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을 써야 하는가 + 5월을 돌아보며
2023년 6월 11일 일요일, 곡성에서 핸내가
친구들에게 보내는 13번째 메일 '나로 살기로 핸내(나살핸)'
안녕하세요. 한 주간 어떻게 보내셨나요? 소식이 궁금하네요. 저는 할머니를 뵈러 제주도에 다녀왔어요. 수요일부터 일요일까지 제주도에서 머물다가 왔어요. 삼일 내내 코로나 검사를 받고 병원에 들러 할머니와 시간을 보냈어요. 집에 돌아와 미뤄둔 일을 하고자 책과 노트북을 들고 갔지만, 아무것도 안 하고 영화만 보다 왔네요. 덕분에 잘 쉬다 왔어요. 새로운 생각과 고민도 가지고 왔고요.
우려하던 때가 왔어요. 모든 것이 새로웠던 나날이 지나가고 드디어, 곡성이 삶의 현장으로 다가오기 시작했어요. 고작 4개월 밖에 안 지났는데, 개운하지 못한 상태로 하루를 보내버리는 경우가 많아졌어요(사실 이번 주는 절반 이상 곡성을 떠나있긴 했네요). 농번기가 다가와서 더 그런가봐요. 바쁠수록 자신만의 루틴을 잘 지키는 사람이 못 되는지라 마음이 휘청휘청거리네요. 그래서 그런지 요즘 무엇을 써야 할지 잘 떠오르지 않아요. 이전에는 틈틈이 생각하면 쓰고 싶은 것이 생겼는데 요즘은 잘 그려지지 않네요. 사실 미래에 대한 상상에 머무르느라 현재에 집중하지 못하고 있어요. 저는 어렸을 때부터 할 일이 많을수록 회피하는 성향이 두드러지게 나타났어요. 할 일을 쪼개서 얼른 해내기보다 미룰 수 있을 때까지 미뤘어요. 갑자기 어떤 연예인한테 빠진다든가 드라마를 정주행한다든가 하는 행동을 보였어요. 요즘도 그런 상태예요.
지금, 글을 쓰기 위해 이곳에서의 삶을 돌아보니 현재에 집중해야 할 필요를 느끼네요. 매번 미래에 머물 때가 많았는데 지금 여기서 느끼고 배우고, 맛보고 즐길 수 있는 것들을 충분히 누려볼게요.(다짐) 돌아오는 주 금요일부터 일요일까지 친구들을 초대해서 '모하지' 프로그램을 진행해요. 함께 모내기하고 밭 구경하고 불 피워놓고 놀아요. 다음 번엔 그 이야기를 가져와볼게요. 그리고 그 다음 번부터는 농사에 좀 더 집중해서 농사 이야기와 이곳 사람들 이야기를 적어볼까 해요.
수요일 오후 2시 10분, 집 근처까지 올라오는 버스를 타고 옥과터미널로 갔어요. 터미널에서 시외버스를 타고 광주로 넘어가 버스와 지하철을 타고 공항으로 갔죠. 무거운 백팩과 크로스백, 쇼핑백을 메고 갔어요. 지하철역에서 공항까지 걸어가는데 현타가... 오더라고요. 그간 명절이나 방학 때 서울에서 제주까지 백팩을 메고 캐리어를 질질 끌며 피곤한 상태로 오가던 날들과 곡성에서 서울에 다녀오던 날들이 떠올랐어요. 생각만 해도 힘드네요. 곡성에서 제주까지, 버스시간과 비행기 시간 모두를 착착 맞출 수 없으니, 밤 9시에 도착했네요. 자그마치 7시간이 걸렸어요. 공항에서 대기하는 동안 넷플릭스 시리즈 '사이렌: 불의 섬'을 보며 심심함을 달랠 수 있었어요. 스스로 선택한 삶이니 묵묵히 즐기면 좋으련만, 이날은 왠지 지쳤나봐요.
곡성에 오기 전, 떠도는 삶을 살고 싶다고 말했었어요. 여전히 비슷한 마음이고요. 하지만 제주도에 내려가서 생각이 아주 약간 바뀌었답니다. 드디어! 한곳에 오래 머물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아직은 좀 더 서성거리다가요. 인생은 한 치 앞도 모르니 더 재밌는 것 같기도 하고. 우리는 일 년 뒤에 어디서, 무얼 하고 있을까요?
