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중의 봄은 길다. 꽃샘추위도 모두 물러가고 봄꽃을 남긴 봄의 한가운데에 들어왔다. 첩첩산중 문경의 험한 계곡일 것이라 생각해 걱정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봄은 아홉 굽이 선유구곡(仙遊九曲)에 꽃잎을 하나둘 띄워 보내며 신선처럼 머물러 있었다.
선유동 계곡의 아홉 굽이 전체의 길이는 1.8Km이다. 평지라고 치면 30분 밖에 걸리지 않는 거리이지만 산골 풍경을 살피고 걸으면 넉넉히 두 시간은 잡아야 한다. 구곡 길은 제1곡 옥하대부터 영사석, 활청담, 세심대, 관란담, 탁청대, 영귀암, 난생뢰를 거쳐 이곳 제9곡 옥석대까지 이어진다.
나는 제9곡 옥석대(玉舃臺)에서부터 굽이굽이 물 위로 흐르는 벚꽃 잎을 따라 내려간다. 바위에 새겨진 仙遊洞(선유동)이라는 글자를 최치원 선생이 썼다고 하는데, 1200년 전에도 이곳은 경치가 수려한 곳으로 여겼나 보다. 새겨진 글자 덕분에 지금껏 이곳의 지명이 이어졌을 수도 있다. 세 글자 속에는 산과 사람이 머물고 길과 물이 흐르고 있다.
최치원(857~모름) 선생이 쓴 각자, 선유동
계곡의 건너편에는 도암 이재(1680~1786)의 영정을 모신 영각이 있다. 그 위로 山髙水長(산고수장)이라고 써진 바위가 있다. '산은 높고 물은 길다'라고 밖에 해석되지 않는 이 미련함을 한탄하고 높은 산을 뒤로한다. '높은 산을 뒤로하고 물길을 따르라'는 말인가?
조선 영조 때 학자 이재(1680~1746) 선생을 모신 영각
옥석대에 다다랐다. 주변의 높은 산에서 내려오는 물이 이렇게 잔잔하고 고요하게 흐를 수 있는 까닭은 수많은 바위의 솟음과 깎임이 물살을 잠잠하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신발을 뜻하는 舃(석) 자를 사용한 옥석대는 옥으로 만든 신선의 신발을 뜻하는 것일까? 옥석대 바위의 모양이 짚신을 닮았다. 소나무는 흐르는 물을 향해 기울어있고 물속에는 초록이 빛난다. 자세히 보니 물 안에도 숲이 있다. 조금씩 곡선을 이룬 굽이마다 보이는 풍경은 같은 듯 보이지만 제각각의 모습을 하고 있다. 물소리는 크게 들리다가도 작아지며 햇살은 하류로 내려갈수록 밝게 비추인다.
제8곡 난생뢰에서 바라본 상부 계곡
제8곡 난생뢰(鸞笙瀨)에서 위쪽을 바라보면 계곡 끝으로 산이 보이고 그 너머 파란 하늘이 비춘다. 선유구곡의 짙은 자연의 모습을 느낄 수 있는 곳이다. '난생'은 신선이 전설의 새인 난새를 타고 대나무로 만든 악기를 연주한다는 뜻이다. 난생뢰는 '신선의 악기 소리가 나는 여울'쯤으로 해석하여도 될 것 같다. 이곳의 산새 울음과 물소리가 그 연주가 아닐까?
물살이 바닥의 모든 것을 씻고 내려가 물이 흐르는 밑바닥은 커다란 암반이다. 마치 거문고의 줄처럼 검은 줄무늬가 물이 흐르는 방향을 따라 길게 그려있다. 산벚꽃이 군데군데 피었다. 길가의 벚꽃처럼 흐드러지게 피지는 않았지만 산들산들 햇빛에 반짝거리는 것이 하얀 보석 같다. 바위에 걸터앉아 산벚꽃을 보며 선유동 계곡이 들려주는 운율에 한참 귀를 기울인다.
