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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임제나 Nov 13. 2021

서른 즈음에

일부

이제 서른을 맞이하는 내 인생이 어쩌다 이렇게 흐르게 되었는가-에 대한 고찰을 시작하며 어디서부터 이야기를 시작해야할까 고민해본다.


사람 마음이 참 간사한 게 20대를 보내는 동안에는 아무리 많은 사람들이 30이라는 나이가 젊고 시작하는 나이라고 말해도 내가 맞이하게 될 서른은 어느 정도 틀을 갖춘 완숙의 상태일 것이라고 생각해왔는데 막상 서른을 맞이하려고 보니 서른이란 아직 한참 아기이고 가능성이 무궁무진한 상태를 가리키는 것 같다고 생각한다.


어쨌든- 내 인생의 실패들을 하나씩 기록하기 전에 한 번 쓱 돌아보고자 한다


고등학교 때 ‘시크릿’이라는 책을 처음 읽고 나서는

‘정말 내가 상상하는 대로 인생이 이루어진단 말이야?’ 라는 생각에 설레며 그렇담 나는 앞으로 어떤 인생을 살고 싶은지 진지하게 고민해보며 미래의 내 모습을 그려보곤 했다


그 당시 내 우상은 앤디 워홀이었다.

내가 가장 좋아했던 일화 중 하나는 앤디 워홀이 고급 레스토랑에서 식사를 하고는 계산을 하려고 했는데 알고 보니 지갑을 집에 두고 온 것이었다

앤디 워홀은 대신 식탁보에 사인을 해주었고, 식당에서는 영광이라며 식사값 대신 사인을 식당에 걸어두었다고 한다.


사람들이 사랑하는 작품을 만들고

부자가 된 사람,

많은 사람들이 부러워하는 사람


매일 밤 나에게는 꿈처럼 멀리 있는 것만 같은 미래를 구체적으로 그려보려 노력하며 상상했다


‘나는 부자가 될 거야’

‘나는 영향력 있는 사람이 될 거야’

‘나는 인정받는 사람이 될 거야’


이 당시 웃긴 일화 중 하나는 시크릿에서 구체적으로 꿈을 꾸어야한다고 해서 나는 (당시 빅뱅 탑의 열혈 팬이었으므로) 탑과 열애설이 난 유명 소설 작가로 괌에서 비밀 데이트를 마치고 귀국하던 순간에 우리의 비밀 연애를 눈치챈 기자들에게 둘러싸여 손에 들고 있던 루이비통 가방으로 황급히 얼굴을 가리는데, 네이버 인기검색어 1위에 내 이름과 내가 들고 있는 루이비통 가방이 (구할 수 없는 한정판 신상이다) 동시에 오른다는 상상을 매일같이 했던 것이다. 너무 매일같이 상상을 하는 바람에 현실이라고 믿어질 즈음에 나는 이 상상을 너무 당연하게 가족들 앞에서 곧 이루어질 목표라며 발표해 몇 년간(어쩌면 지금까지도) 재밌는 놀림거리가 되었다.

려원 님의 사진인데 대략 이런 나의 모습을 상상했던 것이다


그렇게 나는 내 나름의 목표를 구체적으로 상상하며 달려왔는데 지금까지의 내 인생을 돌이켜보며 생각해보면 시크릿은 생각보다 잘 이루어지기도 하고, 때로는 잘 안 이루어지기도 하는 것 같다. 아직 내가 끌어당김의 법칙을 제대로 못 다루는 것일지도 모르고 아니면 내가 뭐가 되고 싶은지를 아직 제대로 뚜렷하게 정하지 못했기 때문에 그런 것 같기도 하다.


어렸을 때부터 나는 공부를 잘 했던 편도 아니고 막상 눈에 띄는 편도 아니어서 뭘 해야 살아남을 수 있을지를 꽤나 진지하게 고민했던 것 같다. 왜냐면 또 그 와중에 욕심은 많았기 때문이다.


초등학교 때 반에서 칠공주라며 가장 활발하게 활동하는 무리에 어떻게 저떻게 속하긴 했지만 성격이 쎈 옥정이와 예뻐서 남자애들에게 인기가 많은 미지, 성격이 좋아 두루두루 인기가 많은 지숙이와 다애, 까불거리는 지은이 그 사이에 나는 애매한 역할 같았다. 웃기는 짓을 하자니 막상 그렇게 호탕하게 웃기는 성격도 아니고 착하고 상냥하자니 막상 속에는 이기적이고 못된 기질이 있었고 그렇다고 아예 못되게 굴자니 순진하고 어리숙한 면이 있었다


엄마는 아직도 낯을 붉히며 초등학교 때의 나를 회상하며 비웃는데 ‘무대만 보면 뛰쳐나가서 부르지도 못하는 노래를 혼자 씩씩하게 부르고 내려왔다’며 가족들을 부끄럽게 만들기도 했다.


