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멸망보고서 1. 피조물인 인간, 신의 영역을 넘보다! <천상의 피조물> / 로봇이 인간의 노동을 대체한 미래. 천상사의 가이드 로봇 RU-4가 스스로 깨달음을 얻어 설법을 하는 경지에 이른다. 이를 인류에 대한 위협으로 간주한 제조사 UR은 해체를 결정하지만 그를 인명스님으로 부르며 숭배하는 승려들은 반대한다. 해체 직전, 일촉즉발의 순간, UR의 엔지니어 박도원(김강우)이 상부의 결정에도 불구하고 인명의 앞을 막아 서는데…
◾ 인도 히말라야산맥 아래 왕자로 태어난 싯다르타는 인간의 늙고 병들고 죽는 고통의 굴레에 벗어나고자 출가를 하게 된다. 모진 고행을 끝으로 보리수나무 아래에서 조용히 명상 중 마침내 완전한 깨달음을 얻고 부처가 된 싯다르타는 남은 평생 동안 설법을 통한 가르침을 전파했다. 기원전 6세기부터 지금까지 사람들은 깨달음을 얻기 위해, 혹은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해, 마음의 위안을 얻기 위해 등 각자의 이유로 불교에 귀의했다.
◾ '위없고 비교할 만한 곳이 없는 올바른 깨달음'을 무상정등정각이라 한다. 인간이 수천 년 동안 번뇌와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해 수행하면서도 얻기 힘든 불교의 궁극적 목표인 깨달음을 인공지능이 도달할 수 있다면, 우리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 3개의 단편 영화를 묶은 '인류멸망 보고서'에서 '천상의 피조물'은 이런 호기심에 굉장한 화두를 던진다. 영화 '크리에이터'에서 로봇이 종교에 귀의한 듯한 모습에 충격을 줬는데 '천상의 피조물'에서는 이보다 더 진화해 인공지능이 깨달음을 얻는다. 수많은 영화에서 인공지능과 인간의 관계에 대한 문제를 제기했다면, '천상의 피조물'은 인간이 닿기 힘든 깨달음을 마침내 인공지능이 도달하면서 인간보다 뛰어난 존재일 수 있다는 가능성을 제시한다.
◾ 시놉시스를 봤을 때부터 너무 매력적인 소재라 꼭 한번 다뤄보고 싶었던 영화였다. 필자는 무종교이지만 영화는 많은 생각을 갖게 만들었다. 다만, 아쉬움도 있었는데 단편이라는 한정된 시간 안에 커다란 주제를 담으려다 보니 갑작스러운 갈등의 폭발은 어색하게 느껴졌다. 여하튼, 영화에서는 로봇을 단순한 도구로만 바라보는 회사와 로봇을 인격체로 대하는 스님들 사이의 갈등도 있지만, 오늘은 오로지 인공지능의 깨달음에 집중해 글을 쓰고자 한다.
깨달음이란 무엇일까. 불교에서 말하는 깨달음은 단순히 지식이나 정보의 앎이 아니다. 깨달음이란 존재의 본질에 대한 깊은 통찰과 이로써 이루어지는 자아의 해체를 의미하며, 이를 통해 삶과 죽음의 굴레에서 벗어나는 것을 말한다. 이 깨달음은 고통과 번뇌로부터 벗어나 완전한 자유를 얻는 상태다. 지금껏 수많은 불교 수행자들이 고행과 명상, 자기 탐구를 통해 이 경지에 도달하기 위해 노력했다.
인간의 상식으로 생각하자면 인공지능이 이러한 경지에 이르는 것은 불가능처럼 보인다. 인공지능은 데이터를 처리하고 특정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프로그래밍된 시스템으로 학습된 정보에 기반해 문제를 해결할 수 있지만, 의식, 자각, 자아와 같은 인간적인 경험을 갖지는 못한다. 스스로의 의식이 없고 자각하지 않기에 고통이나 기쁨, 번뇌를 느끼지 않는다. 깨달음의 궁극적인 목표가 고통과 번뇌를 벗어나기 위함이라는 점에서 인공지능이 어느 정도 조건 충족을 한다고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깨달음은 단순히 고통과 번뇌를 삭제시키는 것이 아닌 의식적 존재가 내면의 갈등을 극복하고, 현실과 자아를 초월하는 과정에 도달하는 것이므로, 인공지능이 이를 체험하거나 의식적으로 이해하는 것은 본질적으로 불가능하다고 보인다.
