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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핸내 Dec 05. 2023

할머니 없이 보내는 첫 추석

할머니가 사무치게 보고싶은 밤

2023년 10월 2일 월요일, 곡성에서 핸내가
친구들에게 보내는 22번째 메일 '나로 살기로 핸내(나살핸)'
1991. 12. 5. 내가 태어나기 7년 전, 내가 좋아하는 할머니와 할아버지 사진

시작하며

구독자님, 반가워요. 이번 추석은 어떻게 보냈나요?? 반가운 얼굴도 많이 보고, 푹 쉬었나요?? 혹..시 오랜만에 만난 가족들의 잔소리에 고통받진 않았나요?? 않았다면 다행이에요. 저는 여느 때와 같이 제주도에 내려가 오랜만에 가족과 친구들을 만났어요. 다만 달라진 것이 하나 있다면, 더 이상 명절에 친할머니를 뵐 수 없다는 것이었어요. 추석 전날, 새삼 할머니의 부재가 실감 나게 느껴졌어요. 할머니께서 돌아가시고 꽤나 빠르게 일상을 회복했었는데, 명절이 되니 너무 보고 싶네요. 그래서 오늘은 이번 해 6월에 있었던 할머니의 장례식을 돌아보려고 해요.  






유난히 할머니, 할아버지가 보고 싶던 추석

할머니를 보내고 3개월이 지났다. 처음으로 친할머니 없는 명절을 보냈다. 이번 해 6월, 할머니께서 돌아가시며 더 이상 할머니 댁에 모일 이유가 사라졌다. 여전히 존재하는 할머니 댁과 그곳에서 쌓아온 할머니와 할아버지와의 추억, 할아버지의 일기장, 할머니가 만든 음식, 그들의 흔적이 남아있다. 할머니를 보내드렸던 6월을 떠올려 보면, 충분히 슬퍼하지 못했던 것 같다. 

2010.9.20. 10살 추석 때 할머니와 함께 송편 빚었었지.
2010.10.6. 멋쟁이 할아버지

(1) 할머니의 장례 소식을 접하고

곡성에서 친구들을 초대해 모내기 하는 프로그램을 하는 도중 소식을 들었다. 그 일정을 다 마치고, 심지어 조금은 여유 있게 내려갔다. 이미 할머니의 입관이 끝난 상태였다. 아, 착각했다. 제주도에는 '일포'라는 개념이 있는데 그날부터 외부 손님 받는 것이다. 나는 '일포'가 장례식이 시작되는 날인 줄 알았다. 그래서 그때 가면 할머니를 뵐 수 있을 줄 알았다. 분명 할아버지 돌아가셨을 땐 일포가 시작되고 입관을 했었다. 근데 웬걸... 비행기를 타러 공항에 갔는데 작은아빠가 전화 와서 "한나 언제 와? 할머니 지금 입관 하려는데."라고 말했다. 알고 보니 손님을 받는 일포 전에 가족들끼리 입관을 진행하는 것이었다.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었다. 이게 무슨 일인가. '왜지? 뭐지? 왜??? 왜 벌써??' 그 상황이 너무 혼란스러웠고, 소식을 접하자마자 내려가지 않고 그저 곡성에서의 시간을 더 보낸 나에 대해 후회스러웠다. 그리고 실망스러웠다. 부끄러웠다. (사실 그래서 그때의 기억을 조금은 덮어두고 싶어 한다.) 일포 전에 내려와야 한다고 알려주지 않은 부모님이 미웠다. 할머니의 마지막 모습을 보지 못한다는 사실이, 가족들과 함께 슬퍼하며 할머니를 보내드리지 못한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았다. 그리고 나는 어떻게 슬퍼해야 할지 잊어버린 것만 같았다.

2023.6.19. 곱닥한 우리 할머니


(2) 할아버지를 보내드렸던 날

2017년 11월 할아버지의 장례식, 당시 20살이었던 나는 친밀한 사람의 죽음을 처음 경험했다. 큰고모와 큰엄마, 작은엄마와 함께 제주도에 내려갔다. 정확히 말하면 비행기표가 없어서 겨우 공항에서 티켓팅해 어른 한 분씩 먼저 보내드렸다. 혹시나 비행기표가 없어 할아버지의 장례식에 참여하지 못할까 울며 조마조마해하고 계속해서 항공사 티켓을 확인했다. 탔다. 비행기에 타고 하염없이 울었다. 장례식장에 도착해 할아버지의 영정사진을 보고 믿기지 않아 또 울었다. 장례식 과정은 생각보다 유쾌했다. 몇몇 과정들 빼고는. 입관. 입관이 가장 슬펐다. 할아버지의 살결을 마지막으로 만져보던 시간. 할아버지는 깔끔한 모습으로 수의를 입고 계셨다. 너무나도 평온해 보이셨다. 나는 할아버지의 살을 만지는 걸 좋아했다. 얇고 주름진 할아버지의 목과 손등의 살을 만지는 걸 좋아했다. 마지막으로 만져보았다. 장례 기간 동안 가족들이 모여 할아버지를 추억했다. 할아버지의 삶을 돌아보며 좋은 분이셨다며 얘기했다. 누군가는 할아버지의 말투를 따라 해 보기도 했다. 그분을 추억하며 웃었다. 할아버지 덕분에 오랜만에 가족들이 모여 웃으며 이야기 나눌 수 있는 것이 고마웠다. 또 우리에게 좋은 기억으로 남아주셔서, 좋은 기억을 남겨주셔서 고마웠다.

