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왜 자극적인 걸 좋아할까?

이해하지 않는다면 이해하지 않는다. 이해하지 못한다면 이해하지 못한다.

by 한월

혹시 여러분은 이러한 이야기를 어떻게 생각하나요? 예를 들자면 다자이 오사무의 인간실격, 이상의 날개, 셰익스피어의 4대 비극 중 햄릿. 전부 주인공이 극단적인 선택으로 삶을 마감합니다. 그러나 이 이야기들은 하나 같이 명작으로 여전히 손에 꼽히고 심지어 권장도서까지 취급 받습니다.


그리고 하나의 이야기를 더 예시로 들어보겠습니다. 자신이 좋아하는 상대가 너무나도 매력적으로 보이고, 그 사람이 나에게 같이 죽자면서 야릇하게 웃어보입니다. 그래서 홀린 듯이 같이 죽기로 하고 실행에 옮기게 되죠. 참고로 나라는 인물은 그 어떠한 정신질환도, 삶에 대한 비관도 전혀 없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한 사람으로 인해서 홀린 듯이 따라 죽습니다. 이건 희생이라고 해야 할까요. 일종의 흔히들 말하는 가스라이팅이라고 해야 할까요. 아니면 세뇌나 타성에 젖은 것이라고 해야 할까요. 확실한 건 아무런 생각조차 하지 않고 상대방이 원하는 걸 그대로 들어줬다는 점에서 그 어리석음. 삐둘어진 욕망이나 사랑. 집착과는 조금 다른 느낌의 어떠한 것입니다. 우스갯소리로 정말 귀신한테 홀렸다고만 할 수밖에 없을까요.


치명적일 정도로 자극적인 소재이지만 누군가에게는 꽤 호기심이 가는 소재입니다. 그리고 그 누군가는 보통 젊은이들이라고 할 수 있죠. 여기서 젊은이들은 한창 사춘기인 어린이, 미성년자를 포함하는 말입니다. 대학생인 저 또한 나름 흥미로움을 가지고 좋아합니다. 그러나 한창 사춘기인 아이들은 그걸 꼭 그리 대단한 것인냥 티를 내고 다닙니다. 조용히 혼자 즐기면 모르겠는데 말이죠. 타성에 젖는다는 건 바로 이런 것을 말하는 게 아닐까요?


아무튼 사춘기라고 해서 성(性)에만 눈을 뜨는 게 아닙니다. 정확히는 자극과 호기심이 성욕을 포함을 카타르시스에 눈을 뜨게 되는 거죠. 흔히 '사이다'라고 하는 그것과 같은 것입니다. 학교나 직장에서 무시받고 괴롭힘을 당하던 사람이 어느 날 회귀라는 것을 통해 과거의 일을 복수하는 것. 또는 그 일을 대신 복수해주거나 하는 것. 이 얼마나 완벽한 권선징악의 해피 엔딩일까요. 이런 건 매체에서 흔한 이야기 소재로 쓰입니다. 그만큼 수요도가 높으니까요. 또 그만큼 점점 자극적인 소재를 찾게 되고 쓰게 됩니다. 그리고 그걸 소비하는 층은 다양합니다. 거기에는 한창 사춘기인 미성년자도 포함돼 있죠. 성(性) 말고도 이러한 것도 소신 발언을 하자면 어른들이 교육해줘야 할 부분이라면 그렇다고 얼마든지 할 수 있지 않을까요?


그렇지만 그건 생각보다 그리 쉬운 일은 아니죠. 세대 차이도 그렇지만 우리는 어쩔 수 없이 어른들의 세계에서 미성숙한 애들을 바라보거든요. 그래서 그런 어린애들의 세계를 이해해야만 비로소 뭔가가 바뀌기라도 할 겁니다. 무작정 금지하는 것이 아니라, 먼저 이해를 전제로 말이죠. 원래 인간은 금지시키면 더 하고 싶어져요. 그런 반항심은 미성숙하다고 해서 나오는 게 아닙니다. 인간이라면 당연히 느낄 수밖에 없죠. 강요받고, 강압과 강박을 느끼는 순간 그걸 하고 싶은 의지는 사라지는 게 아니라 무의식적이고 반사적인 방어로 작용하는 거죠. 법이 있고 그걸 어기면 죄. 그리고 그 벌이 내려지는 건 당연한 겁니다. 그리고 그건 분명 마이너스 요소이죠. 그러나 이렇게 극단적으로 갈 필요 없습니다.


왜 나는 길에 쓰레기를 버리는 인간을 보면 불쾌하고 불편할까? 이런 비슷한 생각을 누구나 한 번쯤 경험해본 적이 있을 겁니다. 그렇다면 저 사람이 길에 쓰레기를 버리는 이유는 대체 무엇일까요? 단순하게 생각하면 답은 간단합니다.


