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향인 카피, PT회사에 입사하다

어쩌다 보니 프레젠터 1

by Dolphin knows

[지금부터 할 이야기에 대해]

'어쩌다 보니 프레젠터'는 9부작 정도로 예상하고 있습니다.

독서, 음악 감상이 취미인 매우 평범하고 아무렇지도 않고 예쁠 것도 없는 사철 피곤한 한국인. 본 투비 내향인이 카피라이터를 거쳐 PT기획자로 그리고 직접 경쟁피티에 떠밀려 나가 수주하기까지의 과정을 말씀드립니다.

사회생활 하다보면 누군가 억지로 PT 시키고 하기 싫은 발표자리에 나갈 상황에 처하실텐데, 그때 이 이야기가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길요.



취미가 뭐예요? 독서, 특기가 뭐예요? 피아노... 아니 음악 감상.

정말 그랬다. 그냥 얼버무리려고 쓴 말이 아니고. 체육이나 과학상자 조립 같은 고기능, 고지능이 필요한 특기가 없었거든. 피아노라고 하려 했다가 어릴 적 엄마와 피아노 선생님에게 연습 안 한다고 엄청 혼난 기억에 그것도 그냥 '음악 감상'이라고 했다. 안전한 선택. 그러나 진심이었다.


부모님 둘 다 바쁘시고 가성비 좋은 취미를 원하셔서 그랬다.

아빠가 사법 고시 준비하면서 쌓아뒀다가 사시 그만두고 취업하시면서도 미련을 못 버리고 그대로 둔 책이 집에 가득 + 고모가 사준 전집류까지 일단 있는 자원을 잘 활용하는 방법이 '독서'였다. 소음도 적고.

또 엄마가 회사 합창단서 반주하고 교회에서는 성가대 지휘했던 분이라. 네. 피아노는 어릴 때 어쩔 수 없이 배우고 들었어요.


두 유 노 '너드(NERD)?' 이 모자는 라쿠텐에서 현재 판매 중이다.

https://global.rakuten.com/ko/store/liberalization/item/nerd/


대한민국은 내향인을 만들기에 최적의 환경이다. 일단은 뛰어노는 것보다는 가만히 앉아 책 보는 것을 좋아하는 어른들 이 대부분이잖아. 그리고 나의 경험이 그랬다.

어릴 땐 조금은 달랐다.

내향적이라기 보단 '궁금해요. 왜요?' 하는 그냥 알면 안다고, 모르면 모른다고 하는 초등학생.

특히 수업시간에 뭔가 궁금한 게 있으면 손을 들어 선생님께 질문을 하거나, 아는 게 있으면 안다고 대답했다.

특별한 의도가 없었음에도. 그 뒤로 꽤 오랫동안 괴로웠다.

반에서 짱 먹던 그룹에게 끌려가 두들겨 맞고, 집단 괴롭힘을 당한 뒤로. 확실히 알게 됐다.

'나서지 말자. 그래야 좋을 게 없다.'


눈 감고, 못들은 척 하고 입을 닫으면 된다.


손만 내리고 입을 닫으니 친구가 생기고 성격 좋은 애로 받아들여졌다.

반 친구들이 귀여워했고, 같은 반에서 편지도 주고받았다. 그때는 이해할 수 없었다.

장거리도 아니고 왜 단거리에서 편지를 보내지? 편지를 받고는 답장을 안하니 친구가 삐쳤다.

그래서 답장을 썼더니 풀렸다. 그렇게 시간이 가고 난 참 많은 걸 배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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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책만 들입다 파다가 선택한 게 문예창작학과, 그리고 나와서는 출판사에 있다가 모 기업의 카피라이터로 전직을 했다. 그렇게 카피라이터로만 주욱 살다가 2010년대 초반 즈음. 프레젠테이션 전문회사인 줄도 모르고 한 기업에 입사를 하게 된다. 분위기 좋은 소규모 회사에서 '카피라이터'를 뽑는 줄 알았거든.

회사 대표님도 좋고 분위기는 좋았는데 일이 정말로 랜덤이었다. 고마우신 갑님 덕. 일을 받아오면 언제 킥 오프(Kick-off)미팅을 중간 자료는 언제 받을지, 또 언제 컨펌 일지. 이게 참. 종잡을 수가 없었다. 우리한테 일을 시키시는 분도 큰 덩어리의 조직에서 움직이는 분이라 힘들었을 거다. 지금에야 이해하는데, 그때는 참... 그랬다.