2014.3.30. 할머니, 할아버지 사랑해!!

슬픔을 훌훌 털어낸 것 같았다. 기쁘고 감사한 마음으로 다시 서울에 올라왔다. … 하지만 그때부터 시작이었다. 혼자 지하철을 타고 기숙사로 돌아가는데 상상할 수 없이 아픈, 가슴이 뻥 뚫린 것 같은 슬픔이 밀려왔다. 알 수 없는 눈물이 쏟아졌다. 처음 겪는 친밀한 사람의 죽음이 너무나도 낯설었다. 그 슬픔을 어떻게 감당해야 할지 몰라 교회언니에게 연락했다. 처음 느끼는 깊이의 슬픔이라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제주에서는 가족들과 같이 있어서 괜찮았나 보다. 혼자서도 할아버지를 떠나보내는 시간이 필요한 것 같아."라고 언니는 말해주었다. 맞다. 소중한 이를 떠나보냈는데 괜찮을 리가 없었다. 충분히 슬퍼하고 슬퍼했다. 혼자 있기 힘들어 결국 큰고모네 집으로 가서 잠시 머물렀다. 그렇게 잘 먹고 잘 자고 고모와 함께 있으니 괜찮아졌다. 다시 일상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3) 할머니의 죽음에 온전히 슬퍼하지 못한 이유

할아버지의 장례 경험이 있었고, 인생사 사람은 모두 죽는 존재라는 것을 20살 때보다 26살인 지금 훨씬 잘 받아들이고, 복지관에서 일할 때 연결되었던 몇몇 이들의 죽음을 경험했었고. 그렇기에 할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보다는 덜 울고, 덜 아플 수 있었나 싶었다. 하지만, 사실은 응어리진 슬픔을 풀어내지 못한 채 갖고 있던 건 아닐까? 할머니의 장례 과정에서 슬프긴 했으나, 왜인지 형식적인 슬픔만 꺼내어졌던 것 같다. 마음이 이상했다. 마음을 마구 풀어내지 못하고 무언가 재고, 생각하고, 온전히 집중하지 못하는 것만 같았다. '입관 때 할머니를 못 봬서 그런가? 그때 함께 통곡하며 슬픔을 풀어내지 못해서 그럴까?' 잘 모르겠다. 어쩌면 할머니의 죽음을 온전히 받아들이지 못했다. 최근 블로그에 할머니의 장례식을 너무나 당연히 8월이라고 적는 나를 보며 깨달았다. 할머니의 죽음이 방금 막 일어난 일처럼 여전히 나에게 남아있다는 것을. 


할머니가 돌아가시기 일주일 전, 정말 다행히 할머니를 뵈러 갔었다. 할머니의 상태가 좋지 않으시니, 얼굴을 뵙는 게 좋겠다는 엄마의 얘기를 듣고 바로 비행기표를 끊었다. 농사일과 모하지 준비로 바쁜 시기였다. 그래서 약간 투덜대기도 했다. '한 달 뒤에 제주도 가는데 그때 가서 뵐까?'라는 생각이 불쑥 찾아왔지만 내려갔다. 내가 투덜댔던 게 너무 죄송하고 부끄러울 만큼 할머니는 나를 너무 반겨주셨다. 내가 제주도에 내려간 날, 할머니는 몇 번이고 언제 오냐며 기다린다고 간병인을 통해 전화가 왔다. 이 글을 쓰며 내가 온전히 슬퍼하지 못했던 이유를 조금은 알 것 같다. 나는 할머니에게 미안하다. 할머니를 뵈러 기꺼이 가지 못했던 것과 돌아가신 소식을 접하고 바로 내려가지 않은 것에 대해. 부끄럽고 미안해서 그때의 일을 다시 꺼내어 보기 어려웠다.


(4) 유난히 보고 싶던 밤, 어릴 적 밭을 거닐던 기억을 꺼내어 보아

추석 전날 밤, 못다 한 음식을 했다. 산적꼬치를 끼우다 문득 할머니가 생각났다. 보고 싶어서 눈물이 났다. 방으로 들어가 할머니와 함께 찍은 사진을 보며 그리운 마음을 살폈다. 분명 지난 설날까지만 해도 할머니와 함께 식사를 하고 가정예배를 드리고, 껴안을 수 있었다. 할머니가 없는 추석이, 할머니 집에서 모일 이유가 없어진 추석이 서운했다. 그분의 존재가 얼마나 커다랬는지 느껴졌다. 그분은 나를 정말 사랑하셨다. 할머니 댁에 가면 할머니는 늘 나를 안으며 반겨주셨다. 꼬부랑 허리를 가지고 있어 할머니에게 폭 안기기는 어려웠지만, 나름대로 따뜻하고 포근한 품이었다. 할머니를 껴안아 토닥토닥하면 꼬부랑하고 딱딱한 허리뼈가 만져졌다. 세월의 흔적이 담겨있는 몸이었다. 


