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채색의 위로 16
나는 쥐를 정말 싫어한다. 정확히 말하자면 쥐가 무섭다. 내가 생각하는 쥐의 가장 무서운 점은 언제 어디서 튀어나올지 모른다는 것이다. 그들은 집집의 하수구나 배수구마다 잠입해있을지도 모른다. 쓰레기봉투 안에서 뭔가를 갉아먹다 갑자기 고개를 내밀고 돌진해올 수도 있고, 건물의 층과 층 사이의 얇은 틈을 떼로 분주히 기어 다니다 들킬지도 모른다. 주로 어디서 활보하는지를 예측할 수 있는 비둘기나 고양이들과 달리 쥐들은 전혀 기대하지 못했던 곳에서 예상치 못하게 튀어나온다. 얼마 전에도 아파트 앞에서 나와 마주친 한 놈이 살이 오른 몸뚱이를 화단에 급히 숨기는 걸 보고서는 다리가 풀려 그 자리에 멈춰선 기억이 있다. 녀석들은 이미 인간들의 높고 거대한 안식처인 아파트마저 점령해버린 걸까?
내가 가진 쥐와의 가장 무서운 기억은 부모님을 따라 시골로 이사를 갔던 중학교 방학 때의 일이다. 어느 날 부모님 없이 집을 혼자 지키게 된 나는 하필이면 문 앞에 펼쳐놓았던 쥐덫에 쥐가 잡혀 있는 것을 발견했고 그날 하루 종일 문 밖으로 나가지 못했다. 쥐는 덫에 잡혔다고 쉽게 죽지 않았고 이렇게 죽을 수는 없다는 듯 있는 힘껏 몸을 움직여대며 덫에서 벗어나려 발악하고 있었다. 사실 사람들이 쥐를 싫어하는 이유는 다양하다. 꼬리가 너무 길고 발에 털이 없어서, 혹은 더럽고 징그럽게 생겨서. 하지만 내가 그 날 쥐를 격렬하게 무서워하게 된 건 꼬리도 발도 뚱뚱하고 기다란 몸 때문도 아니었다. 죽음 앞에서 그 쥐가 내지르는 비명 때문이었다. 그건 어디서도 들어본 적 없는 소름끼치는 소리였다.
그렇게 잡혀 있는 쥐를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혼자 몇 시간동안 나와의 사투를 벌인 후 겨우 쥐덫 위에 상자를 뒤집어씌우는 데 성공하고 나는 문 앞에 주저앉았다. 쥐는 여전히 그 자리에서 잡힌 채 온몸을 움직이고 있었지만 그 형체가 눈에 보이지 않으니 조금 살 것 같았다. 하지만 상자에 가려 보이지 않아도 그 쥐가 내는 소름끼치는 소리는 나를 미치게 만들었다. 아직도 그날만 생각하면 온몸의 털이 쭈뼛거린다.
내가 경험한 바에 따르면 쥐는 소리를 잘 내지 않는 동물이다. 나는 잘 알려진 대로 ‘찍찍’거린다는 쥐의 소리를 별로 들어본 적이 없다. 쥐는 어디서 어디로 가는지 알 수 없이 조용히 움직였고, 말수가 적었다(?). 그러니 우리가 그들의 존재를 짐작할 수 있도록 만드는 건 소리 소문 없이 터져있는 밀가루 봉지나 고요히 찍혀있는 발자국뿐이었다. 그 때 거기엔 쥐덫에 걸리지 않았더라도 분명히 쥐가 있었다. 나는 그걸 알 수 있었다. 하지만 나는 맘속으로 쥐가 끝까지 덫에 걸리지 않기를, 우연히 나를 마주치지 않기를 바랐다. 그렇게 내 눈에 보이지만 않는다면 쥐가 없다고 믿으며 살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쥐가 없다고 믿고 싶었기 때문이다.
대학생활을 하러 서울로 올라온 후에도 나는 줄곧 도시의 쥐들을 마주쳤다. 차에 깔려죽은 쥐, 하수구로 사라지는 쥐, 쓰레기봉투에서 빠져나와 내달리는 쥐. 내가 쥐와 마주칠까봐 겁이 나 더욱 예민하게 반응하기 때문일까. 한 번은 사람이 가득한 신촌 식당가에서 서둘러 숨는 쥐떼의 뒷모습을 봤다. 순간 온 몸의 신경이 곤두서 한 발짝 움직이지도 못하고 있는데 같이 있는 사람 중 누구도 그 쥐떼를 보지 못했다고 했다. 이후에도 내가 도심 한복판에서 쥐를 마주친 이야기를 할 때마다 친구들은 도대체 어디서 쥐를 본 거냐며, 이런 사람 많은 도로에 무슨 쥐가 있냐며 의아해했다. 친구들은 아무리 곳곳을 다녀도 그렇게 쥐를 자주 본 적이 없다는 거였다.
하필이면 쥐를 무서워하는 내 눈에만 그렇게 쥐가 보이니 나는 무척이나 억울했다. 하지만 지금은 내가 쥐가 있다는 것을 믿기에 그들이 더욱 내 눈에 잘 띄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나는 지금 이 순간에도 어마어마한 쥐떼들이 우리 인간들 몰래 도심을 활보하고 있다고 믿는다. 도심의 쥐를 직접 보지 못한 사람들은 다들 내 말을 웃어넘길 뿐이다. 하지만 보이지 않는다 해서 없는 것은 아니다. 그렇게 믿고 싶을 뿐이다.
어떤 믿기지 않는 것들이 우리 주변에 명백히 존재하고 있다. 신부터 가난한 이웃의 비참한 삶과 사람 사이의 사랑과 혐오까지 보이지 않는 것들이 모두 버젓이 존재하고 있다. 나는 그 존재들을 믿는다. 그리고 그 존재들을 본다. 결국 있다는 믿음, 혹은 없다는 믿음, 그것이 바로 있어도 보지 못하는 사람과 보는 사람이 가진 차이점이 아닐까. 예상치 못한 곳에서 쥐를 마주칠 때마다 나는 그런 생각이 든다. 오늘도 너의 존재를 믿는 나의 믿음이 널 만나게 했구나. 그러니 아무리 없는 것 같아도 일단 있다고 믿어보자. 어느 날 도적처럼 전혀 예상하지 못한 곳에서 튀어나온 쥐떼가 소름끼치는 소리를 내지를지도 모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