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 년의 주령구 13
주머니를 뒤적였다. 목이는 항상 내 주머니나 가방에서 뭐가 나올지 정말 궁금한 눈치였다.
그 애에게 지금의 시간 그리고 목이가 그렇게 된 시간 이후의 시간을 계속 말해주는 건 내가 보여주는 책이라든지 경주박물관의 팸플릿 이라든지. 어디에서 프린팅 해온 자료들이었으니까
나와 같은 또래의 이 아이는 그래도 옛날 사람은 옛날 사람인지 스마트 폰으로 보여주는 글자보다는 실제로 종이에 인쇄든 글을 편안해했다. 이 아이에게 맞춰보려고 어느 날엔 죽책 모형 같은 걸 대충 만들어서 보여주긴 했지만 몇 번 도르르 말고 펴면서 그 이야길 했다.
"종이가 확실히 편해. 네가 보여주는 그 스마트폰 영상 볼 땐 막 빠져드는데 계속 다른 거 보다 보면 내가 처음에 뭘 보려 했는지도 잊어버려. 그리고 지쳐서 그냥 나무속으로 들어가고 싶어"
"네가 확실히 옛날 사람 맞다"
"옛날부터 지금까지 살아있는 사람이 더 정확해"
"은근 깐깐하구나"
"역일을 배우다 보니 그렇게 되었어. 사람들 오고 가고 돈과 먹을거리가 오고 가고 하니까"
나는 가방에서 내가 만지작 거렸던 주령구를 보여줬다.
목이의 표정이 미묘했다. 일단은 손에 받아 들었다. 그러나 찬찬히 살폈다.
"우리는 이걸 술자리에서 벌칙게임하는 주사위 정도로 알고 있어. 지금도 술게임 하는 사람들이 칼을 집어넣으면 튀어나오는 해적이 담긴 술통이라든지 뭐 그런 걸 하거든. 노래를 크게 부르고 벌주를 마시게 하고. 이게 맞는 거야?"
목이는 쪼그려 앉아 내 앞에서 주령구를 굴렸다.
<유범공과(有犯空過) >라는 문구가 나왔고
나는 주령구 살 때 받았던 종이 설명서를 읽었다. 덤벼드는 사람이 있어도 가만히 있기.
목이의 표정이 싸늘하게 변했다.
"이건 꼭 돈염 같았어. 절반은 맞고 절반은 틀리고 또 절반은 드러내고 절반은 감추고. 맞아. 술자리 게임. 먹을 곡식도 부족한데 그걸 갈아서 빚고 술독을 가득 채워서. 엉망이 되도록 마시고 자주 사람을 괴롭혀. 그중 하나가 나였고. 주사위를 굴려대며 낄낄 거리며 좋아했어. 저게 나오면 거기 초대된 높은 사람들이 무슨 짓을 하든 가만히 있어야 했고. 때론 나보다 한참 어린아이들을 거기서 수발과 시중을 들던 사람들 몰아놓고 그랬고. 때론 못 버티고 도망치면 돈염이 끌어내어 발길질하고 그다음엔 또 그러고... 그런데 그건 절반이야. 때론 저걸 가지고 놀 때 똑같은 모양의 조금 작은 저 물건을 내 입에 넣어놔. 보통은 괴롭힘 당할 때 또 남에게 그러는 걸 못하겠다 버틸 때 때리기 전에. 피와 비명을 다 먹은 저 물건."
말도 못 하게 미안했다.
"내가 괜히 가져왔다."
"아니야. 이 말을 누군가에겐 해야 덜 답답할 거 같았어. 누가 그 일을 믿어주겠어. 그들은 저 짓을 하고는 또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나라의 큰 일을 논하고 때론 만왕이 구휼미를 베풀 때 옆에서 돕기도 했어. 물론 그 구휼미 몇 달 그렇게 퍼 나르는 게 맘에 안 들었는지. 부호부인과 각간이 무슨 말을 해서 멈추고 말았지만. 그리고 너는 이 말을 거짓말이라고 생각 안 하잖아."
"강제로 몸에 칼댄 거 온갖 짓 당한 거. 그거 너도 힘든 이야기이인데 굳이 그걸 지어낼 이유가 없고. 지금 네가 나한테 무슨 돈을 받겠어? 뭘 하겠어? 바라는 게 없는 눈이야 넌"
"그 말이 아프네. 그런데 안심도 돼. 맞아 절반은 놀이용이야. 그러나 저 물건의 나머지 절반의 용도 때문에 내가 혹은 괴롭히던 사람이 저 물건을 입에 물고 있어야 했어. 그렇게 모든 일이 끝나면 돈염이 그 물건을 뱉게 해. 저 연회라고 부르는 사람 괴롭히는 짓은 낮에는 일어나지 않아 주로 술시(저녁 7시부터 오후 9시)부터 분주하게 준비하고 해시(저녁 9시부터 11시)에 본격적으로 월성의 월지에서 가장 화려하게 꾸민 높은 사람들이 모여 못할 짓들을 해. 각간은 그 모임에 단 한 번도 빠진 적이 없어. 때론 부호부인마저 지치거나 치를 떨며 갔을 때도 돈염과 함께 있었다. 그리고 마무리는 자시(밤 11시부터 다음날 오전 1시) 이때 돈염이 그 주령구들을 수집해. 돈염이 일하기 시작하는 시간은 축시(새벽 1시부터 새벽 3시)야. 시종들이 신당 안을 정리를 싹 해놓으면 그때부터 이 입에서 뱉은 주령구들과 사람의 피. 죽인 짐승에서 떼어고 빼낸 것들을 싹 다 올려놔.
