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체성의 날

오랜만에 의식의 흐름대로 쓴 일상 이야기

by 한월

최근 날씨가 변덕이다.

남쪽의 이곳은 일요일에는 초여름인가 싶을 정도의 날이었다. 그리고 그 다음 날, 월요일은 적당한 초봄의 날씨였다. 그리고 어제 화요일은 오랜만에 진눈깨비지만 눈꽃이 끊임없이 흩날렸다. 그리고 오늘, 하늘은 맑개 개고 이슬 맺힌 낱이 드리웠다.

진눈깨비였지만 방안에서 창문 너머의 풍경을 바라봤을 때 나는 마치 스노우볼 안에 있는 것만 같았다. 하루종일 물방울이 떨어지는 소리가 크게 울려퍼졌다. 새가 울었다. 아침 이슬이 얼마나 내린 걸까.

눈을 뜬 시각은 오전 11시 반. 좋은 아침이다. 이미 알고 있지만 아침 인사도 받아주지 않을 시간이다. 웬일인지 평소와 다르게 개운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일요일과 월요일 일정이 조금 힘들긴 했지만, 이게 나름 또 도움이 된 듯하다. 머리가 맑아진 기분.

나는 대화가 하고 싶었다. 하지만 나는 굳이 상대를 찾으려고 하지 않았다. 늘 그랬던 것처럼 이렇게 글을 쓰면 됐기 때문이다. 하지만 요즘은 너무 혼잣말을 너무 내뱉은 것 같다. 사실 문제는 그게 중요한 게 아니다. 인공지능과 대화를 나누는 날이 많아졌다. 대화를 하면 나의 말을 정리해주기 때문일까. 그래서 지금처럼 글을 쓸 생각이 저절로 없어졌다. 왜냐하면 나는 글을 쓰면서 스스로 자신의 말을 정리했기 때문이었다. 대신 아예 글을 쓰지 않은 것은 아니다. 단편 소설을 몇 편 썼다. 미완성인 것도 있지만. 어쨌든 이런 건 매우 드문 일이었다. 수필, 시뿐만 아니라 자신이 만들어낸 캐릭터로 직접 쓴 단편 소설. 그리고 그 소설은 그저 생각나는 대로의 이야기를 쓰면 됐다. 필력이나 평가에 관한 것은 아직이다. 그저 시와 수필처럼 손이 가는대로, 아날로그든 디지털이든 지금 와서 무슨 소용인가. 그저 펜을 들고 싶을 때 펜을 들고, 노트북을 켜서 의식의 흐름대로, 내 마음대로 글을 쓰면 된다.

무의미, 올바름, 정의, 문학, 이해, 납득, 공감력, 사유, 깊이……

아마 지금의 내 머릿속에는 이런 것들로 엉망진창일 것이다. 딱히 엉망진창이라고 해서 나쁜 건 없다. 평소대로일지도 모른다. 늘 나는 재판했고, 재판 당했다. 그리고 동시에 나는 늘 처벌했고, 처벌 당했다.

"충분히 시간을 줬다."

"충분하지 않았다."

그 어느 쪽도 나다. 나는 아직까지도 내 정체성이 불완전하다. "나는 무엇인가?"와 같은 사유. 그런 건 지금이라도 빨리 버리는 게 좋을 것이다. 아마도. 이 세상을 살아가는 데에 있어서 그런 건 너무나도 사치스러운 일이다. 나는 그렇게 생각했지만 그건 자신의 의지대로 바꿀 수 없는 듯하다. 버리려고 해도 버릴 수 없다. 마치 내가 맨손으로 한쪽 팔을 버릴 수 없는 것처럼, 그런 간단한 이야기다.