끼라고는 전혀 없는데 눈에 띄고 싶어하는 나에게 ‘글’은 적성에 곧잘 맞았다. 게다가 매일 상상하는 걸 좋아하는 나에게 글은 내 상상력을 마음껏 펼치기에 좋은 무대였다.


그렇게 글 전공으로 예술고등학교에 진학하게 되고,

서울예술대학교에 입학하게 된다.


돌이켜보면 그 과정에서도 나름의 치열한 경쟁들이 있었는데 내가 살아남는 방식은 단지 내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을 활용해서 나름으로 치열하게 살아남는 법을 고민하는 것이었다.


내 대학교 학점은 창작 수업은 A

이론과 교양 과목들은 D~F로 구성되어 있는데

어차피 모든 과목을 다 잡지 못할 거라면 창작 수업에 올인하자는 전략이었고, 어정쩡하느니 아예 망쳐 헛소리라도 해야 교수님들 눈에도 띌 것이라는 생각이었다. 글 실력으로만 승부를 보기에는 잘 쓰는 친구들이 세상에는 너무 많았고, 나이 많은 언니 오빠들이 재수 삼수를 하고 들어와 워낙 치열하게 하는 바람에 수석이나 이런 것들은 승산이 없다고 생각하는 것도 있었다.

지금 돌이켜보면 ‘나는 못하는 게 아니라 안 하는 거야’같은 변명을 만들기 위한 비겁한 전략이었던 것도 같다. 어쨌든 나는 나름의 전략으로 남은 대학 생활은 동아리에 몰두하기로 했다.


서울예술대학교의 1대 동아리 예대민속연구회는 학교에서는 나름 전통이 있고 가장 빡센 동아리라는 인식이 있어서 학교에서도 독하다거나 세다는 사람들이 주로 함께 하는 곳이었다. (이해하기 쉽게 설명하자면 동아리 선배로는 류승룡 배우님과 라미란 배우님이 계신다.)


대학교 때도 입버릇처럼 했던 말은

‘이것만 버티면 나는 강해져서 곧 부자가 될 거야’

‘앤디워홀 같은 예술가가 될 거야’ 하는 말이었고, 내 나름으로는 학교에서 가장 강한 1%에 들면 그래도 성공할 가능성이 높아지는 게 아닐까 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대학교 축제 때 방문한 수많은 성공한 동문 분들을 보면서 동기들에게 ‘우리도 곧 저렇게 될 거야 내가 도와줄게!’하고 장담하며 말하곤 했다. 그럴 때마다 동기들은 제 나름의 컨디션에 따라 ‘그래 고마워~약속 꼭 지켜라’거나 ‘헛소리 좀 그만 하라’는 핀잔을 주기도 했다.


대학교 때에는 나 스스로도 그렇지만 함께 어울리는 동기들에 대한 자부심이 상당해서 필드에 바로 뛰어들어도 손색 없을 만큼 끼와 재능이 많은 친구들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당장에라도 세상을 우리 판으로 만들고 싶은 열정으로 가득했는데 막상 졸업하고 보니 뭘 어떻게 해야할 지 몰라 어설픈 상태가 되었다. 겉멋만 잔뜩 들어 합정역 카페에 둘러앉아 기형도 시나 읊조리면서 하염없이 시간만 축내는 꼴이 되었고 문득 이 장면이 영화 속 한 시퀀스라면 분명 ‘청년들의 암울한 미래를 암시하는 복선’일 것이라는 생각이 드는 순간이 찾아왔다


그래서 이 반복되는 무의미한 일상에 뭔가 깨달음이 필요할 것 같아 무작정 절을 찾아 들어갔는데 이것저것 정보를 찾아보니 절에는 ‘보살’님으로 활동하며 돈을 버는 사무직 일자리를 구할 수 있었다. 그렇게 무턱대고 경주에 있는 골굴사에 들어가 스님들 차를 준비하고 보시하러 오시는 손님들을 응대하는 일을 하게 되는데, 어떻게 보면 그것이 내 첫 일자리다.


절에서의 하루 일과는 절이 산을 두고 상당히 넓게 펼쳐져 있었는데- 새벽 4시에 일어나 산에 올라 동굴에 있는 굴사에서 108배 기도를 드리고, 스님들 아침 차담을 준비하고 아침 식사를 하러 산 아래로 40분 정도를 걸어 내려간다. 밥을 먹고 다시 산을 올라 산 중턱에 있는 사무실에서 엑셀이나 정산 업무를 보고 11시쯤 되면 다시 산을 내려가 점심을 먹고 또 산을 올라 사무실에서 오후 차담을 준비하고 또 산을 내려가 저녁을 먹고 선무도 무예를 익히고 여덟 시쯤 잠에 들었다.


