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필로그
그 어떤 신비로운 가능성도 /
희망도 찾지 못해 방황하던 청년들은 /
쫓기듯 어학연수를 떠나고/
꿈에서 아직 덜 깬 아이들은 /
내일이면 모든 게 끝날 듯 /
짝짓기에 몰두했지/
난 어느 곳에도 없는 나의 자리를 찾으려 /헤매었지만 갈 곳이 없고 /
우리들은 팔려가는 서로를 바라보며 / 서글픈 작별의 인사들을 나누네
브로콜리 너마저 <졸업>
그리고 또 이 시대의 수 많은 청년이 떠난 것처럼, 그 시대의 흐름에 별로 혁신적이지 않게, 그러나 내 안에서 싸우며, 나는 18kg 배낭을 등에 지고 여행을 했다. '여행' 이제는 비교적 흔한 말이다. 별다를 것 없다. 그렇게 수많은 다국적 ‘세계일주 여행자’들을 보았으니까.
그 모든 낭만 실천가들은 왜 떠났고 어디로 향하고 있던 걸까. 우리는 모두 비슷한 말을 하며 비슷한 곳을 응시하고 있던 걸까? 그렇다면 우리의 삶은 여행을 통해 보다 자기자신답게, 혁신적으로 바뀔 가능성을 가졌나. 우린 왜 이러한 시대 안에서 비슷한 양상을 보이며 이 길 위에 마주친걸까. 그렇게 맹목적으로 끌려오듯 살아가다 지쳐 떠났던 여행은 우리 세대의 어떤 특징을 말해주고 있는 것일까. 모두는 여행을 통해 어떤 성장을 했나. 찾아 헤매던 그것을 만났을까?
여행을 다녀온 뒤 현실이 변하진 않았다. 내가 가져야 하는 현실의 문제는 대책 없이 떠났던 그 시절의 걱정만큼이나 꼭 같이 고스란히 내 눈앞에 놓여있었고, 내가 직면해야 할 것들은 나를 떠나가진 않았다. 삶의 무게가 가벼워진 것도 아니고, 얻는 것이 있으면 잃는 것도 있듯 나의 현실적 이력서 한 장 아래는 공백기가 생겼고, 곁에 있던 사람들이 그때까지도 함께 있지 않았다.
여행을 통해 그 모두의 타성을 완전히 저버릴만큼의 현실적 대책을 구축하지 못했다. 그렇게 여행의 후유증과 살아갈 현실의 간극에서 헤매어야 했으며, 다시 '세련된 모두의 옷 입기'가 기대되었다. 나이가 듦과 동시에 내 삶에 대한 책임감이 한켠 늘어나고, 이제 너의 자유를 다 했으니 사회적 책임을 다하라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행은 내 삶의 한 경험, 그리고 기억의 파편으로 자리 잡아가며 벌써 추억의 창고에 쑤욱 들어가버린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확실한 것. 이 여행은 이제 내가 살아가는 방법의 핵심을 1도 정도 바꾸어주었다. 헤쳐온 시간의 내공이 일상의 걸음걸이를 더 할 근력을 주었고, 하루 하루에 대한 의지를 더해 주었다. 시간은 두뇌를 통한 이해 너머 경험을 통해 구석구석 잔근육같이 각인되었다. 그렇게 앞으로의 삶의 궤도가 슬쩍 바뀌었음을 느낄 수 있다.
계속해서 가면 어딘가에 도달하리라는 밑도 끝도 없는 사상이었다.
돌 하나가 자신의 전부를 다해 날아가는 것, 죽으면 가벼운 운구가 되기를 바란다.
류시화
그 모든 각자의 여행을 응원하며
「야생고양이」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