신을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다는 것은,
‘나는 당신을 통해 모든 사람을 사랑하고,
당신을 통해 세계를 사랑하고,
당신을 통해 나 자신까지도 사랑한다‘고 말하는 것과 같다.”
에리히 프롬(Erich Fromm, 1900-1980)
내가 모은 마법을 칭찬해준 바보가 있었어.
그뿐이야.
시시한 이유네요.
그렇지.
힘멜 님을 위해서인가요?
아니. 분명 나 자신을 위해서야.
- <장송의 프리렌> 중에서 -
끝난 다음에 시시했다며 웃어넘길 수 있을만큼 즐거운 여행을 하고 싶어.
- <장송의 프리렌> 중에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