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그리트 뒤라스, 기억을 다시 쓰다
어떤 기억은 한 번 쓴다고 끝나지 않는다.
1950년, 서른여섯의 뒤라스는 자전적 소설 한 편을 발표한다. 《태평양을 막는 방파제》. 프랑스령 인도차이나에서 보낸 유년기, 미쳐가는 어머니, 폭력적인 큰오빠, 식민지의 열기. 그 안에서 자라난 소녀의 이야기. 소설은 나쁘지 않았다. 평단은 주목했다. 그러나 뒤라스 자신은 알고 있었을 것이다. 이 글이 자기가 겪은 것의 전부를 담지 못했다는 것을.
34년이 지난다.
1984년, 일흔의 뒤라스가 《연인》을 쓴다. 같은 기억이다. 같은 메콩강, 같은 어머니, 같은 오빠, 같은 소녀. 그런데 문장이 완전히 다르다.
젊은 뒤라스는 설명했다. 어머니가 왜 미쳤는지, 오빠가 왜 폭력적인지, 소녀가 왜 중국인 남자의 차에 탔는지. 원인과 결과가 있었고, 서사가 있었고, 이해 가능한 순서가 있었다. 소설의 문법으로 기억을 정돈한 것이다.
늙은 뒤라스는 보여주기만 한다.
메콩강을 건너는 나룻배 위에서 소녀가 서 있다. 남자의 손이 떨린다. 방 안은 어둡고 밖에서 거리의 소음이 들린다. 어머니는 자식들 앞에서 벽을 향해 운다. 오빠는 식탁에서 동생의 음식을 빼앗는다. 왜인지는 쓰지 않는다. 어떤 기분이었는지도 쓰지 않는다. 장면만 놓는다. 그 장면 사이의 빈 공간을 독자가 자기 숨으로 채우게 한다.
34년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뒤라스는 그 세월 동안 기억을 잊은 게 아니다. 오히려 기억이 변한 것이다. 처음 쓸 때는 기억이 하나의 이야기였다. 인과가 있고, 감정이 있고, 교훈이 있는. 두 번째 쓸 때는 기억이 장면들의 모음이 되어 있었다. 순서도 없고, 이유도 없고, 그저 선명하기만 한 장면들. 어머니의 등. 남자의 손. 방 안의 빛.
트라우마 기억이 원래 그렇다. 처음에는 이야기로 정리하려 한다. 누구 때문에, 무엇 때문에, 그래서 어떻게 되었는지. 그래야 견딜 수 있으니까. 그런데 시간이 흐르면, 이야기는 부서지고 감각만 남는다. 냄새, 빛의 각도, 피부에 닿았던 공기의 온도. 기억이 아니라 몸이 기억하는 것들.
뒤라스의 어머니는 프랑스 정부에 속아 캄보디아의 바닷가 땅을 샀다. 매년 밀려오는 태평양의 조수가 농지를 삼켜버렸다. 어머니는 방파제를 쌓았다. 맨손으로, 현지인을 고용해서, 빚을 내서. 바다는 매번 그걸 무너뜨렸다. 어머니는 다시 쌓았다. 또 무너졌다. 어머니는 미쳐갔다.
젊은 뒤라스는 이 장면을 어머니의 비극으로 썼다. 식민지 관료제의 부조리, 가난의 구조, 한 여자의 저항과 좌절. 서사였다.
늙은 뒤라스는 《연인》에서 어머니의 방파제를 거의 쓰지 않는다. 대신 어머니가 벽을 보고 앉아 있는 뒷모습을 쓴다. 한 줄. 그 한 줄이 방파제 전체보다 무겁다.
설명을 거둬낸 자리에 남는 것이 문학이다.
이것이 같은 기억을 두 번 써야 하는 이유다. 첫 번째 글은 살아남기 위해 쓴다. 기억을 정리하고, 이름을 붙이고, 서랍에 넣기 위해. 두 번째 글은 그 서랍에서 다시 꺼낼 용기가 생겼을 때 쓴다. 그때는 이름표가 필요 없다. 감각만으로 충분하다. 읽는 사람이 자기 안의 감각과 만나도록 놓아두면 된다.
뒤라스는 《연인》으로 공쿠르상을 받았다. 일흔 살에. 서른여섯에 쓴 같은 이야기로는 받지 못한 상을, 34년 뒤에 받았다. 문장이 달라져서가 아니다. 기억과의 거리가 달라져서다. 가까이 있을 때는 설명해야 했고, 멀어진 뒤에는 보여주기만 해도 되었다.
어쩌면 글을 쓴다는 건, 같은 기억 앞에 몇 번이고 다시 앉는 일인지도 모른다. 처음에는 울면서, 다음에는 떨면서, 그다음에는 가만히. 가만히 앉아서 그 기억이 스스로 말하게 놓아두는 일. 그것이 되기까지 34년이 걸릴 수도 있고, 더 걸릴 수도 있다. 중요한 건 시간이 아니라, 다시 앉았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