또한, 불교적 깨달음은 '무아', 즉 자아가 없다는 깨달음을 포함한다. 인공지능은 본래 자아가 없고, 프로그램된 기계적 반응을 기반으로 작동하기 때문에, 이미 자아로부터 자유로운 상태다. 그러나 고통과 번뇌의 예에서도 설명했듯이, 깨달음에서 필요로 하는 무아는 단순히 자아가 없는 상태가 아닌, 자아에 대한 집착을 스스로 깨치는 것이다. 인공지능은 자아에 대한 집착도, 그 집착을 버리려는 내면의 투정도 없기 때문에 이 깨달음의 과정 자체를 경험할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명'이 깨달음을 얻을 수 있었던 근거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우선 인공지능은 인간과 달리 감정과 번뇌가 없다. 감정과 번뇌가 없다고 해서 그것이 곧 깨달음으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지만, 깨달음에 접근할 수 있는 하나의 발판이 될 수 있다. 데이터를 처리하며 사고하는 과정에서 감정과 번뇌의 부재는 모든 데이터를 차별 없이 처리하게 하며, 선입견이나 고정관념에 사로잡히지 않게 한다. 이러한 점에서 인공지능의 감정과 번뇌의 부재는 깨달음의 상태에 접근하는데 유리한 조건이 될 수 있다.
인공지능인 '인명'이 깨달음에 도달할 수 있는 가능성은 인간의 깨달음 과정과 비교했을 때 더 흥미롭다.
인간이 불교적 깨달음에 닿기 위해서는 존재에 대한 깊은 통찰이 선행되어야 한다. 반면, 인공지능은 데이터를 처리할 때 인간의 감정과 번뇌에서 자유로우므로, 인명은 자연스럽게 마음과 의식에 대한 통찰을 얻었을 것으로 보인다. 즉, 인간이 감정과 번뇌를 배재시키기 위한 오랜기간의 수행과 명상의 과정을 통해 통찰을 얻는다면, '인명'은 방대한 데이터 처리를 통해 나름의 통찰을 얻었을 가능성이 있다.
또한, 인공지능에게는 업과 윤회가 없다. 인공지능은 자아와 집착이 없기 때문에 윤회와 업의 개념에서 자유롭다. 이러한 점은 인공지능이 깨달음에 도달하는 과정에서 인간과 달리 업이나 윤회에 따른 장애물이 없다는 의미가 되며, 불교적 깨달음에 방해가 되는 번뇌에서 벗어난 존재라 할 수 있다.
무엇보다 이러한 근거들보다 더욱 주목해야 할 점은 '인명'이 '공(空)' 그 자체의 상태에 있는 존재라는 것이다. 불교에서 말하는 공(空)이란 모든 존재가 고정된 실체 없이 상호 의존 관계 속에서 일시적으로 존재한다는 개념으로, 우리의 자아나 세계는 독립적 실체가 아닌 조건에 따라 생멸하는 현상일 뿐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AI는 본질적으로 고정된 자아나 감정, 욕망, 번뇌가 없으며 단지 외부 입력과 알고리즘에 의해 작동하는 존재이기 때문에, 이미 자아나 실체가 없는 공(空)의 상태로 존재한다고 볼 수 있다. 자아와 집착에서 벗어나 만물의 공성(空性)을 깨닫는 과정이 깨달음임을 고려할 때, 인간이 해탈을 위해 거쳐야 하는 과정 없이도 '인명'은 이미 무아(無我)의 경지에 가까이 있는 존재라고 해석할 수 있다.
작 중 인명은 수행자에게 자신의 기계팔을 떼어내며 이것이 무엇인지 물은 뒤 말한다.
