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만자의 일기, 아만자의 신앙 일기
만 24세에 처음 발병하여 8차례의 항암과 9시간의 대수술 이후 1년 만에 발견된 전이와 재발. 또다시 시작된 9번의 항암과 다시 3개월도 안 되어 발견된 반대쪽 가슴의 암, 수술을 앞두고 검사하다 폐에서 발견된 다량의 물로 급하게 결정된 늑막접착술. 갑자기 커진 난소의 혹에 양쪽 가슴과 양쪽 난소 전절제를 결정. 그 이후 다시 1년 좀 넘었을까. 이번에는 간과 뼈에 나타난 다발성 전이. 그 후로 45차의 항암을 진행하고, 발견된 뇌전이. 다시 한번 사이버 나이프를 진행하고, 1년 뒤에 다시 발생한 뇌 전이와 재발. 그리고 계속 이어진 78차 항암.
자세히 쓰지도, 누락한 과정들도 있는데 참 길다. 여튼 저 과정들을 겪으며 죽음에 대해 생각하고, 죽음이 가까이 다가왔다고 느낀 적도 많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죽음’은 내 예민 버튼이 되었다. 특히 타인의 입에서 나오는 죽음에 대한 이야기는 예민하지 않은 나에게 가장 큰 예민 버튼이 되었다.
어제의 설교에서도 나의 예민 버튼이 눌려버렸는데, 어제 설교는 ‘믿음의 여정’이라는 제목의 히브리서 11장 7절부터 12절까지의 말씀이었다. 설교를 요약하자면 믿음의 여정은 확실한 길, 보이는 길이 아닌 보이지 않는 길이다. 노아가 ‘아직 보이지 않는 일’에 부르심을 받아 100년 동안 방주를 만들었던 것처럼, 아브라함이 “갈 바를 알지 못한 채” 떠나갔던 것처럼, 사라가 ‘단선하였으나’ 잉태할 수 있을 얻었던 것처럼 믿음의 여정은 보이지 않는 길이며, 불가능해 보이는 길을 가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가 해야 할 것은 ‘기다림’이다. 기다린다는 것은 믿음을 완성시키는 것이 ‘우리’가 아닌 ‘하나님’이라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무기력하게 기다려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본문의 12절에서 ‘죽을 것 같은 한 사람’에 대한 얘기가 나오는데, 여기서 죽을 것 같은 한 사람은 소망이 끊어져버린 사라이다. 사랑의 소망은 끊어졌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하나님의 일을 하신다. 이것이 바로 부활의 소망이고, 부활의 힘이다.
말씀만 들어보면, 참으로 위안이 된다. 하지만 나는 나를 위한 것 같은, 나를 위해 하신 것 같은 이 설교 말씀의 아주 작은 부분에 붙잡혀 절망을 느끼고 울어버렸다. 그것은 믿음의 길은 보이지 않는 길, 불가능해 보이는 길, 그것이 죽음의 길이라고 할지라도, 삶을 다 바쳐야 한다고 할지라도 우리가 가야 할 길이라는 말씀이었다. ‘죽음의 길’, ‘삶을 다 바쳐야 한다는 것’ 이 얼마나 무겁고도 무거운 말인가. ‘그 말의 무게를 아는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죽는다는 것이 단순 생명을 잃는 것이 아니라 그 죽음까지 가는 길이 괴롭고 괴로워서 죽음을 바라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다는 것을 그들을 알까? 삶을 바친다는 말의 그 무게가 얼마나 무거운지 다들 알고 하는 말일까?’ 목사님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나의 예민 버튼이 눌러져 그곳에서 빠져나갈 수 없었다. 눈물만 나왔다.
얼마 전에 중간 검사 결과에서 뇌에 있던 것이 조금 더 커졌다는 소식을 들었기 때문일까? 아니면 정말 고통스럽다 못해 죽음을 바라는 소중한 사람들을 곁에서 봐왔기 때문일까? 늘 죽음은 나의 예민 버튼이었고, 오늘도 눌려버렸다. 그래서 셀모임 때 이야기를 나눴고, 나눴던 얘기들과 설교 말씀을 다시 정리하면서 회고해보니 나를 상처주려기 보다 오히려 나를 위로해주려고 한 나를 위한 말씀과도 같았다.
다른 사람들의 말에 상처받지 않고자, 그들이 하는 말은 의도를 먼저 파악하면서 하나님이 하시는 말씀은 왜 의도보다 단어에 상처받게 될까? 하나님의 말씀을 늘 오해하고, 하나님의 뜻을 늘 두려워한다. 그럴 때마다 되뇌는 말씀 구절이 있다. “하나님은 선하시고, 인자하심이 영원하시다.” 하나님은 선하셔서, 나를 괴롭히지 않으시며, 하나님은 인자하셔서 괴롭고 힘들어하는 날 도우신다. 이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하는데, 늘상 까먹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