네. 놀 거 다 놀며 농사지으려니 아주 시간이 부족하네요. 제주도에 가기 전, 양심상 오래전에 모종 냈던 식물들을 다 심어야 했어요. 지주대에 심을 오이, 참외, 수박, 수세미, 동부콩이요. 뭐하면서 살았는데 아직도 안 심었나 싶었어요. 제주도 가기 전날, 보리수확과 예초 작업을 하고 점심 먹은 후 영어수업을 들었어요. 오후엔 광주극장에 가서 영화 '말없는 소녀'를 보고 윤단비 감독님과의 씨네토크에 참여했어요. 사람들과 저녁을 먹고 집에 돌아오니 밤이 되었어요. 처음으로... 밤에 밭에 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동기 EC에게 헤드라이트를 빌려 밭으로 향했어요. EC도 함께 가주었어요. 밤에 밭에 가니 무섭더라고요. 그래서 그냥 집에 가겠다고 했어요. EC가 저를 붙잡아 한번 해보라고 했어요. 같이 있어줄테니. 그래서 무섭움을 조금 참고 헤드라이트 불빛에 의지해 풀을 매고, 모종을 옮겨 심었어요. '오? 생각보다 괜찮은데?' 어둡고 조용한 밭에서 팟캐스트 여둘톡을 틀어 놓고 농사지으니 꽤나 좋았어요. 시선이 분산되지 않고 불빛이 비추는 곳만 집중할 수 있는 것이 맘에 들었어요. 밤 농사 꽤 괜찮은데요?? 하지만 다음부터는 꼭 해가 떠 있을 때 마무리할래요. 벌레가 너무 날아들어요. 아참, 지난 기수에는 깨 터는 작업을 밤늦게까지 했었대요.
1. 이달의 노래: 새벽빛(다린) "다린님 공연 보러 가고 싶어요... 목소리만 들어도 위로가 되는"
2. 이달의 책: 소년이 온다(한강) "마음이 고통스러울까 걱정되어 미뤄두던 책"
3. 이달의 영화: 퀸의 뜨개질 "전주국제영화제에서 상영한 단편영화. 뜨개질하며 이야기를 꺼냄. 주인공의 다양한 감정이 잘 느껴져서 좋았음. 주인공의 모습이 경쾌하고 사랑스러워 보였음."
4. 이달의 음식: JS이 끓여준 채개장과 미역국 "JS의 요리 솜씨를 그대로 배운다면 매일 즐겁게 요리를 할 수 있을 것 같음. 내가 끓인 채식 미역국은 연두맛밖에 안 나던데, 어떻게 이리도 깊은 맛이."
+ 빵동아리에서 얻어 먹은 양파와 상추, 부추페스토 넣은 베이글 샌드위치도 정말 맛있었는데 말이지
5. 가장 많이 먹은 음식: 죽순 "죽순 사랑해!!! 죽순 찐맛을 여기 와서 처음 알았음. 식감 정말 좋음. 오징어회 느낌."
6. 가장 신났던 순간: 생일날 다 같이 '핸내가 좋은 이유' 누가 썼는지 알아맞힐 때
7. 가장 최악의 순간: 망우역에서 엘베랑 에스컬레이터 둘 다 수리중이었을 때, 어쩔 수 없이 계단으로 오르려는 노부부가 계단 앞에서 망설이는 모습을 보았음. "하나라도 제대로 수리되어 있었더라면 좋았을텐데, 지하철 이용 접근성을 확 떨어뜨려버리는..."
8. 가장 새로웠던 순간: 전주 숙소에서 영화제 자원봉사자 분과 대화 나누었을 때 "대학교 휴학하고 영화제 지프지기 자원봉사 해외 게스트 수행팀에서 일하신 분. 처음 봤지만, 대화가 잘 통해서 자기 전에 영화, 영화제, 서울살이, 전주, 지역이슈 이야기 나누다 잠들었음."
9. 가장 슬펐던 순간: '인간은 누구나 본연의 외로움을 가지고 있다.'라고 일기장에 쓴 날 "가족과 분리되어 살다가 오랜만에 연락하며, 할머니 몸 상태가 좋지 않으니 제주도에 내려오라는 전화를 받은 날이기도 함"
10. 가장 낭만적이었던 순간: 전주국제영화제에서 밤에 영화의 여운을 가지고 혼자 숙소에 걸어오는 길 "전주에 있던 모든 순간이 다 낭만적이었음."
11. 이달의 뿌듯함: 브런치 작가 신청해서 된 것
12. 이달의 움직임: '소년이 온다' 책 펼친 것 자체가 나에게는 꽤나 큰 다짐이었음
13. 이달의 반성: 현재 하고 있는 것, 느끼고 있는 것에 집중하자
14. 이달의 깨달음: 어디에서 살지도 중요하지만, 어느 곳에서 살든 삶의 방향, 지향점이 함께 고민되어야 함
15. 이달의 농사: 밭농사_ 모종 옮겨심기(호박, 고추, 곤드레, 명이, 가지, 컬리플라워, 청경채, 깻잎, 옥수수, 바질),고추 말뚝 박기, 양파 수확 / 논농사_ 벼 모종 덮어둔 부직포 걷어내기, 트랙터(로 뭘 한 거지)
16. 주차별 생각의 흐름
- 1주차) 전주국제영화제 다음 해에도 꼭 다시 와야지.
- 2주차) 농막 너무 좋다. 제주도 가고 싶다.
- 3주차) 홍대에 있는 요가원 다니고 싶다. 서울 재밌다.
- 4주차) 곡성에서 이렇게 사는 거 좋다. 바쁘다.
- 5주차) 생일!!! 재밌어!!!
17. 한문장으로 정리한 이번 달: 여기저기, 오락가락
오늘도 나살핸 덕분에 삶을 돌아볼 수 있었네요. 읽어주셔서 감사해요. 날이 많이 더워졌네요. 곧 물놀이 해도 되겠어요. 한 주도 건강히 보내시길 바라며, 이만 안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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