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치의 해부학

아니 에르노, 같은 일요일을 평생 쓰다

by 응시

"아버지가 어머니를 죽이려 했다. 6월의 어느 일요일, 이른 오후였다."


아니 에르노의 《수치》는 이 한 문장으로 시작한다. 1952년, 열두 살. 아버지가 낫을 들었다. 어머니를 향해. 소녀는 울었고, 아버지는 말했다. "너한테는 아무것도 안 했잖아."


그 뒤 가족은 자전거를 타고 나갔다. 가게 문을 다시 열었다.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그러나 열두 살의 소녀에게는 모든 것이 달라졌다. 놀아도, 읽어도, 평범하게 행동해도 — 자기가 거기에 없었다고 에르노는 쓴다. 몸은 있지만 자기는 없는 상태.


수치가 들어온 것이다. 그리고 수치는 나가지 않았다.


수치는 특이한 감정이다. 슬픔은 운다. 분노는 폭발한다. 공포는 도망친다. 그런데 수치는 — 숨는다.


수치를 느끼는 사람은 자기가 수치를 느끼고 있다는 사실 자체를 숨긴다. 아프다고 말하지 못한다. 아프다고 말하는 것이 또 하나의 수치가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수치는 이름이 없는 채로 몸 안에 산다. 이유를 모른 채 고개를 숙이고, 이유를 모른 채 목소리가 작아지고, 이유를 모른 채 사람들 앞에서 사라지고 싶어진다.


에르노는 수십 년 동안 이 상태로 살았다. 수치의 이름을 몰랐다. 그냥 "나는 남들과 다르다"라고 느꼈다. 우리 집은 남들과 다르다고. 아버지가 하는 일이, 어머니가 쓰는 말이, 우리가 먹는 것이, 우리가 사는 동네가 — 부끄럽다고. 그 일요일이 있기 전부터 이미 있었던 하층 계급의 수치 위에, 그 일요일의 수치가 덧쌓인 것이다.


이 상태에서 글을 쓸 수 있을까. 쓸 수 없다. 적어도 바로는.


에르노가 처음 글을 쓴 것은 서른넷이었다. 《빈 옷장》이라는 소설. 자전적이었지만 소설의 형식을 빌렸다. 등장인물을 만들고, 이름을 바꾸고, 서사를 만들었다. 자기 이야기를 다른 사람의 이야기인 것처럼 포장한 것이다.


왜 소설이었을까. 수치를 직접 꺼내놓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인물 뒤에 숨으면, 수치가 나의 것이 아니라 그 인물의 것이 된다. 한 겹의 가림막. 그래야 쓸 수 있었다.


그런데 에르노는 이 소설을 쓰고 나서, 오히려 더 불편해졌다.


소설의 문법이 문제였다. 소설은 장면을 만들고, 인물에게 감정을 부여하고, 서사를 완성한다. 그 과정에서 기억이 "아름다워진다." 잘 쓸수록, 다듬을수록, 기억이 원래의 형태에서 멀어진다. 노동자 계급인 부모의 삶이 — 서재에 앉아 쓰는 딸의 문장 안에서 — 문학적 대상이 되어버린다.


에르노는 이것을 배반이라고 느꼈다. 잘 쓰는 것이 진실을 배반하는 일이 될 수 있다는 것을.


그래서 에르노는 소설을 버렸다.


에르노가 소설을 버리고 쓴 첫 번째 책이 《한 남자의 자리》다. 아버지에 대한 글이다. 그런데 이 글에는 소설의 흔적이 없다. 인물이 없다. 서사가 없다. 감정이 없다. 있는 것은 사실의 나열이다.


아버지가 무슨 일을 했는지. 어떤 말을 했는지. 어떤 음식을 먹었는지. 가게에서 손님을 어떻게 대했는지. 에르노는 아버지를 묘사하지 않는다. 설명하지 않는다. 그냥 기록한다. 마치 민속학자가 사라져 가는 마을을 기록하듯이.


에르노 자신의 표현이 이것을 말해준다. "아름답게 쓰는 것, 학생들에게 가르치던 바로 그 글쓰기를 부숴야 했다."


잘 쓰는 것을 부수는 것. 이것이 에르노가 찾은 방법이다.


잘 쓰면 기억이 포장된다. 감동적인 문장은 독자를 울리지만, 그 울음이 기억의 진실을 대신해 버린다. 에르노가 원한 것은 독자의 울음이 아니었다. 기억의 정확한 형태였다. 형태가 남으려면 장식을 걷어내야 했다.


