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모 옆에 그림처럼 앉아 있기,는 내가 잘하는 것 중 하나였다. 나의 부모는 나의 그런 점을 늘 칭찬해 줬고, 그럴 때 나는 내가 그들에게 사랑받는 존재일 수도 있구나 잠시나마 안도했다. 난, 네 살 때 엄마가 하지 말라고 하는 걸 했고, 더 하고 싶어 했다는 이유만으로 입에 거품을 물고 발작을 일으킬 때까지 맞았다. 그 이후로 행동이 교정됐으며 그림처럼 앉아 있는 일이 가능해졌다. 그때부터였을지 모른다. ‘나’라는 사람이 별로 중요하지 않고 그저 부모의 ‘착한 딸’로만 살아가다 이 생을 마감하는 게 나을 거라 생각한 게.
내가 예닐곱 살이던 무렵, 엄마는 나를 극장에 데리고 갔다. 영화를 보는 내내 너무 무서워서 공포에 질린 채 숨을 죽이고 있었다. 쉬지 않고 심장이 쿵쾅거렸다. 너무 무서워 어딘가로 도망가 버리고 싶었지만, 영화 자체보다, 그만 보고 싶다고 얘기했을 때의 엄마의 반응이 더 무서워 참았다. 무시무시한 소재들이 등장하는 영화 '에미'는, 여주인공의 딸이 인신매매를 당해 사창가를 떠돌다 구출되지만 결국 자살을 하는 등의, 어린아이가 겪어본 적, 들어본 적도 없고, 이해조차 할 수 없는 이야기들로 가득했다. 영화보다 더 생생히 기억에 남는, 극장을 나설 때 엄마의 코멘트, "거봐, 엄마 말 잘 들어야겠지?" 지금의 내 나이보다도 훨씬 어렸던 그 당시 나의 엄마, 얼마나 무지했던 것일까? 어린 나는 괜찮았을까?
1988년 겨울, 엄마는 큰 딸인 내 앞으로 장문의 편지만을 남겨둔 채 사라져 버렸다. 엄마 눈 밖에 나지 않기 위해 원하는 걸 말해본 적도, 떼 한 번 써본 적도 없는 어린 나를 두고 그렇게 종적을 감췄다. 학교를 다녀와 인기척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 집 안으로 들어서는 어린 내가 보인다. 안방 상 위에 놓인 편지를 읽어 내려가며 눈물조차 흐르지 않을 정도로 절망한 아홉 살의 나, 당찬 글씨체로 내 이름을 부르며 시작하던 두장의 편지, 희미하게 들어오는 불빛조차 서러웠던 영등포 다세대 주택의 암울함, 이 모든 그날의 기억이 너무나 선명하고 슬퍼서, 난, 한 달 뒤 엄마가 돌아왔을 때 전혀 기쁘거나 안도하지 않았다. 고사리 같은 손으로 미역국을 끓여가며 엄마를 기쁘게 해주고 싶었던 순수한 마음이 철저히 배신당하고 짓이겨지며, 잘못한 것이 없는 내가 부부싸움의 피해를 고스란히 떠안는 이상한 경험을 통해, 난 앞으로 살아갈 세상이 얼마나 잔혹하고 냉정 할지를 어렴풋이 깨닫게 된다. 아빠의 사과와 다짐을 받아낸 엄마는 기세등등 돌아왔다. 돌아와서도 나에게 어떤 사과의 말조차 하지 않았다. 엄마가 떠날까 봐 두려웠던 난 더욱더 예민하게 그녀의 눈치를 살피며 비위를 맞추었다. 그렇게 ‘감정 쓰레기통’으로서의 삶이 시작되었다. 자존심이 세고 자존감이 낮은 엄마는 다른 사람이 우리의 불행을 눈치챌까 두려워 어린 나를 붙들고 그녀가 가진 모든 삶의 고민을 털어놓았다. 너무 싫은 아빠와 살 수밖에 없는 이유, 큰 딸인 내가 어떻게 엄마 인생에 걸림돌이 됐는지, 아빠는 어떤 거짓말을 하며 사는지, 엄마를 괴롭히는 친척들은 누구인지 등등 왜곡된 렌즈로 바라본 엄마의 세상은 참담하고 황폐했다. ‘너만 안태어 났어도 내 인생이 이렇게 되진 않았을 텐데’란 엄마의 말을, 열 살의 어린 내가, 목구멍이 뻐근해질 때까지 울음을 참으며 삼키고 있었다.
