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기구 4] the master of my fate

by 한나

정상적인 생활습관. 상담과 약물치료. 이 모든 것들에도 여전한 결론. 이성이 이끄는 결론. 자살. 벗어나지 않으려 노력하지 않은 것도 아니다. 내가 항상 옳다고 생각하는 안하무인의 사람도 아니다. 운동을 하거나 햇볕을 쬐거나 정신과에 가보지 않은 것도 아니다. 정신과의 북적거리는 대기실에서 내 불행마저도 조금도 특별하지 않음을 여실히 느끼며 진료시간이 어서 다가오길 바란 적도 있었다. 인상 좋은 의사에게 ‘삶이 납득이 안된다’는 간단한 설명 대신 구구절절 내 삶에 대해 털어놓기도 했다. 나는 그저 합리적인 선택을 하고 싶을 뿐인데. 그 의사가 나에 대해 눈곱만큼도 관심 없지만 나의 돈을 받고 진료를 하는 것처럼…

모두가 그렇듯이 내 삶은 그러니까 비유하자면 우선 물건을 사기 전에 가격표를 먼저 보듯 선택을 하기 전에 가격표를 꼼꼼히 살펴봐야 하는 거다. 한참을 뒤적거리다 마음에 드는 선택을 내려놓고는 했다. 어떤 선택은 쳐다도 보지 못한다. 생각조차도 할 수 없다. 그리고는 이 상황이 몇 년째 이어져 더 이상 가격표를 보지 않아도 모든 선택에 가격표를 만들어내게 된다. 고작 나를 지탱하기 위해 온갖 값을 계산해야 했고, 나는 수학을 잘 못하니 계산은 잘 맞지도 않았다.

이 과정이 고통스러운 건 차치하고 살고 있다는 느낌을 받고 싶었다. 이건 숨이 붙어있는 거지 살고 있는 게 아니라는 생각이 종종, 아니 자주 들었다. 살아있는 순간을 모아두면 일 년이 되려나. 아니, 한 달도 채 되지 않을 것 같았다. 그리고 그게 죽음보다도 더 두려웠다. 의식에서 무의식으로 가는 마지막 순간까지도 저는 그걸 후회할 것 같았다. 가엾다기보다는 분노의 감정에 가까운 감정이다. 그건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나의 방어기제다.

어릴 때 서울에 있는 어린이 대공원이라는 곳에 간 적이 있다. 스스로 바퀴를 굴려야만 돌아가는 놀이기구를 탔다. 기구가 낡아서 코너를 돌 때마다 두 줄의 철 구조물에 의구심이 잔뜩 들고 중심이 쏠리는 기분이 들어 역했는데 내가 발을 구르지 않으면 나아가지 않아 정말 공포스러웠다. 내 인생은 늘 그런 기분이었다. 구토할 것 같은 기분을 누르고 발을 구르고 조금이라도 나아가려는 노력말이다. 근데 어디론가 향하고 싶다는 마음에서 비롯된 게 아니고 그냥 도피하고 싶은 마음에서, 그 부끄럽고 해명하기 어려운 감정에서.

성인이 되고 나서 나는 엄청나게 배신감을 느꼈다. 아버지가 만든 세상이 나에게 살며시 본모습을 드러내면서도 여전히 거짓말을 해서다. 나보고 뭐든지 할 수 있다고 그랬다, 아버지는. 어떤 위인의 생가나 조각상이나 그런데에 데려가면서, 아니면 어떤 유명한 여성 인사를 가리키면서 늘 그랬다, 너도 저렇게 될 수 있다고. 근데 한 번도 제가 그렇게 되고 싶은지 물어보거나 왜 그래야 하는지는 납득시켜주지 못했다. 그리고 나는 어렸지만 그런 면에서는 똑똑했다. 그건 명백히 사실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딱히 내가 비관론자여서가 아니라 실제로 인간은 많은 걸 할 수 없잖아.. 그런데도 그 세상은 나에게 그랬다.. 넌 음료수를 고를 수 있어. 콜라, 제로콜라, 라임콜라, 체리콜라... 그래서 내가 답했다. 저는 밀키스가 좋은데요? 그러니까 그는 답이 없었다. 그리고는 잠시 기다리다가 되레 화를 내며 말했다. 너는 선택지가 아주아주 많다니까? 콜라, 제로콜라, 라임콜라, 체리콜라, 위스키랑 섞어먹을 수도 있고... 정말이지 복에 겨웠군. 철없는 소리는 그만하라고. 그래서 나는 밀키스를 원한다는 걸 말하는 걸 그만뒀다. 콜라를 좋아해야 하는 데 그렇지 못한 나를 이따금 채찍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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