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주부전, 충성이라는 이름의 복종
자라의 등이 갈라진 이유
용왕이 병에 걸렸다. 어떤 약으로도 낫지 않는 병. 신하가 말한다 — 토끼의 간을 먹으면 나을 수 있다고. 그러나 토끼는 육지에 산다. 물속 세계의 누군가가 육지로 올라가 토끼를 데려와야 한다.
자라가 자원한다. 충성스러운 신하 별주부. 자라는 육지로 올라가 토끼를 만난다. 용궁의 화려함을 늘어놓고, 토끼를 유혹해 바다로 데려간다. 토끼는 속아서 따라간다. 그러나 용궁에 도착해 진실을 알게 되자, 토끼는 기지를 발휘한다. "제 간은 지금 몸 안에 없습니다. 나무에 걸어두고 왔으니, 다시 육지에 가서 가져오겠습니다." 용왕은 그 말을 믿고, 토끼는 다시 육지로 나와 도망친다.
이야기는 보통 토끼의 기지를 칭찬하며 끝난다. 그러나 여기서 시선을 자라에게 돌려보자.
충성하는 자아, 명령하는 콤플렉스
자라는 왜 자원했을까. 설화는 "충성스러운 신하"라고만 말한다. 그러나 그 충성의 구조를 들여다보면, 자라는 사실상 선택하지 않은 것이나 다름없다. 용왕이 아프고, 누군가가 가야 한다. 자라에게 거절이라는 선택지는 처음부터 없었다.
융의 관점에서 자라는 페르소나에 과잉 동일시된 자아의 전형이다. 5편에서 페르소나는 사회적 가면이라고 했다. 자라에게 그 가면은 '충성스러운 신하'다. 이 역할이 자라의 정체성 전부가 되어버렸다. 용왕이 시키면 한다. 불합리해도 한다. 토끼를 속여야 하는 윤리적 문제도, 자기 목숨이 위험할 수 있다는 것도, 충성이라는 가면 뒤로 사라진다.
이것을 일상에서 번역하면 이렇다. 상사가 무리한 지시를 내릴 때, "네"라고 대답하는 사람이 있다. 그 "네"가 정말 동의인 경우도 있지만, 거절하면 자기 존재 가치가 흔들릴 것 같아서 하는 "네"가 있다. 착한 딸이라는 역할에 갇혀 부모의 모든 요구를 받아들이는 사람. 유능한 직원이라는 정체성에 묶여 번아웃까지 달리는 사람. 이들에게 역할은 가면이 아니라 피부가 되어버렸다. 벗으면 아래에 아무것도 없을 것 같은 공포.
자라의 등이 갈라진 것은 — 전승에 따라 토끼를 놓쳐 벌을 받아 등이 갈라졌다고 한다 — 이 과잉 동일시의 물리적 결과다. 자기 자신을 잃어버린 채 역할만 수행하다가, 그 역할마저 실패했을 때 남는 것은 균열뿐이다.
반면 토끼는 정반대다. 토끼는 어떤 역할에도 고정되지 않는다. 위기 앞에서 즉흥적으로 거짓말을 만들어내고, 상황을 뒤집고, 빠져나간다. 융의 용어로 말하면, 토끼는 건강한 자아의 유연성을 보여준다. 하나의 페르소나에 갇히지 않고, 상황에 따라 자유롭게 대응하는 능력. 이것은 교활함이 아니라 생존을 위한 심리적 민첩성이다.
"네"라고 말하기 전에
우리는 자라의 삶을 살고 있지는 않은가.
누군가의 명령을 — 혹은 사회의 기대를, 가족의 요구를, 조직의 압력을 — 자기 의지인 것처럼 받아들이고, 그것을 '충성'이나 '책임감'이라는 이름으로 포장하고 있지는 않은가. 그 "네"가 정말 나의 "네"인지, 아니면 거절했을 때 무너질 자아상이 두려워서 하는 "네"인지.
별주부전이 우리에게 묻는 것은 토끼의 기지가 아니라 자라의 선택이다. 자라에게도 "아니요"라고 말할 순간이 있었다. 용왕 앞에서, 혹은 육지로 올라가기 전에, 혹은 토끼를 만난 순간에. 그러나 자라는 한 번도 멈추지 않았다. 충성이라는 이름이 모든 질문을 미리 차단했기 때문이다.
다음번에 "네"라고 말하기 전에, 한 번만 멈춰보는 것은 어떨까. 그 "네"가 나의 것인지, 아니면 내 등 위에 실린 누군가의 짐인지.
당신의 등에는 지금 무엇이 실려 있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