이십 대 후반의 나는 방 창문을 늘 열어두고 살았다. 아파트 9층은 뛰어내리기 적당해 보였다. 무서웠지만 눈 딱 감고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어떤 날은 엄마가 보는 앞에서 내 뺨을 마구 내려치기도 했다. 코피가 나도록 때렸지만 마음이 아픈 것에 비하면 벌겋게 부어오른 뺨쯤이야 하나도 아프지 않았다. 그 시절을 돌이켜 보면 난 내가 조금 가여웠던 것 같기도 하다. 자기 연민마저 없었다면 아마 창문을 열어 두고 살았던 2년 중 어느 하루, 홀가분하게 모든 걸 내던져 버렸을 것이다. 외국으로 보내져 엄마와 물리적으로 떨어지기 전까지 나의 하루하루는 연민과 충동을 오가는 혼란의 연속이었다.
결혼 후에도 엄마의 감정 학대는 멈출 줄 몰랐다. 엄마에 따르면 그녀가 나를 용서할 수 없었던 중요한 이유가 있는데, 내가 엄마의 사위인 내 남편에게 나의 불안과 그 불안의 근원인 ‘엄마의 가출’을 이야기했기 때문이었다. 실수를 인정하고 과거를 사과하고 싶지 않았던 엄마는 나를 몰아세우는 쪽을 택했다. 2017년의 마지막 날, 제야의 종소리를 들으려 가족 모두 모인 날, 엄마는 술을 핑계로 나를 향해 쌓아 둔 분노를 다 쏟아내기 시작했다. 한국말을 못 알아듣는 남편과 제부는 굵은 눈물을 뚝뚝 흘리고 있는 나를 보며 안절부절이었고 동생은 연신 엄마에게 ‘그만 좀 해' 소리치는 것으로 그녀의 폭주를 막아보고자 애쓰고 있었다. 엄마가 던지는 아픈 말들을 다 받았다. “너만 없어지면 우리 모두 행복할 텐데. 네가 제일 문제잖아, 우리 가족 중에. 너만 없으면 돼.” 한마디 받아치지도 못한 채 그렇게 삼킨 말들로 2018년 내내 아프다가 결국 그 해 가을 안면대상포진을 앓았다. 얼굴이 만신창이가 된 나는 밤새 아이를 위해 이런저런 준비를 해 두고 아이와 함께 자고 있던 남편에게 병원을 다녀와야 한다는 메시지를 남겨둔 채 새벽 5시 응급실로 향했다. 바로 입원이 결정되고 열흘 간 병원에서 지내야 했다. 항바이러스제를 투여했지만 삼 일간은 심해지기만 했다. 아이와 영상통화가 불가능해 목소리만 들어야 했다. 병원을 들른 부모님은 의사에게, “그래서, 애 얼굴이 돌아올까요?”란 질문만 서너 번을 하셨다. 회진 나온 의사는 내게 안면대상포진은 예후가 좋지 않으니 더 나빠지지 않기를 기도하라고 했다. 왼쪽 눈이 흐릿했고 신경을 따라 왼쪽 얼굴 전체에 심한 수포가 올라와 있었다. 수포는 일주일이 지나자 가라앉기 시작했다. 염려되었던 왼쪽 눈도 다행히 시력만 약해졌을 뿐 큰 외상없이 포도막염 진단만을 받았다.
상처가 낫는다. 예전보다 나아지는 건 없다. 그냥 예전처럼 돌아올 뿐이다. 하지만 나는 변한다. 더 이상 예전의 내가 아니다. 기적적으로 큰 흉터 없이 안면이 진정되어 갔다. 퇴원을 하고 집으로 돌아가자 눈물을 글썽이며 남편과 아이가 달려 나온다. 작고 반짝이는 보석과 돌을 좋아하는 아들이 소중하게 간직해 둔 보석함을 내밀며 말한다. “내가 제일 사랑하는 건데, 엄마 가져.” 그때 나는 다짐했다. 더 이상 누군가의 쓰레기통으로 살지 않을 거야. 이제 나에게 중요한 건 지금 내 눈앞에 있는 아이와 남편, 그리고 나 자신이야. 난 이제 예쁜 것들만 담을 거야. 아이가 소중한 것들을 작은 보석함에 모으듯, 나도 따뜻하고 예쁜 기억들을 모아 간직해야지. 난 쓰레기통이 아니야, 나는 소중한 사람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