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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JK Apr 14. 2023

차가움 속의 따뜻함

나의 아저씨

이지안에게 가족이란, 할머니. 박동훈에게 가족이란 삼 형제, 어머니, 후계 사람들, 아들 그리고 아내.

드라마 안에서 이지안도 박동훈도 가족을 지키려 애쓴다.  


이지안은 할머니를 살리려 자신의 몸을 내던진다. 할머니를 위해서는 칼도 잡는다. 할머니의 밥을 위해서 음식을 훔친다. 맞아가면서 할머니를 지킨다.


박동훈은 형과 어머니를 위해 한 손에는 과일바구니를 한 손에는 망치를 잡는다. 자신의 후배와 바람피운 아내에게 저녁마다 뭐 사갈지 묻는다. 그 후배를 때리면서도 절대 아내에게 먼저 얘기하지 않는다.


이들은 가족을 지킨다. 그러다 자신을 버린다.

이지안은 할머니를 지키려 살인자가 될 만큼. 그리고 박동훈은 고된 침묵으로 바람피운 아내를 감쌀 만큼.


그들은 가족 때문에, 가족을 위하다, 상처받은 마음들을 스스로 꽁꽁 싸매고 덮은 채 살아간다. 그러다 문득 그 마음을 알아주는 사람을 만났을 때 말할 수 없는 위로를 얻는다.


“나 같아도 죽여. 내 식구 패는 새끼들은 다 죽여. “

멀리서 들려오는 박동훈의 한마디에 이지안이 무너진다. 평생 안고 살아온 짐이 누군가의 말로 인해 덜어진다.


“아무것도 아니에요.”

아내의 불륜을 형제들이 알아버려 한없이 무너져가는 박동훈에게 이지안의 문자 한 통이 숨을 쉬게 한다.


박동훈은 작디작은 몸에 커다란 짐을 지고 살아온 이지안이 불쌍하고, 이지안은 자신의 인생을 꾸역꾸역 견뎌내려는 박동훈이 불쌍하다. 누구 하나 주위에 알아주는 사람 없는 두 사람이 서로를 알아봐 준다.


“누가 날 알아. 나도 걔를 좀 알 것 같고.”

“좋아?”

“슬퍼.”

“왜?”

“나를 아는 게 슬퍼.”


이 드라마를 보는 시청자들은 이지안과 박동훈 같은 삶을 살지 않았어도 마음이 저리고 눈물이 난다. 다들 마음에 덮어둔 자기만의 짐이 있어 그러지 않을까 싶다. 가족에게도 말할 수 없는, 오롯이 자신이 견뎌내야 하는 짐. 어쩌면 그 짐이 대부분 가족에게서 오지 않을까. 그래서 더 무겁고 버거운 것 아닐까. 이지안과 박동훈처럼.


그래도 버릴 수 없다. 그 짐은 끝까지 이고 지고 간다. 세상에서 이리저리 치여도 그 짐 때문에 살아간다. 그 짐이 어찌 보면 삶의 원동력이 되어간다. 가끔 더 무거워지기도, 한결 가벼워지기도 하지만 우리에게 가족은 그 자체로 우리 삶의 이유다.


이 드라마는 차가움 속에 따뜻함이 스며들어 있다. 차가운 삶에 박동훈과 이지안은 서로에게 따뜻함이 되어준다. 세상이 말하는 사랑이 아닌, 나이와 성별을 떠난 그 너머의 위로가 되어준다.


우리는 우리만의 아저씨가 필요하다. 그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는 것을 그냥 알아주는 존재. 자신의 짐을 꽉 쥐다가 자신을 버려 버릴 때 그러지 않게끔 잡아주는 존재.


“너 나 살리려고 이 동네 왔었나 보다. 다 죽어가는 나 살려 놓은 게 너야. ”

“난.. 아저씨 만나서 처음으로 살아봤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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