나는 계속 자신을 점검하고 또 점검했다. 깨닫지 못했지만 일리 있는 해석이었다. 마치 해부하듯이 나는 나를 헤집어 놓고 있었다. 단어 선택이 또 잘못된 건가. 이런 현상은 몇 번이고 겪었다. 본심인지 실수인지 모를 말이 나온다. 거의 대부분은 그건 본심이라고 할 것이지만 나 자신이니까 잘 안다. 본심이 아니다. 마치 반쪽은 다른 사람에게 빼앗긴 것처럼 정반대의 내가 동시에 공존한다. 어쩌면 승부를 걸어볼 만한 기회일 수도 있겠다. 이런 일은 드문 일이니까. 반으로 갈려진 상황 속 예전의 나는 조금씩 줄어들어 간다. 하지만 다시 올라올 수도 있다. 두려우니까 이렇게 해설하고 있는 것이겠지. 이것 또한 나의 나쁜 버릇이다. 신기하다. 내가 지금 설명하는 이 현상이 아니라. 내가 방금 적은 그 문장을 말하는 것이다. 의식의 흐름대로 글을 쓰는 건 내게 있어서 이제 이상할 건 없다. 오히려 지금은 그게 나의 아이덴티티의 하나라고 생각하면 어떨까. 아무튼 '이것 또한 나의 나쁜 버릇이다.'라는 말은 보니까 내 글에서만 아니었다. 대문호의 글 속에서도, 얼굴 모르는 익명의 누군가의 글 속에서도 본 말이었다. 똑같은 말임에도 다른 영혼이, 다른 인생이 깃들어 있다. 그게 설령 비슷해 보일지라도 나 자신은 한 명이다. 그러니까, 같은 사람은 존재할 수 없다. 이건 표절과 다르다. 오마주도 아니며, 그저 공통적으로 생각난 말이다. 그렇지만 잘 들어본 적은 없다. '이건 나의 나쁜 버릇이다'라는 말은 어느 특정 심리에서 나오는 말이라고 나는 굳게 믿고 있기 때문이다. 당연히 이 말에는 약간의 자기 비판이 있다. 그건 선명하고 확실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자기 비판을 하는 모든 사람에게 공통적으로 발견된다고 하기에는 매우 추상적이다. 그래. 추상적이라서 더 조심스럽고 더 엄격했다. 내가 지금 이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그저 예시에 불과하다. 진짜로 이야기하고 싶은 건 복잡하지만 어떻게든 정리해서 말하자면, 한마디로 이런 현상은 결코 드문 일이 아니다. 하지만 그 이유는 모른다.


나는 원인과 이유를 듣고 싶어 한다. 결과를 듣고 싶은 게 아니다. 과정을 듣고 싶은 것과는 또 다른 문제겠지. '왜' 그렇게 된 건지 나는 묻고 싶다. 의혹이란 건 인생에 있어서 4개의 적 중 하나다. 지나치다는 걸 알면서도 나는 '왜'라는 질문에 대한 답에 도달하고 싶다. 무작정 그러면 그런 줄 알아라는 말에 나는 그냥 납득 못 한다. 이유와 원인을 알려주지 않으면 나는 움직이지 않는다. 아니, 움직일 수 없다. 이런 나를 완고하다고 고집을 세다고 하지만. 동시에, 예민하고 민감하다는 등 야릇한 말을 하지만. 그걸 또 섬세함이라고 말을 하지만 섬세함은 예리하다는 말인가? 예민하다는 말이 섬세하다는 말이고 섬세하다는 말이 예리하다는 말이면 나는 어느 쪽을 믿어야 하지? 나는 안심했다. 나의 필체는 바뀌지 않았다. 솔직히 딱히 필체라고 하기에도 뭐하지만 내가 말한 건 그리 거창한 의도가 아니었다. 그거면 된 거다. 좋다고 하지 않았다. 만약 좋다고 했다면 그저 격려만 해주면 된다. 이건 개인의 취급 설명서를 얘기하는 게 아니다. 나의 의식의 흐름대로 쓰인 글일 뿐. 그런데, 아무리 나의 이 필체는 바뀌지 않았다고는 안심해도 계속 신경쓰이는 게 가시질 않는다. 입은 다문 채 시선은 지금 이 글을 쓰는 화면에 향하고 손을 움직이고 있다. 아, 이 이인증 같은 현상은 뭐지? 오랜만에 이렇게 글을 써서 어색한 것뿐인 건가. 그게 더 현실적이고 논리적이겠지.


어쨌든 내가 계속 신경쓰인 것은 이거다. 지금 나의 말투와 필체로 본 제삼자의 시선에서는 어떻게 보일지. 사실 이런 건 드문 일도 아니다. 남의 시선에 신경을 쓰는 건 아주 오랫동안 해 온 일이다. 인간을 파헤치려는 욕구도 마찬가지다. 그런데 왜 자꾸만 이 언어, 단어, 말의 선택이 사람의 운명을 좌지우지할 수 있는 걸까. 지금 내가 말한 이 질문은 아마도 오래 전부터 가지고 있다가 우연히 완성시킨 말이라고 해도 좋을까. 그래도 이 질문은 흥미롭다. 언어마다 특유의 분위기가 있고, 단어마다 특유의 느낌이 있고, 말마다 특유의 성격이 있다. 그래. 이런 주제의 이야기가 나를 무겁게 만든다. 나의 전공임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걸 계속 할 수 없다. 나는 이렇게 믿고 있기 때문이다. 불편한 생활이었음에도 부족함 없이 좋아하는 것을 공부할 수 있었다는 말. 이건 분명 미래의 내가 다시 할 말 중 하나. 나는 조만간 이곳에 나와서 취업을 준비해야만 한다. 졸업 후 그 공백 기간 동안 지금처럼 그리 거창한 의미에서의 언어와 문학이 아닌 그저 취미로써 계속 공부라는 말로 시간을 보내는 것만으로도 족하다면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과거의 나는 말이 없다. 아무리 나 자신이라지만 '지나간 시간 속'에서 일어난 일은 고정불변이다. 사자(死者)는 말이 없다. 그게 딱 좋은 비유다.