그렇게 새벽 내내 할머니, 할아버지와의 추억을 끄집어내 보았다. 할머니께서 살아계실 때 종종 안부 전화를 주셨다. 통화 내용은 매번 비슷했다. 안부를 물으시고, 너무 늦은 시간에 돌아다니지 말라고, 늘 기도하고 있다며 잘 지내라고 말씀하신 후, 사랑한다고 하시며 전화를 마무리했다. 요즘 전라남도에 살면서 할아버지, 할머니 생각이 많이 난다. 버스에서 할머니들이 얘기 나누는 걸 들으면 할머니 말투와 너무 비슷해서 불쑥불쑥 할머니 생각이 난다(친할머니, 친할아버지는 아빠가 5살 때쯤 전라남도에서 제주도로 이주했다고 한다.). 그리고 이번 해에 농사를 처음 배우며, 농부였던 할아버지의 삶과 쫄랑쫄랑 밭에 따라다니던 어린 시절의 내가 떠올랐다. 


할아버지 오토바이 앞뒤로 동생과 내가 올라타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밭에 갔던 기억, 까끌하고 시원한 돗자리가 구석에 깔린 농막에서 할아버지가 라디오 주파수를 맞추던 장면, 넓은 밭을 이리저리 오다녔던 기억, 창고 옥상에 사다리 타고 올라가 아래를 내려다봤던 기억, 바람을 막기 위해 심어진 엄청 큰 키의 나무, 귤밭, 시멘트 내리막길, 숨바꼭질하면 재밌을 것 같은 밭 구조(해본 적은 없다! 어린 나에게 밭이라는 공간이 얼마나 크고 흥미롭게 느껴졌을까??), 여름이면 육지에 사는 가족들까지 다 내려와 개울 건너 평상에 앉아 밥을 먹던 장면, 시멘트로 만들어진 물 받아두는 곳에서 수영하면 재밌겠다고 생각했던 기억, 봉선화꽃을 따다가 사촌들과 봉선화물 들였던 기억, 엄마 따라 귤 따서 할아버지에게 칭찬과 용돈 5천 원을 받았던 기억, 아침이면 그 누구보다 부지런히 챙겨 밭으로 향하시던 할아버지, 할아버지 방, 할아버지가 끓여주셨던 이제껏 제일 맛있는 라면.  


이미 내가 중학생 때 할아버지께서 연로하셔서 농사를 그만두셨다. 그 이후로도 밭으로 유지되다가 언젠가부터 태양광 발전하는 곳으로 바뀌었다고 한다. 이제 그분들의 삶과 모습은 우리의 기억과 사진 속에만 남아있다. 그렇기에 더 아련하고 소중한 것이겠지.

2001. 4살 때 할머니댁에서

그들에게 받은 무한한 사랑과 기다림도 과거의 것으로 남게 되었다. 존재할 때 좀 더 누리고 베풀 걸 하는 아쉬움이 조금은 남는다. 하지만 그 사랑이 여전히 내 몸과 마음, 그리고 영혼에 남아 나를 이루고 있다고 생각해 본다. 하염없이 흘렀던 사랑과 관심을 더 이상 받을 수 없지만, 그 간의 받은 것들을 감사히 기억해야지. 






마무리하며

시간을 쪼개 세 번에 걸쳐 할머니와 할아버지 얘기를 적어보았는데요. 쓰는 내내 눈물을 참기도 하고, 왈칵 울어버리기도 했네요. 이런 시간이 저에게 너무 필요했던 것 같아요. 그리고 저는 내일 지리산에 가요. 2박 3일로 지리산 종주를 해요. 하루에 8시간, 12시간, 6시간 정도 걷는다는데 산행 경험이 많이 없어 걱정되기도 하네요. 그렇지만 "핸내는 종주 충분히 할 수 있을 것 같아."라는... 이웃들의 말을 믿으며 포기하지 않고 한 번 다녀와 볼게요. 모두들 편안한 밤 되세요. 남은 연휴 편안히 쉬고요! 



사진으로 남기는 일상

(1) 923 기후정의행진 ; 위기를 넘는 우리의 힘 

농촌, 농민의 목소리를 낼 수 있어 좋았다. 


(2) 멀리 떠나는 친구 배웅

사진첩 만들기 / 마지막날 밤 스우파도 보고 / 차 마시다가 밤 새서 20분 자고 비행기 타러간 날


(3) 제주도 가기 전 곡성에서

송편 빚기 / 배추에 제충국 뿌리기 / 상리단호박과 가지


(4) 아름다운 제주

올레 7코스를 걸었다.

외조부모님댁도 농사를 지으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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