그다음에 저 주령구들을 그릇에 놓고 흔든 뒤에 그중 하나를 피에 넣고는 빼낸다. 돈염은 그 귀한 종이를 물 쓰듯 썼는데 그렇게 그 종이 위에 주령구를 굴려서 마지막으로 그 종이에 찍힌 글자로 점을 봤어."
"그걸 너 보는 앞에서 다 했다 이거지"
고갤 끄덕였다. 이게 무슨 짓들인지 모르겠다. 그리고 생각보다 목이가 많은 것을 그나마 걸러서 이야기했구나. 이 이야기가 나오기까지 일단은 가릴 것은 가렸구나 싶었다. 그냥 말로 듣는 것만으로도 피냄새가 진동했다. 갑자기 목이가 나무를 등지고 서서 허공에 숨을 훅 불어내고는 가만히 기다렸다. 특별히 가부좌를 틀거나 손으로 어떤 제스처를 취하지 않았는데도 무척이나 집중하는 느낌이 확 와닿았다. 목이가 나를 돌아보았다.
"너는 지금 이 시간의 이야기를 네가 가진 스마트폰으로 보여줬잖아. 생각해 보니 내가 이렇게 말하는 것보다는 실제로 보여주는 게 더 이해하기 쉬울 거 같다."
목이가 가만히 보았던 허공에 무슨 창문 같은 게 생겼다. 창살은 전혀 없고. 그 상황을 그대로 비추는 듯한... 그리고 나는 바로 그 '돈염'이라는 자와 눈이 마주쳤다. 실제 얼굴은 보지 못했지만 목이가 표현했던 그 느낌에 그가 돈염이라고 확신했다. 순간 깜짝 놀라 뛰어가려 했다. 그때 목이가 내가 입고 있었던 후드티의 모자를 잡았다.
"아 그 사람 너 못 봐. 우리가 보고 있는 것도 알지 못해. 실제로 말을 걸기를 바라야 할 수 있어. 그냥 네 손에 든 스마트폰의 영상 같은 거야"
찬찬히 살펴봤다. 인시, 새벽 3시와 5시 사이에 그 돈염이라는 사람이 입었던 화려한 가사. 신라시대의 옷이 저렇게 화려했구나. 왕도 저렇겐 못 입었을 거 같다는 느낌. 그리고 그 동물의 내장과 피를 결국 자기가 다 먹고 마셨다. 춤인지 짐승이 몸짓인지 알 수 없을 정도의 빠르고 이상한 몸놀림. 이빨을 드러내며 꽁꽁 묶여 앉아있는 목이에게 죽일 듯 달려들다가 또 물러나는 게 꼭 멧돼지 같았다. 석회가루를 발랐는지 하얗고 창백해 꼭 시체처럼 보이는 옆에서 북을 치는 조수 같은 사람. 그리고 거기서 절규하고 울어대는 그때 그 천 년 전의 목이의 얼굴과 목소리를 들었다. 북소리는 점점 강해지고. 그 소리가 목이의 목소리를 삼켰다. 그리고 그 모든 푸닥거리가 끝나자 고요한 달빛이 그 신당을 비췄다. 사람들의 목소리들이 가득했다. 그러나 형체가 없었다. 왜 나를 파묻었냐. 왜 우리 아이를 괴롭혔냐. 우리 아이를 죽였냐. 그 목소리와 함께 안개처럼 가득했던 것을 돈염이 호리병 속에 담고 있었다. 딱히 뭘 하지 않아도 그 병을 갖고 곳곳을 돌아다니면 그 속으로 모든 게 빨려 들었다.
그 장면을 끝으로 그 허공의 틈은 다시 아무 일도 없었던 듯 그냥 허공으로 돌아왔다.
"저 짓을 2년 동안 했어. 그리고 항상 부족하다 부족하다 한 것 같아. 과거로는 부족하다. 이후의 피와 절규가 필요하다라고. 그때도 이해를 못 했지만 지금도 이해가 안 가"
"나는 네가 저걸 어찌 버텼는지 이해가 안 가"
"달빛"
"응?"
"저기에서 엄마와 처음 제대로 만나서 이야기했고. 엄마가 달이 뜨면 모든 걸 마치고 오면 내가 어릴 때 부르던 노래를 불러주곤 했어. 웃기게도 저 주령구에 있는 말인데 '월경일곡'이라고 달을 비추는 거울이라는 곡이 있어. 서로 엉망인 얼굴로 그 엄마가 불러주는 그 노래를 듣다 보면 눈물이 나오다가 잠이 푹 오더라."
그 노래가 궁금하다고 불러달라고 말하기엔. 목이가 너무도 지쳐 보였다. 목이도 곧 밤이니 위험하다고 산에서 내려가라고 했고.
산에서 내려와 집으로 오니 어느새 저녁을 지나 밤이 있었고 내 방의 창문을 열었다. 그 천 년 전 목이가 고통 끝에 보았던 달빛처럼 가장 크고 둥근달이 보내주는 빛이 방 안에 가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