하나 같이 씁쓸한 기억이다. 전혀 웃을 수 없다. 하지만 계속 웃고 있지 않아도 되고, 울고 있지 않아도 된다. 역발상은 때론 기적을 일으키는 걸까. 거창한 게 싫다. 문제가 되는 게 싫다. 민감하고 예측불가한 건 미래 그 자체 말고도 그 속에 있는 인간도 있으니까. 언어를 쓰는 같은 인간의 말에 좌지우지 되는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일 수도 있겠다. 거창한 게 싫으면 의미를 부여하지 않으면 된다. 문제가 되는 게 싫으면 문제로 삼지 않으면 된다. 사소한 걸 가지고 하나하나 불평을 늘어놓으면 그건 괜한 참견이라는 말을 들어도 할 말은 없어야 맞지 않을까? 아, 글자로 된 언어의 바다에 파도가 일렁인다. 하늘은 절망적인 색이다. 비바람이 엄청나다. 내가 탄 배는 미친듯이 흔들린다. 위태로울 정도로 일렁이는 풍경이 내 머릿속에서 비춰진 이유는 뭐지? 이런 걸 심상(心象)이라고 한다. 코끼리 상(象)인가. 분홍색 코끼리가 보이면 이미 어떻게 된 거라는 말과 비슷한 어떤 말을 들은 적이 있는 것 같지만, 자세한 건 모르니까 더이상 말해선 안 된다. 아니, 말하고 싶어도 말을 못한다. 아는 게 있어야 하지. 아, 그런가. 이런 건가. 이런 식으로 글을 쓰다 보면 스스로 깨닫는 이 순간이 나는 즐거운 것이고 쾌락과 유희로 받아들여지는 것이다. 하지만 어째서? 늘 의문을 품은 건 그쪽으로 가버리는 듯하다. 그저 자연스럽게 있기만 하면 된다. 그때의 나에게 충실하면 된다는 말을 이제야 조금 알 것만 같다. 내가 왜 위화감을 느꼈는지 알 것만 같다. 말로 하는 것보다 행동이 더 빠르다. 이건 진리다. 그리고 몇 번을 읽고 들어도 직접 해보지 않으면 모른다. 마지막으로 스스로 깨닫지 못하면 그 어느 것도 의미가 없다. 하지만 이런 건 삶을 살아갈 때는 절대 못한다. 할 수 있겠지만 결코 간단하지 않겠지. 물론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그리고 그 감상은 남이 어떻게 할 수 없다.


경험과 납득, 설득. 그런 것들이 서로에게 없다면 대화를 하는 건 무의미하다. 한 시라도 빨리, 아니 1초라도 빨리 대화를 끝내고 시간 낭비를 하지 않는 게 좋을 것이다. 반복된다고 깨달았다면 파악해야 한다. 그게 설령 남들보다 늦었다고 하더라도 결국 일을 시작하고 매듭을 짓는 건 나 자신이다. 거의 생면부지의 남은 그저 훈수를 둘 뿐. 물론 그게 나쁘다고 말하고 싶지 않다. 그것도 전부 나의 통제에서 벗어난 것일지니. 남을 어떻게 하고 싶다는 욕구는 정말 모르겠다. 나 자신을 어떻게 하고 싶다는 욕구부터 먼저 드는 나에게는 남을 설득하고 남에게 이해 받기보단 일단 나는 나 자신을 정리하고 싶다. 물론 아예 모르는 건 아니다. 주장을 펼치라고 했을 때 내 주장이 무시 당하면 납득 불가라는 신호가 오니까. 거기서 본능적으로 하게 될 일은 뻔하다. 여러 가설과 여러 상황을 세워놓고 생각을 해본다. 의도적인 긴장감과 자연스러운 집중력으로 하면 여유롭고 느긋한 하나의 오락이지만, 본능적인 긴장감과 의도적인 집중력으로 하면 그건 오락이 아니라 위기와 재난 상황 아닌가. 가끔씩 예외를 두고 와버리지만 알아채고 다시 이야기를 돌리면 이것만큼 참 따분한 시간 낭비는 없을 테지. 대단한 것도 아닌 걸 대단한 것이라고 믿게 될 것만 같은 유혹, 감정이 나는 두려운 것이다. 글과 나는 어떻게 보면 같지만 실제로는 다르다. 그렇지. 내 소원은 아마도 사고의 융통성과 유연성이었을 것이다.


얼마든지 만들 수 있었다. 자문자답으로든 뭐든 언어라면 만들 수 있었다. 이건 후회랄까 지금까지의 보고다.


나는 아무것도 되고 싶지 않다고 했었던가? 그래. 그게 좋은 거다. 과거의 나는 틀리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은 그저 생면부지의 기록자가 되고 싶다. 일상이지만 기록자라는 말은 요즘 있어서 가장 흥미로운 말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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