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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코칭공학자 이한주 Aug 23. 2020

세상은 누구를 중심으로 움직이나?

코페르니쿠스, 칸트, 그리고 아들러

그는 실존주의 정신 운동의 선구자다. 그가 성취하고 달성한 바는 코페르니쿠스의 발견에 버금간다.

'죽음의 수용소에서'의 저자이자 로고 세라피를 창시한 빅터 프랭클이 한 말이다. 여기서 [그]는 누구일까?


   그는 프로이트, 융과 함께 세계 3대 심리학자로 불리는 알프레드 아들러다. 워낙 유명하고 현대 심리학에 끼친 영향력이 크기 때문에 후배 심리학자가 그렇게 칭송할 수 있겠다고 생각했는데 더 깊은 뜻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알프레드 아들러


   알다시피 코페르니쿠스는 지구를 중심으로 천체가 돈다는 천동설을 부정하며 우주관의 엄청난 변화를 이루었다.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이라는 말은 칸트가 '순수이성비판'을 통해 이룬 인식론 혁명을 강조하는 의미로 처음 사용했다. 칸트는 대상이 존재하는 대로 우리가 인식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어떻게 인식하느냐에 따라 대상이 존재한다는 의식의 전환을 주장했다.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전제를 뒤집는 패러다임의 혁명을 이루었다.


   그렇다면 빅터 프랭클은 왜 아들러의 이론을 코페르니쿠스적 발견이라고 표현했을까? 세 가지 측면에서 동의한다.

   첫 번째, 당시 지배적이었던 프로이트의 이론에 따르면 인간의 삶은 유아기의 성장 경험에 의해 결정된다. 이를 정신 결정론이라고 한다. 그러나 아들러는 이를 거부하고 인간을 목적을 추구하는 존재로 보았다. 그에게 인간은 자기 의지로 목적을 향해 성장하는 존재였다.


   두 번째, 프로이트는 인간을 원초아, 자아, 초자아 등으로 쪼개어 분석했지만, 아들러는 온전하고 통합적인 존재로 인간을 이해했다. 아들러 심리학을 개인심리학-Individual Psychology라고 하는 이유가 여기 있다. 분할할 수 없는 총체적 인간을 강조한다.  긍정적이고 희망적인 그의 인간관은 이후 인본주의 심리학과 긍정심리학의 모태가 되었다.


   세 번째, 기존 심리학이 개인에 집중했지만 아들러의 궁극적인 관심은 공동체에 있었다. 관계를 떠난 개인은 있을 수 없고, 공동체에 기여하는 개인이야말로 아들러가 추구한 이상적 인간이다. 미성숙한 인간은 마치 천동설의 지구처럼 타인들이 자기 생각과 욕구에 맞추어 반응하기를 기대한다. 그렇게 안 되니 갈등과 문제가 발생한다. 하지만 성숙한 인간은 지동설의 지구처럼 자신도 공동체의 일부임을 안다. 그래서 다른 별, 다른 사람들과 함께 어울려 지낼 수 있게 된다.


   결혼 초 나는 아내가 어머니처럼 나를 위해 희생하고 봉사할 것을 기대했다. 아내는 내가 자기를 아버지처럼 보살피고 도와주기를 바랐다. 서로 자기에 맞춰 상대가 움직이기를 원했으니 어려움이 컸다. 이제는 우리가 한 몸 되어 한 팀을 이루고 있음을 안다. 훨씬 행복하다.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은 어렵다. 머리로는 알지만, 하늘을 보면 여전히 해와 달이 나를 중심으로 도는 것으로 보인다. 온 세상 사람들도 나를 위해 존재하는 것 같다. 조금만 더 생각해 보면 내 옆의 사람도 마찬가지임을 알 수 있다. 서로 상대가 자기를 중심으로 움직일 것을 기대할 때 궤도의 충돌이 일어난다. 같이 공동체를 중심으로 돌 때 우리 가족이, 우리 사회가 잘 기능한다. 더 행복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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