이것이 뒤라스와 에르노의 갈림길이다. 뒤라스는 설명을 거둬내고 감각을 남겼다. 에르노는 감각마저 거둬내고 사실만 남겼다. 뒤라스의 방법이 "보여주기"라면, 에르노의 방법은 "놓아두기"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전환이 일어난다.


사실만 남기고 감정을 걷어냈더니 — 오히려 감정이 더 선명하게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아버지가 가게에서 손님에게 존댓말을 쓰는 장면. 에르노는 이 장면에 감정을 붙이지 않는다. 그냥 쓴다. 아버지가 존댓말을 썼다고. 그런데 독자는 이 한 줄에서 노동자 계급의 남자가 평생 겪어야 했던 것 전부를 본다. 에르노가 설명하지 않았기 때문에, 독자가 자기 안에서 그것을 발견하는 것이다.


이것이 수치가 렌즈가 되는 순간이다.


에르노의 수치는 에르노에게 특별한 눈을 주었다. 계급의 경계에서 자란 사람만이 볼 수 있는 것 — 어떤 말투가 사람을 구별하는지, 어떤 음식이 계급을 드러내는지, 어떤 침묵이 수치를 감추고 있는지. 이것은 학습으로 얻을 수 있는 눈이 아니다. 몸으로 겪어야만 갖게 되는 눈이다.


수치가 사라진 게 아니다. 수치가 도구가 된 것이다. 망원경을 들여다보듯이, 수치를 통해서 세상을 보게 된 것이다. 이전에는 수치 안에 갇혀서 아무것도 볼 수 없었다면, 이제는 수치를 들여다봄으로써 다른 사람의 수치까지 보게 되었다.


에르노의 《수치》는 이 과정의 마지막에 놓인 책이다.


1997년, 에르노는 마침내 열두 살의 그 일요일을 직접 쓴다. 45년 만이다.


그런데 이때 에르노가 하는 일은 기억을 떠올리는 것이 아니다. 조사하는 것이다. 1952년 6월의 지역 신문을 찾아본다. 당시 마을의 사진을 분석한다. 학교의 교칙을 기록한다. 성당의 규칙을 열거한다. 마치 고고학자가 유적을 발굴하듯이, 그 일요일 주변의 모든 것을 발굴한다.


왜 이렇게 하는가. 그 일요일을 직접 보면 다시 삼켜지기 때문이다. 열두 살의 수치가 쉰일곱의 에르노를 그대로 집어삼킬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에르노는 그 일요일을 에워싸고 있던 세계를 먼저 복원한다. 마을의 사회적 구조를, 가톨릭의 도덕 체계를, 계급의 언어를 먼저 세워놓는다. 그 구조물 안에 그 일요일을 놓으면 — 그 일요일은 더 이상 개인의 비극이 아니라, 한 시대가 한 소녀에게 한 일이 된다.


이것이 트라우마가 렌즈가 된다는 것의 실제 의미다.


트라우마를 극복하는 것이 아니다. 트라우마를 치유하는 것도 아니다. 트라우마를 통해서 세상을 보는 것이다. 내가 겪은 일이 나만의 일이 아니었다는 것을 발견하는 것이다. 수치가 나에게만 일어난 우연이 아니라, 사회가 특정한 사람들에게 반복적으로 일으키는 구조라는 것을 보는 것이다.


그 순간, 수치는 더 이상 나를 가두는 벽이 아니라 — 세상을 들여다보는 창이 된다.


에르노는 2022년에 노벨문학상을 받는다.


수상 이유는 이랬다. "개인적 기억의 뿌리, 소외, 그리고 집단적 제약을 용기와 임상적 정밀함으로 벗겨낸 공로."


임상적 정밀함. 이 단어가 정확하다. 에르노는 수치를 느끼지 않은 것이 아니다. 수치를 느끼면서, 동시에 수치가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해부한 것이다. 환자이면서 동시에 의사인 사람. 아픈 사람이면서 동시에 아픔의 구조를 보는 사람.


이것은 특별한 종류의 용기다. 감정을 느끼는 용기가 아니라, 느끼면서도 보는 용기. 삼켜지면서도 기록하는 용기.


에르노의 방식은 이런 사람에게 닿는다. 자기 안에 이름 붙이지 못한 감정이 오래 살고 있는 사람. 그 감정을 느낄 때마다 삼켜지는 사람. 그런데 가끔, 아주 가끔 — 삼켜지는 와중에도 무언가를 정확하게 보는 순간이 있는 사람. 그 순간이 글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에르노가 증명했다.


수치는 사라지지 않았다. 에르노는 그렇게 말한다. 다만, 이제는 그것을 통해서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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