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의 런던은 여름이란 계절이 무색하게 쌀쌀했다. 한국에서 저녁시간에 출발했지만 한여름 무더위 탓에 난 반팔 티셔츠에 반바지 차림이었다. 날씨 탓인지 히드로 공항 출구를 나서자 코끝이 시렸다. 내 나이 서른에 첫 장거리 해외여행이었다.
대학 시절, 유례없는 국가부도사태를 경험하며 부모님의 사업 실패 후 길거리로 내몰린 가족들을 위해 생활 전선에 뛰어든 나였다. 가족이 뿔뿔이 흩어졌고, 아직 고등학생이던 동생을 책임지는 가장이 되어 학업과 일을 병행했다. 다행히 그 시절 난, 과외를 통해 꽤 많은 돈을 벌고 있었고, 생활비와 학비를 벌고도 멀리 계신 부모님께 돈을 보내드릴 수 있었다. 그렇게 6년 만에 대학을 졸업했다. 평생 갚아도 탕감이 불가능해 보였던 부모님의 사업 빚은 IMF사태 이후 십이 년이 되던 해에 모두 갚을 수 있었다. 사업은 한순간에 기울기도, 회복되기도 한다. 의식주를 해결하기 위해 다람쥐 쳇바퀴 돌 듯 반복적인 삶을 살던 내게 대학을 졸업한 후의 삶은 그야말로 지옥이었다. 열심히 살았지만, 왜 더 열심히 살지 못했냐는 비난이 돌아왔다. 남들은 번듯한 데 취직해서 부모 호강 시켜 준다는 데, 난 왜 이제야 미래에 대한 고민으로 방황하는지. 이해받지 못하는 나날의 연속이었다. 우울증으로 무기력한 날을 보내는 시간이 길어졌다. 회사 출근은 고사하고 대부분의 낮 시간 동안 잠들어 있거나 울거나 멍하게 창 밖을 내다보았다. 딸의 우울증이 밖으로 알려질까 두려웠던 부모님의 제안(같은 강제)으로, 떠밀려, 죽지 못해, '유학 중인 딸'이 되기 위해 런던행 비행기에 올랐다. 인생을 송두리째 바꾼 긴 여정의 시작이었다.
도착 첫날 런던의 숙소에 짐을 푸니 적막함이 몰려왔다. 그리고 한참을 울었다. 떠밀려 온 유학이 억울해서였던가. 혹은 십 년 만에 다시 찾아온 첫사랑을 거절하고 먼 길을 떠나온 나 자신이 한심 해서였나. 아니, 조지아에서 온 옆 방 여자애가 밤새 울어 나도 따라 울었던 것 같기도 하다. 꺼억 거리며 대성통곡으로 출발한 나의 런던 생활. 그러나 울었던 이유조차 희미한 첫날밤의 기억을 뒤로하고 곧 희한하고도 흥미로운 반전의 하루하루가 펼쳐지기 시작했다.
인생에 다시없을 화려한 시절, 이란 이런 것일까. 영어를 하는 나는 다른 인격의 탈을 쓴 사람처럼 말하고 행동하고 웃고 떠들었다. 기본적으로 혼자 있는 시간을 통해 에너지를 충전하는 성향이 바뀌지는 않았지만, 한국에서는 상상할 수 없었던 새로운 나의 모습을 계속해서 발견해 나갔다. 주체적으로 행동한다는 것, 의 만족을 알아버린 나는 숨겨둔 날개를 펴듯 매일 조금씩 날아오르고 있었다. 아침에 눈 떠서 잠들기까지 내 생활의 모든 결정을 내가 한다는 것. 그 결정의 사이사이 어느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는다는 것. 영어 인격은 내게 '자유' 그 자체였다. 그 언어가 주는 간결하고 구체적이며 모호하지 않은 특징이 좋았다. 공유된 믿음이나 숨겨진 의미를 신경 써가며 눈치껏 행동하지 않아도 되는 그들의 문화가 편했다. 평생 동안 부모 눈치를 살피며 싫어도 싫은 내색 없이 그들이 원하는 답만을 주어야 했던 내가, no를 no라고 말해야만 다음의 대화가 이어지는 문화 속에서 서서히 정체성과 주체성을 찾아가고 있었다. 그렇게 한 번 내 것이 된 것들을 다시는 포기할 수 없었다.
런던 생활 2년 만에 난 다른 사람이 되어 있었다.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솔직하게 이야기하고, 예의 바르지만 정확하게 불만을 전달하고, 필요하지 않다면 과감하게 노땡큐를 하는 사람. 다른 사람 심기를 건드릴까 싫어도 참는 일이 다반사였고 혹여 나쁜 사람으로 보이면 어쩌나 노심초사하며 무조건 예스만 하던 과거의 나는 이제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다. 다니던 대학원에서, 집을 계약하는 부동산에서, 세탁소에서 슈퍼마켓에서 심지어 온라인상에서도 나는 똑 부러지게 내 의견을 전달하고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협상했다.
귀국할 때마다 나를 아는 모든 이가 나를 보고 변했다는 말을 하기 시작했다. 친구, 가족, 친구의 친구들, 자주 가던 가게의 직원들, 내가 유학 갔던 걸 몰랐던 사람들조차, "어딘지 모르게 분위기가 바뀌었어요"란 코멘트를 하기 일쑤였다. 입고 다녔던 옷을 입었고 헤어스타일이 바뀌거나 화장을 한 것도 아니었는데 그랬다. 우울해하던 딸이 더 이상 울지 않는다는 사실에 기뻐한 것도 잠시, '아니요'를 연발하기 시작한 딸을 달가워하지 않았던 부모님은 나에 대한 통제력을 유지하기 위해 이런저런 계획들을 내어놓기 시작했다. 내 미래에 대한 구체적이고 강압적인 플랜이었다. 돌아가고 싶은 곳이 있어서였을까, 더 이상 그들의 분노나 협박이 두렵지 않았다. 중요하지도 않았다. 그래서 돌아갔고, 이후로도 4년을 더 머물렀다.
런던에서 '나'를 찾아가는 여행을 하는 동안, 지금의 남편을 만나 재양육을 통해 생애 최초로 정서적 안정감을 경험하는 동안, 삐걱거리던 삶의 불균형 조각들이 균형을 찾아 모두 제자리로 돌아갔다. 그동안 내가 얼마나 성장했는지 돌이켜 본다. 삶에 대한 열정으로 달떠 하루하루가 꿈 같이 흘러간 그곳, 그 시절. 난 성장한 걸까 다시 태어난 걸까. 내가 거기서 해낸 것이 무엇이든, 이제 곧 다시, 그곳으로 돌아간다. 내 인생에 다시 한번 꽃과 같이 아름다운 시절이 오길 바라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