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라북도 남원 정령치
시내버스로도 갈 수 있는 지리산 1,100 고지가 있다. 남원의 산내면과 주촌면을 잇는 1,172m의 정령치 고개다. 힘을 들이지 않고 지리산의 능선을 오를 수 있는 곳이다.
차로 산길에 들어서자 '이곳이 지리산이다!' 라고 말 해 주는 것처럼 신선한 공기가 차 안으로 밀려온다. 지나쳐만 갔던 지리산에 발을 들인 적이 얼마만인가? 몇 분 가지 않아 도로가 오른쪽에 '육모정'이라는 정자가 있다. 구룡폭포에서 흘러나오는 계곡물이 흐르는 너럭바위에 육각형의 정자를 지었던 것인데 지은 지 400년이 지난 것이다. 육모정 앞으로는 계곡이 흐른다. 넓은 바위에 내려가 계곡물에 발을 담글 수도 있다. 물살은 세지만 깊지 않아 안전에는 문제가 없다. 이미 한 명의 등산객이 자리를 틀고 신선처럼 명상 중이다.
육모정 앞에 흐르는 계곡을 거슬러 올라 삼곡교를 지나면 구룡계곡을 따라 구룡폭포에 갈 수 있는 길이 나온다. 완만한 3km의 산책로로 이어져있다. 시원스러운 계곡의 바람과 물소리를 들으며 걷고 싶은 오솔길이다.
육모정 맞은편에는 춘향묘라고 적혀있는 표지석이 있다. 표지석을 지나 100여 개의 계단을 오르면 춘향의 무덤이 있다. 춘향이 실존인물인지는 명확히 알려지지 않았지만, 1962년 '서옥녀 지묘'라고 새겨진 지석이 발견되어 춘향의 묘로 추정되어 무덤을 만들었다고 하는데 서옥녀는 춘향의 다른 애칭일까?
춘향묘를 뒤로 하고 다시 정령치를 향해 달린다. 길의 왼편에 길을 따라 저수지가 보인다. 산중 호수를 그냥 지나칠 수 없는 일이다. 고기저수지이다. 산 아래의 농경지의 농업용수를 쓰기 위해 저장한 물이다. 전각 같은 시설물이 저수지 중앙에 있는데 입구를 찾기 힘든 것으로 보아 수질을 관리하기 위한 시설물인 것 같다. 지리산 청정수로 농사를 지은 농작물은 얼마나 신선할까?
10여 분 차로 달려 터널을 지나면 바로 정령치 휴게소 입구이다. 새로운 휴게소를 짓는 공사에 한창이다. 다음에 오면 휴게소에서 천왕봉 쪽을 바라볼 수 있는 전망대가 생길 것 같다. 지리산은 안개가 자주 끼는데 오늘은 쾌청한 날씨다. 햇볕은 따갑지만 산에서 부는 바람 덕에 시원한 산행을 이어간다.
해발 1,172미터 정령치에 올랐다. 정령치(鄭嶺峙)는 삼한 시대 마한의 왕이 진한과 변한을 경계하기 위해 성이 "정" 씨인 장군에게 지키도록 명령한 곳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등산로의 경계를 처 놓은 것처럼 자란 갈대 너머 산이 겹겹이 보이고 그 안에 남원 시가지가 보인다. 오른쪽 숲길로 들었다. 반달곰에 대한 표지판이 있다. 곰을 만나지 않는 방법과 피하는 방법도 쓰여있지만, 마지막으로 곰이 공격해 오면 맞서 싸우라고 적혀있다.
숲속에 숨겨져 있던 정령치 습지가 나타났다. 원시 고산 습지의 생태가 지금까지 유지되는 곳이다. 우거진 수풀 아래에서 물소리가 난다. 이곳에 흐르는 물이 정령계곡과 달궁계곡으로 흐른다고 한다. 습지의 면적은 축구장 반 만한 크기로 작은 편이다.
몇백 미터 걸으니 마애불상군이 모습을 드러냈다. 나는 정령치 보다 마애불상군이 궁금하던 참이었다. 먼발치에서도 두 점의 불상 부조가 눈에 띄었다. 열두 점의 불상이 새겨졌다고 하는데 여덟 개쯤 유관으로 확인할 수 있다. 해가 비치는 방향에 따라 드러나는 불상도 있다고 한다. 열두 점을 모두 찾기 위해서 아침부터 해 질 녘까지 자리를 지키면 모두 찾을 수 있으려나 모르겠다. 불상의 모습이 비슷하여 같은 시대에 새겨진 것으로 보이는데, 고려시대의 것으로 추정된다고 한다.
춘향묘와 육모정, 고기저수지와 마애불상군이 있어 정령치에 오르는 맛을 더 한다. 지리산을 만나 행복했던 하루가 저문다. 곧 단풍이 들텐데 다시 이 숲길을 찾아 걸어야 겠다.
https://youtu.be/KIkFu8ulE0E?si=93tMKJI7CrNvnSP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