"그렇게 하는 게 편하니까." 아무리 불법이고 윤리적으로 어긋난다고 해도, 우리가 여기서 주목해야 할 건 편함과 편리함입니다. 편한 걸 싫어하는 사람이 많을까요. 아니면 그렇지 않은 사람들이 많을까요. 그건 우리가 저마다 스마트폰을 들고 있다는 것에서 답이 나오지 않을까요? 그리고 인간의 삶을 더욱 윤택하게 하기 위해서 과학과 기술은 빠르게 발전합니다. 여기서 논점을 흐리지 말아야 할 건 스마트폰과 빠르게 발전하는 과학과 기술이 나쁘다고 하는 게 아니라는 겁니다.


어쨌든, 내가 저 사람의 행동을 보고 불쾌했던 건 저 사람이 쓰레기를 무단투기를 하는 게 기분이 나빴던 게 아니라 저 사람이 너무나도 당연하다는 듯이 '편하게' (어쩌면 자기중심적인 사고라고 할 수 있을 테지만 그건 이야기가 깊어지니 나중에) 쓰레기를 '그냥' 버리는 것에 불편했다는 것을요. 그렇다면 왜 그 사람의 행동만 아닌 그 사람의 태도에 불편했을까요? 정말 불편한 진실이지만, 내가 그렇게 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누가 봐도 저게 쉬워 보입니다. 굳이 끈적끈적하고 냄새 나는 쓰레기를 계속 들고 있을 필요는 없으니까요. 그렇다면 그 하지 못했다는 건 무의식적인 감정, 어쩌면 욕망을 충족하지 못했다는 게 아닐까요? 그리고 거기에서 오는 불쾌감이 불편했던 건 아닐까요? 이건 열등감과는 다른 문제입니다. 부럽다는 감정에서는 비슷하다고 할 수 있겠죠. 불편한 진실을 마주하고 인정하고 싶지 않은 반항심인 거죠. 이게 결코 나쁜 건 아니에요. 아까도 말했듯이 사람은 조금이라도 억압받는다는 느낌 하나 따위로 하기 싫다는 반항심이 생긴다는 것을요.


하지 말라고 하면 괜히 더 하고 싶어지고, 오기가 생기게 됩니다. 즉, 어른의 세계에서는 법과 질서가 너무나도 당연하고, 상식적으로 작용합니다. 그리고 그것들이 없으면 살아갈 수 없어요. 하지만 어른들보다 미성숙한 어린이들의 세계에서는 조금 다릅니다. 아니, 어찌 보면 천지 차이라고 해도 과언은 아니겠지요. 그래서 서로의 세계를 이해하는 걸 넘어서서 파악하기 어려운 것입니다. 이런 말이 있죠. "어린 게 뭘 알아." 네 그렇습니다. 어린이들의 세계에 있는 어린이가 어른이 있는 어른들의 세계에 있는 어른을 어떻게 이해하고 알겠습니까.


역으로 이런 말도 있죠. "어른들은 아무것도 몰라요." 이것도 역시 정답입니다. 어른들의 세계에 있는 어른이 어린이들의 세계에 있는 어린이를 어떻게 이해하고 알겠습니까. 아무리 어른이 어린이였다고 한들. 어린이가 어른이 된다고 한들. 지나온 길이고 가야할 길이라고 한들 이미 그 세계에 완전히 빠져있지 않습니까? 서로가 서로의 세계를 이해하지 못한 채 더 나아가, 세대 갈등이 일어난다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니겠죠.


우리는 이런 것들 말고도 이미 너와 나의 세계를 이해하지 못합니다. 아까 길거리에서 쓰레기를 버리던 사람과 그걸 보고 불편함을 느끼며 불쾌함을 드러낸 나는 아마도 완전히 다른 세계일지도 모릅니다. 그러니 서로가 서로를 이해하지 못할 겁니다. "저게 더 편한데 왜 저러지?", "이게 더 현명한데 왜 저러지?"라고 하면서요. 그러나 이런 생각을 했다면 그 다음에 있는 '왜'라는 말에 대해서도 생각해본 적이 있을까요? 아마도 그리 많지 않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왜'라는 걸 해결하려면 이해를 바탕에 두고 해야 합니다. 하지만 그런 건 시간 낭비나 결국에는 무의미한 게 아닐까요? 그저 일순간 지나치고 더이상 보지 않을 사이인데. 심지어 우리는 알고 지내던 사람마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너무나도 빠르게 변화하는 세상과 누구나 갈망할 편안함을 얻고자 늘 바쁘게 살아가는 우리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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