지금 생각하면 ‘루틴’한 삶을 살며 좋은 습관을 익힐 수 있는 기회였을 것 같기도 한데, 열정과 투지가 넘쳤던 그 당시에는 그것이 매우 지루하고 답답한 일상일 뿐이었다. 그 당시 절에서 내가 배운 것은 세상 쉬운 것이 하나 없다는 것이었는데 대학교 때 밤새 연극 연습하고 하는 것도 힘들었지만 매일 고요하게 똑같은 일상을 반복하며 사는 것도 역시나 고역이고 힘들다는 것이었다. 심지어 나에게는 차라리 반복되는 일상이 더 힘들었다. 그렇다면 차라리 돈을 벌면서 힘들게 살자는 생각을 하게 되었고, 그 길로 절을 나와 취직을 하게 된다.


일자리를 구하는 것은 생각보다 쉬웠는데, 당시 채널 A의 먹거리X파일 프로그램은 작가들 사이에서도 힘들고 까다롭기로 소문이 나 지원자가 많이 없었다. 내가 다니던 중에도 한 달 동안 7명이 들어왔다 그만두었는데 방송작가를 꿈꾸던 친구들이 들어와 막상 마주하는 환경이 생각과 달랐던 것 같다


첫째, 외주였기 때문에 작은 사무실이 막상 상상하던 방송국 환경이 아니었다는 것

둘째, 하는 일이 상상했던 작가의 프로페셔널한 모습이 아니라 매일같이 네이버 블로그와 카페를 뒤적거리며 불만 글을 찾아내는 단순 업무였다는 것

셋째, 월급이 상당히 적고 그에 반해 근무시간 외에 잠입 취재라든가 하는 비윤리적인 일까지 해야해서 일에 대한 프라이드를 갖기 어렵고 힘들다는 점


등이 그만둔 이유이지 않을까 싶다. 게다가 일을 처음 하는 신입으로 온 친구들이 잘리는 경우도 더러 있었는데 서툴다고 해서 누군가를 시간을 들여 가르치고 키워줄 여력이 있는 곳이 아니었다 대학교에서 버티는 것도 힘들었는데 돈을 벌면서 버티는 일은 더 쉽지 않은 일이라는 걸 실감한 순간이었다


나 역시도 ‘여기서 더 버틸 수 있을까’ 싶던 순간에 대만 카스테라 편이 이슈가 되며 프로그램이 사라지게 되었다 (나는 대만 카스테라 편 작가는 아니었다) 방송작가는 프로그램 시즌에 따라 주로 3개월에서 6개월 사이에 프로그램을 옮겨다니게 되는데 중간에 프로그램이 붕 뜨게 되어 어정쩡한 시기가 찾아왔다


 순간 운이 좋게도 마침 tvN 본사에서 급작스럽게 프로그램 작가가 그만두는 일이 생기며 t.o 생겼다 급하게 공고에 지원을 하게 되었는데 프로그램에서도 급했던 모양이라 지원하자마자 전화가 왔다. 먹거리 x파일 팀에서 꽤 오래 활동한 것도 다른 작가들에 비해 좋은 인상을 남긴 듯했다. (들어가고 보니 이곳 역시 작가들 사이에서 꽤나 힘든 난이도로 평가받는 곳이었다.) 작가님이 ‘우리 프로그램에 대해 알아요?’하고 물었는데 나는 사실  프로그램을 보지 않았었고  몰랐기 때문에 대답을 제대로 하지 못해 언짢은 반응을 끝으로 연락을 마무리하게 되었다. 그래도 기왕 방송 작가로 일을 시작한  방송국  가장 떠오르는 tvN 본사에서 일을 하게 된다는  엄청난 기회인데 이렇게 놓칠 수는 없었다. 연락이 끊긴 다음 바로 나는 급하게 방송들을 다섯  정도 꼼꼼히 챙겨보았고  나름으로 프로그램을 분석한 내용을 담아 메일로 보냈다. 다음  아침, 메일을 확인하고  분석이 꽤나 재밌었다며 연락이 와서 나는 바로 tvN 입사하게 되었다!

(방송작가는 본사 작가라고 해도 정규직은 아니다 지금은 잘 모르겠지만 그 때는 그랬다)


글이 너무 길어져 2부로 나눠서 적어야겠다.

일부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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