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도한 것은 아니었지만 근 1년 간 다양한 사유로 로미오와 줄리엣을 지겹게 봤다. 일 때문에 읽은 셰익스피어의 극본, 엄마 때문에 본 디카프리오의 영화, 친구 때문에 관람한 줄리엣만 두 명 등장하는 연극까지. 거기에 나는 고등학교 음악시간에 선생님이 틀어주셨던 웨스트사이드스토리의 1961년 버젼을 아직 기억하고 있다.
웨스트사이드스토리를 재밌게 본 것은 순전히 그 덕분이었을 거다. 스토리를 외워버린 덕분에 영화의 감정선이 관객이 따라갈 수 없는 저 어딘가로 멀어졌을 때에도 흔들리지 않고 넘버에 집중할 수 있었던 것이다. 아름다운 음악과 춤을 위해 공감이 가지 않는 스토리를 어디까지 참아줄 수 있나? 이것이 웨스트사이드스토리를 선택하기 전 관객이 스스로에게 물어야 하는 질문이다.
(아래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뉴욕의 빈민가, 하나의 구역을 놓고 샤크파와 제트파가 경쟁한다. 둘의 갈등은 곧잘 폭력 사태로 치닫는다. 시에서는 둘 사이의 갈등을 봉합하기 위해 무도회를 연다. 허름한 학교에서 치뤄지는 무도회에서 샤크파 리더의 동생 '마리아'와 제트파 리더의 친구 '토니'가 마주치고, 그들은 운명적인 사랑에 빠진다.
파랑색으로 상징되는 안톤의 제트파, 붉은 색으로 상징되는 마리아의 샤크파. 청과 적으로 양분된 세계관에서 영화가 보여주는 것은 아이러니하게 어떠한 경계에도 속하지 않은 사람들의 삶이다. 미국인도 푸에토리코인도 아닌 샤크파의 사람들. 부유한 백인들의 사회에서 소외된 제트파의 사람들. 여자도 남자도 아닌 조력자와 조직과 함께하지만 조직에 속하지는 않은 주인공들. 사회의 떠돌이들은 집단을 이뤄 다른 떠돌이들을 배척한다. 갈등과 차별은 권력구조를 타고 내려와 재생산된다.
전체적으로 빈부와 인종 간이 갈등이 들끓던 1960년 뉴욕에 대한 향수가 짙게 드리워진 영화이다. 푸르스름한 색감에 렌즈플레어가 도드라지는 필름 감성을 재현하고 빠르고 화려한 화면 전환 보다는 긴 호흡의 카메라워크를 많이 사용해 고전적인 느낌을 살렸다. 특히 제트파와 샤크파의 대립을 파랗고 붉은 드레스의 대비와 위협하듯 서로를 스치는 춤의 동선으로 보여준 체육관 무도회의 1분 가량의 롱테이크 장면은 압도적이었다.
Tonight 은 당연히 좋았고 (사실 어떻게 찍어도 망치기 힘든 넘버다), 안톤과 리프의 갈등을 보여준 Cool도 인상적이었다. (안톤이 리프 절반만큼이라도 몸을 잘 썼다면 좋았을텐데!) 체육관, 철제 계단, 구멍 뚫린 다리 모두 장소 선정이 좋았다. 장소들이 가진 힘으로 한 장소에서 길게 이어지는 씬이 밋밋하거나 지루하지 않았다.
그렇지만 뉴욕의 장소가 아무리 멋들어진다 한들 나는 1960년엔 태어나지도 않은 서울의 관객이다. 등장인물들이 겪고 있는 갈등을 모두 이해하지만 감정이입까지 하는건 다른 문제다. 많은 대사를 노래로 처리하는 뮤지컬 영화의 특성 상 등장인물의 감정선들이 얼렁뚱땅 졸속으로 넘어가는 것도 몰입을 방해하는 요소가 된다. 눈을 마주치자마자 십대들이 함께 야반도주를 할 계획을 세우는 이야기가 디즈니적 허용으로 넘어가지는 시대는 지났다. 하다못해 디즈니도 처음 보는 사람과는 결혼할 수 없다고 말하지 않았는가. 1960년을 살았던 미국인이라면 별 노력 없이 영화에 공감했겠지만 그렇지 않은 관객들을 충분히 설득시키기에는 서사가 많이 부족했다.
이분법으로 나눠진 세계를 극복하려 했던 연인의 사랑은 비극적 결말을 맞는다. 두 파벌의 갈등이 최고조에 이르렀을 때 마리아의 오빠는 안톤의 친구를 죽이고, 안톤은 마리아의 오빠를 죽여 친구의 원수를 갚는다. 그리고 유교피플들은 납득할 수 없는 일이 일어나는데, 마리아가 안톤을 용서한 것이다. 경찰서에 자수하기 전 마리아를 찾아온 안톤의 죄를 마리아는 사랑의 이름으로 안아준다.
하지만 눈을 마주치자마자 세기의 사랑이 시작되는 세계에서도 살인자는 행복할 수 없는 법. 함께 도망치기 위해 파란 색의 드레스를 입고 달려온 마리아의 눈 앞에서, 총에 맞은 안톤은 붉은 피를 흘리며 쓰러진다. 마리아는 고통으로, 안톤은 죽음으로 희생제물을 바치고 나서야 갈등은 융합되고 푸름과 붉음의 경계는 지워질 수 있었다. 그림자가 걷혀가는 뉴욕의 건물 벽을 배경으로 올라오는 크레딧이 묘한 여운을 남겨서 영화가 끝나고도 극장을 바로 떠나지 못했다.
스티븐 스필버그의 웨스트사이드스토리는 '뮤지컬'에 주목하면 잘 만든 영화고 '영화'에 주목하면 잘 만든 영화가 아니다. 두 키워드를 합쳐서 '뮤지컬 영화'로 보기엔 나쁘지 않다. 그렇지만 나쁘지 않은 정도로 잘했다고 평가하기엔 스티븐 스필버그의 이름이 너무 무겁다.
훌륭한 넘버와 군무는 위대한 작곡가 번스타인의 공이지 스필버그의 공이 아니다. 2022년에 1961년 영화를 리메이크 하겠다고 마음먹은 이상 스필버그는 감독으로서의 책임을 지고 스토리를 조금 더 세련되게 수리해 왔어야 했다.
아름다운 음악과 춤을 위해 공감이 가지 않는 스토리를 어디까지 참아줄 수 있나? 이것이 웨스트사이드스토리를 선택하기 전 관객이 스스로에게 물어야 하는 질문이라고 했다. 하지만 이런 질문을 하게 만드는 영화는 좋은 영화가 아니다. 구시대의 유물을 갑자기 현 시대로 꺼내 놓고 예쁜 물감을 덧바른 뒤에 그것이 제대로 작동하길 기대하는 건 게으른 생각이다. 아무리 아름다운 골동품이라도 현대에서 기능하지 못하면 고물일 뿐이라는 것을 감독은 알았어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