제7곡 영귀암
바위에 뿌리를 내린 소나무는 한 줌의 흙을 움켜쥔 채 나무줄기를 꼿꼿이 펴고 있다. 진달래 꽃이 걸음마다 뿌려져 있고 물 위로 흘러가는 꽃잎도 있다. 길은 숲으로 이어지더니 제7곡 영귀암(詠歸巖)을 가리키는 표지판이 나타난다. 엉클어진 수풀을 제쳐내고 다시 계곡으로 들어섰다. 연못처럼 물이 고였고 커다란 바위가 수문이 되었다. 물소리가 고요하다. 기운이 모이는 장소로 소문난 것처럼 소원탑이 군데군데 쌓여 있다. 영귀암을 '이 바위에 올라서 노래를 지어 불러야 돌아갈 수 있는 곳'이라고 해석을 해야 할까? 한자 뜻만으로 풀어보면 그렇게 해석할 수도 있겠다. 노래를 짓고 불러야 한다니 얼마나 오랫동안 머물러야 하는 것일까? 공간은 넓지 않지만 주변의 모습은 계곡이 갖출 것은 다 갖추었다. 흥얼흥얼 표지판에 적힌 노래를 읊고, 소원을 빌며 깨끗한 자리에 탑을 쌓아 올린다.
제6곡 탁청대
길게 머무는 시간이 허락된다면 움막이라도 짓고 족히 3, 4일은 머물 수도 있을 것 같다. 한 끼는 옥석대에 올라 식당에서 먹고 또 한 끼는 옥하대로 내려가 읍내에서 먹으면 해결될 것이다. 한량 같은 상상을 해본 것이다.
제6곡 탁청대(濯淸臺)에 이르렀다. 세상 시름에서 벗어나 마음을 깨끗하게 하는 곳이라는 뜻이다. 뜻을 헤아리지 않고서라도 이곳에 온 사람 중 마음이 덜 씻긴 채 내려온 사람이 있을까? 참선을 위한 자리인 듯 넓은 바위가 방석처럼 놓여있다. 이곳에서는 바위에 쓰여있는 탁청대 글씨를 찾아보아야 한다. 소풍 때의 보물 찾기처럼 찾아보았다. 작고 익살맞게 쓰여있는 글씨는 마음이 깨끗한 사람 아니면 찾기가 힘들 것 같다. 녹음이 짙어지면 풀숲에 가려서 보이지 않을 것 같다.
탁청대에서 제5곡 관란담(觀瀾潭)까지 가는 길은 울창한 숲에서 잠시 벗어난 길이다. 길가에 거북이 머리 모양의 커다란 바위가 있다. 마치 냇가에 물을 마시러 오는 모양이다. 모처럼 깊은 물이 길옆으로 흐른다. 나뭇가지 사이사이로 보이는 하얀 구름이 벚꽃인 양 피어오른다. 길은 계곡을 가로지르도록 이어졌다. 커다란 바위가 징검다리가 되어 길을 만들었다. 징검다리를 모두 건너고 뒤를 돌아보면 보이는 여울목이 관란담이다. 여울이란 물살이 빠르게 흐르는 곳을 말한다. 바위가 내어준 틈마다 흐르는 물소리가 숲에 활기를 돋운다. 관란담을 지나면 봄꽃이 만발한 숲길로 이어진다. 몇 채의 민가를 지나면 평지에 가까운 뜰이 나타난다. 넓은 정원을 걷는 기분이다.
다시 계곡물을 만났다. 제4곡 세심대(洗心臺)다. 마음이 씻기지 않은 채로 탁청대를 지났다면 이곳 세심대에서 다시 씻을 기회가 있다. 바위에 걸터앉아 발을 담그고 손과 발, 목과 얼굴도 시원스레 씻고 나니 마음도 저절로 씻겨지는 기분이다. 계곡에 떨어진 꽃잎들이 이곳에 모두 모였다. 산행을 나온 사람들도 이곳에 꽃잎처럼 모여 앉았다. 이곳 또한 마음을 씻은 사람만 찾을 수 있는 것처럼 세심대의 바위 각자가 그늘아래로 조그맣게 새겨있다.
선유구곡 길과 이어진 칠우칠곡 길
세심대를 빠져나와 아치형 인공다리 아래 제3곡 활청담(活淸潭)에 다다랐다. 바위 웅덩이에 갇힌 올챙이가 물이 넘실대기만을 기다리며 구석구석으로 헤엄을 친다. 제2곡 영사석(靈槎石)을 지나 제1곡 옥하대(玉霞臺)를 빠져나오면 길은 일곱 여울을 뜻하는 칠우칠곡으로 이어진다. 여울 길을 따라 봄의 향연을 마저 즐기기 위해 발걸음을 이어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