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장례식이 결혼식보다 좋다 1

1화: 의사들도 원인 모르는 웃픈 투병기

by 한준희

나는 장례식이 결혼식보다 좋다

2024년 12월 3일. 계엄령이 있던 날, 룸메이트한테 몇 없던 정나미가 다 떨어지는 순간이 있었다. 그날 남자친구 집에서 저녁 먹고 영화 한 편 보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말이 저녁이고 영화 한 편이었지 남자친구 침대에서 3시간 뒹굴고 오는 길이었다. 남자친구와 관계를 가진 다음엔 허리가 끊어질 듯이 아프다. 그래도 남자친구는 좋으니까, 생각보다 덜 아프다. 괜찮다. 남자친구랑 헤어질 필요 없다는 최면 아닌 최면을 걸며 지하철을 타고 집에 돌아왔다.


룸메는 자기 방문을 닫아놓고 내가 집에 왔든 안 왔든 아무런 인기척이 없다. 워낙 혼자 있는 게 중요한 친구이다 보니 저녁도 자기 방에서 먹고 화장실을 쓰러 나오는 거 외에는 항상 방 안에서 칩거한다.


집에 들어와서 진통제를 입에 쓸어 넣고 침대에 엎어져 눕는데 내가 속한 퀴어 책모임 단톡방에서 “윤석열이 계엄령 했대요”하는 톡이 올라왔다. 완전히 벙찐 채로 핸드폰으로 뉴스를 열어보는데, 정말로 윤석열이 계엄령 포고했다는 내용이 올라왔다. 순간 이 사실을 누군가랑 얘기해야 할 것 같아서, 내 남자친구한테 연락할까, 룸메하고 얘기할까, 찰나 고민했다. 그래도 룸메는 햇수로 19년 지기, 내년이면 20년 지기 친구 아닌가. 룸메 방문을 노크했다. 노크한 다음에 룸메 방에서 들려오는 답변.


— I’m on the phone. (전화 중이야.)

— 윤석열이 계엄령 했대!

— I’m on the phone with my girlfriend!

(여자친구랑 통화 중이라고!)

— 좀 나와 보라고!



룸메는 끝까지 문을 열지 않으려고 했다. 룸메는 34살 모태 솔로였다. 내가 10월 무렵에 퀴어 역사 탐방 모임에 나가서 남자친구를 만나 연애를 시작하자, 불현듯 룸메는 소개팅 앱에 가입하고 여자친구를 만들었다. 허리가 아픈 나도 연애를 하고 시도 때도 없이 집안에서 남자친구랑 꽁냥꽁냥 전화하니 자극받은 것 같았다.


룸메의 연애 타이밍은 절묘할 정도로 나와 내 남자친구와의 연애 타이밍과 맞닿아있다. 내가 남자친구와 연애하느니 마느니 고민할 때, 룸메는 소개팅 앱을 깔았고, 나와 내 남자친구가 사귀기로 했다고 말하니, 며칠 뒤엔 룸메도 소개팅 앱에서 만난 여자한테 사귀자고 고백했다고 한다. 내가 남자친구와 2박3일 광주로 여행을 가겠다고 하니, 며칠 뒤엔 룸메도 여자친구와 양평으로 1박2일 여행을 간다고 했다. 룸메한테 여자친구랑 데이트 어떻게 했냐고 물어보니, 퇴근하고 신사역에서 만나서 멕시칸 음식 먹고 한강을 걷다가 스킨십했다고 한다. 스킨십만 빼면 몇 년 전에 룸메랑 나랑 술 마실 때 했던 코스랑 뭐가 다른가 싶더라.


계엄령이 있었던 그날. 나는 룸메 문을 다시 두드려댔다. 룸메가 짜증 난 표정으로 날 노려보며 문을 열었다. 나는 윤석열이 계엄령을 선언했다는 말을 다시 한번 했다. 룸메도 벙찐 표정으로 날 보더니, “What?!”이라는 외마디만 외쳐 댔다. 그리고 나는 계엄령 뉴스가 틀어져 있는 거실 TV를 가리켰다. 거실을 잠시 서성이다가 룸메는 “Oh well”(어쩔 수 없지)라는 말만 하고 자기 방 안으로 들어섰다. 그러고는 문틈으로 들리는 여자친구와의 전화 통화. “윤석열이 계엄령 했대.”


나도 전화기를 들고 내 남자친구에게 전화를 걸었다.


나와 룸메가 동거하는 집 구조를 잠시 설명하자면, 우리는 서울 서남권에 구축 23평형짜리 아파트에 산다. 허리 문제 때문에 하루 대부분을 집에서 보내는 나는 큰방을 쓰고, 룸메는 현관문 바로 옆 작은방을 쓴다. 처음 이사 왔을 때는 내가 큰방을 쓴다는 게 룸메한테 미안했다. 전세 대출도 직장인이었던 룸메 이름 앞으로 들었고, 보증금도 나보다 룸메가 모아둔 돈이 많아 룸메가 조금 더 보탰기 때문이다.


그런데 룸메는 작은방을 쓴다는 걸 전혀 개의치 않아 했다. 심지어 룸메 어머니도 이사한 뒤에 작은방을 보면서 했던 말이, “우석이는 딱 이 정도 사이즈 방이 맞아.” 이사를 하면서 집에는 TV가 두 대가 되었다. 나는 당연히 TV는 거실에 한 대면 충분해서 나머지 한 대는 처분해야 될 거라고 생각했는데, 룸메는 당연하다는 듯이 나한테 말했다. “너도 TV는 방에 넣어둬.”


룸메는 옷장보다 아주 조금 더 큰 방 안에 침대, 책상, TV, 간이 탁자를 욱여넣었다. 자연스럽게 공용공간으로 생각했던 부엌과 거실은 내 차지가 되었다. 룸메가 거실에 나와서 자발적으로 소파에 앉아 있는 모습을 본 건 단 한 번이었다. 힘든 일이 있든, 좋은 일이 있든 룸메는 방 안에만 있었다.


나는 허리 병신이고 룸메는 회피성 성격장애 있는 정신병자이다. 나는 만성 통증 때문에 하루 종일 집안에 처박혀있어야 하고, 룸메는 본인이 부정하고 있는 정신병 때문에 도통 자기 방 밖을 나서기 힘들어하는 인간이다. 아주 환상의 콤비이다.


대략 4년 전에 나는 허리 디스크로 인해 왼쪽 다리 전체가 저린 증상이 오는 좌골신경통을 앓게 되었다. 의사들은 MRI를 보고 전혀 심각하지 않다고, 운동만 잘하면 6개월 내로 완치될 거라고 했다. 나도 처음엔 그 말을 믿었다. 20대 때 군대에서 허리를 삐끗한 이후로 크고 작게 허리를 다쳐왔는데, 그때그때 운동과 휴식만 잘 취하면 잘 나아왔기 때문이다. 하지만, 다친 지 4년이 지난 지금, 그렇다 할 차도 없이 아직도 10분 이상 의자에 앉아 있기 어렵고, 잘 때도 진통제 없이는 잠에 들 수 없는 형국이다.


투병 기간 동안 룸메한테 많이 의존했었다. 어떨 때는 가족보다도 룸메 의견을 신뢰하기도 했다. 돌이켜 생각해 보면 룸메는 자기 주관을 표현하기보다 그냥 내가 하는 말에 수긍할 줄만 알았던 사람 같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