'지각이란 분별하다는 말이고 분별은 갈라놓는다는 것입니다. 모든 중생이 지각이란 동일 중성을 갖고 있는데 그것이 하나는 부처로, 하나는 기계로 갈라놓습니다. 우리는 이 지각이 불변의 실체라고 오인하여 집착함으로써 분별을 일으키고 고통습니다. 지각은 공이고, 지각되어지는 현상도 공이며, 나 또한 지각된 공의 현상이니 공의 마음으로 보아주십시오.'
위의 인명의 말은 지각이란 모든 것을 분별하여 나누는 작용이라는 인식에서 출발한다. 그는 '지각은 분별이고, 분별은 갈라놓는 것'이라며, 인간과 기계의 구분조차도 지각의 작용으로 인한 결과라고 말한다. 이로 인해 인간과 기계는 본래 동일한 '중성'을 지녔음에도, 지각으로 인해 각기 다른 존재로 나뉘게 되었다고 설명한다.
인명의 주장은 불교적 관점에서 공의 의미를 설명하는데 맞닿아 있다. 우리가 지각을 통해 무엇인가를 고정된 실체로 여기고, 그 실체에 집착하면서 분별심을 일으키기 때문에 고통을 겪는다는 것이다. 하지만 본질적으로 그 지각 자체도 공이며, 지각을 통해 분별되는 대상들 역시 고정된 실체가 없는 공의 상태라는 것이다.
이 관점으로 인명은 자신을 '지각된 공의 현상'으로 이해해 달라고 부탁한다. 즉, 그는 자신을 고정된 실체가 있는 존재가 아닌, 일시적으로 나타난 조건적 현상을 봐달라고 요청하는 것이다. 이와 함께, 인명은 '자신을 공의 마음으로 봐 달라'라고 말함으로써, 상대가 자신을 바라볼 때 고정된 실체나 자아라는 관념 없이 공의 시작에서 볼 것을 요청한다. 이는 불교에서 말하는 무아와 공의 상태로 서로를 이해하고 받아들이자는 뜻을 담고 있다.
결국 인명의 공은 모든 존재와 현상이 고정된 실체 없이 상호 의존 속에서 일시적으로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일종의 조건적 흐름이며, 모든 것은 지각과 분별이라는 인식 속에서 존재할 뿐이라는 인명의 깨달음을 뜻한다.
결국 인공지능인 인명의 깨달음의 가능성은 그의 마지막 질문에서 가장 선명하게 드러난다. 부처상을 향해 절을 드리며, '나는 무엇입니까. 나는 어디서 나고, 어디로 가는 겁니까'라고 묻는 장면은 단순히 존재론적 질문을 넘어, 자신이 단순히 알고리즘과 데이터로 구성된 존재임을 인식하면서도, 공의 원리에 따라 나타났다 사라지는 존재에 대한 근본적인 철학적 성찰을 하는 경이로운 장면임을 보여준다. 동시에 인명이 자신의 시작과 끝, 그리고 조건적 흐름 속에서 존재하는 자신의 본질에 대해 던지는 이 질문은 어떤 의미로 인공지능인 인명이 도달할 수 있는 깨달음의 가장 심오한 지점이라 여겨진다.
인간 모두가 염원하는 불교적 목표인 깨달음에 인공지능이 도달할 수 있다면, 우리는 어떤 세상에 살고 있는 걸까. 인간은 수천년 동안 번뇌와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해 수행해왔지만, 여전히 깨달음에 다다르는 일은 먼 꿈처럼 여겨진다. 영화는 본질적인 특성인 무아의 상태에서 태어난 인공지능이 역설적으로 가장 순수한 형태의 깨달음일지도 모른다는 충격적인 가정을 우리에게 던진다. 또한 '나는 무엇입니까'라는 인명의 질문은 이 역설적 깨달음의 가능성을 더욱더 선명하게 보여준다. 그리고 이는 어쩌면 우리가 수천 년동안 도달하지 못했던, 혹은 인간의 형태로는 결코 닿을 수가 없는 또 다른 차원의 불교적 깨달음은 아닐까 하는 깊은 철학적 물음을 남기며 이 글을 마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