그것도 정부 공공기관과 큰 기업의 발표자료를 기획한다면 이 랜덤성은 극대화 된다.


너무나 낯설었던, 프레젠테이션 자료 기획하기


내가 하는 일이 바로 그 발표자료를 기획하는 것. 필요하다면 홍보자료의 카피도 같이 하는 거였는데...

이봐요. 대표님. 제가 장표(프레젠테이션 자료를 구성하는 각 페이지)를 만들어봤어야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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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근 후 일주일 뒤에 바로 정부기관 주요인사 보고 건이 떨어졌고. 첫 주부터 주말 야근을 했다. 디자인 팀에 넘겨주기 전에 막 던져주신 로 데이터(Raw data)를 읽고 또 읽어서 맥을 잡아내고 덩어리를 만들어 내용을 분류해서 재 조합했다. 죽을 거 같았는데, 어찌 시간이 지나 보니. 되더라. 하긴 그렇게 시간을 보내면 누구라도 했을 거다.


아, 말 안 하고 넘어간 어릴 적 취미가 있었다.


하나는 블록 조립, 또 하나는 책 가시 뼈 발라내기


동생들이랑 레고를 조립해서 뭔가를 만들면서 시간을 보냈고, 지금도 나오는지는 잘 모르겠는데, 렉스 블록 이라고 레고보다는 블록 하나하나가 매우 단순한 모양과 두 가지 색으로 구성되어 있다. 일종의 H자로 생긴 픽셀. 그리고 그 픽셀의 중간을 끼워 연결하는 하얀 선. 이걸로 무한대로 응용이 가능하다.

레고 중 흑기사 시리즈, 스타워즈 시리즈 등등이 테마별로 그림이 정해져서 그걸 채우는 느낌이라면.

렉스 블록은 큰 픽셀을 머릿속에 좌표를 짜서 배치해서 뭔가를 만들어내는 거였다.





이상하게도 이 프레젠테이션을 기획할 때는 렉스 블록의 추억이 떠올랐고, 그게 도움을 줬다.

로 데이터(Raw data), 즉 가공되지 않은 데이터는 이거 저거 다 섞여있긴 한데 그걸 자세히 들여다보면 각자 규칙적으로 블럭화 되어 구성되어 있는 게 보인다. 뭐 그러려면 일단은


자료를. 잘. 봐야. 한다.


이게 죽을 노릇이지. 시간은 틱톡 틱톡 가는데, 장표는 안 채워지고.

그런데 이게 없으면 블록을 찾을 수 없다. 블록을 찾을 수 없다면 조립은 아예 불가능하다.


그리고 문단 나누기.

위에도 말했던 가성비 좋고 소음이 덜 나는 취미가 독서라 어른들이 권장했고, 적어도 책을 볼 때는

아무도 날 건드리지 않았다. 그래서 혼자 책을 보다가 내용을 덩어리 짓기 시작했다.

예를 들면 푸른 수염을 볼 때 나는 생선에서 가시를 발라내는 놀이를 하고 있었다.



어린이의 정서 함양(?)에 큰 도움을 주는 동화 푸른수염



푸른 수염-순진한 처녀-죽은 여자들-처녀의 언니-오빠


이건 인물에 대한 거였고


성-다락방-망루-처녀가 살던 마을-성


이건 장소에 관한 것


살인자가 만든 덫-희생자 후보의 등장 -희생된 시체들의 발견-조력자의 정보 전달- 최종 조력자 '완전한 해결'


이게 전체 사건에 관한 등뼈였다.


이게 로 데이터 분석과 등뼈 잡기에 도움이 될 줄은 몰랐다. 결국 나는 출근 후 다다음날 받은 자료를 분석해서 주말에 나와 1차 기획서를 다 해냈다. 나중에 그 기관 공무원 분들 윗분들의 의견이 반영되어 수정을 거쳤지만. 그 회사에 들어와 처음으로 '프레젠테이션 자료'를 만들어 낸 첫 번째 경험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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징그럽고 싫은데, 이상한 중독성이 있었다.


나 이상한 놈 맞나 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