흐린 기억 속에서 엄마는 14
엄마 카톡에 보이스톡 한 통이 와 있었다. 엄마 친구 분이다. 어릴 때부터 그분 이야기는 가끔 들었고, 몇 번 만나 뵙기도 했던 것 같다.
"엄마 친구 분 김**님 전화 왔네."
엄마 눈이 동그래지셨다. 눈빛에 반가움이 가득 하다.
"전화 해 보실래요?"
요즘엔 아는 분한테 전화가 와서 한 번 통화 하시라고 해도 고개를 젓곤 하셨다. 생각을 이어가고, 말을 이어가는 일이 좀 버거우시기 때문이리라. 그러나 친구 분과 통화해 보라고 하니까 금방 고개를 끄덕이신다.
전화벨이 몇 번 울리고 나서 친구 분이 전화를 받았다.
뭔가 인사말이 술술 나오지 않아 잠시 머뭇거리셨지만, 친구 목소리가 들리자 얼굴에 웃음이 가득하다.
"어떻게 지내?" 친구 분이 묻는다.
"나 뭐 시원치 않지. 그래, 넌 어떻게 지내니?" 엄마가 대답하고 다시 물으신다.
"나도 몸은 시원치 않아." 친구 분이 대답한다.
나는 일단 그 분이 전화를 걸고 받으실 수 있다는 사실에 놀란다. 그분은 아직 그 정도로 정정하신 것이다.
"나 지금 ** 마을에 와 있어. 얼마 전에 왔어."
얼른 그곳을 뒤져보니 어느 금융회사에서 운영하는 요양원이다. 1인실, 2인실 등으로 이루어진 상당히 고급 요양 시설인 것 같다.
두 분의 대화는 오래 가지 못했다. 안부를 묻고, 지금 어디 사는지 묻고. 그리고는 이어질 이야기가 없다.
"아유, 언제 만날 수 있으려나."
"어머니 모시고 한 번 놀러 갈게요." 내가 거들었다.
"그래, 잘 지내. " 친구 분이 마무리를 지으셨다.
오랜만에 친구와 통화를 한 엄마 얼굴에는 약간의 흥분과 기쁨이 서려 있다.
"그 친구랑 여학교 동창인 거야, 엄마?"
"응. 같은 학교 다녔어. 그 애가 우리 동네 새말로 이사 왔거든.
그애 집이 개성이었는데, 해방 뒤에 남쪽으로 온 거야. 아버지가 H동에서 고서점을 하셨는데 말이 별로 없으신 분이야."
엄마의 기억 속에서 조금씩 그 친구에 대한 기억들이 되살아난다.
"그 친구가 엄청 똑똑하거든. 집안 내력인가 봐. 오빠 둘이 있는데 다 K고 다녔어."
하하. 나는 이 이야기를 몇 번 들었던 것 같다. 어린 여학생이었던 엄마는 K고에 다니던 친구 오빠들을 내심 선망하고 동경했는지도 모른다.
"엄마는 그분 오빠들 본 적 있어?"
"아니, 이야기만 들었어."
그때 엄마는 금촌에서 기차를 타고 서울역에서 내려 학교까지 걸어 다녔다. 금촌에서 1시간 넘게 기차를 타고 서울역에 내리면 학교는 버스로 대여섯 정류장 정도의 거리였고, 높은 곳에 있었다. 기차가 예고도 없이 연착할 때도 있었고 안 다니는 날도 있었단다. 와, 걷고 기차타고 또 걷는 통학길이라니. 엄마는 그 친구와 힘겨운 통학길을 함께 한 것이다. 지루한 그 시간이 얼마나 빨리 갔을까? 두 분이 나눈 이야기는 얼마나 재미지고 다양했을까? 사소한 신변 이야기며 가족 이야기, 청춘의 고민, 시대의 고민이 다 담겨 있었겠지. 그렇게 몇 년의 우정은 이후 80년 세월의 우정이 되었다. 아, 물론 최근의 몇 년 세월 두 분은 거의 왕래하지 못했지만 엄마가 뇌경색으로 쓰러지기 전까지는 가끔 전화도 나누고, 어쩌다 만나기도 하셨다.
그러고 보니 친구 분은 이전 요양원에 입소하실 때 전화를 주셨다. 2년 전쯤이었나 보다. 옮기고 나서도 전화를 주신 거였다. 몸은 불편하지만 아직 정신은 온전하시고 전화도 하실 수 있으시기에 환경이 바뀌고 나서 떠오른 몇 안 되는 사람 중 한 사람이 바로 엄마였던 것이다. 친구! 아흔 넷의 나이에도 '너는 어떻게 지내니?'라며 궁금해 하는 친근한 사람이다.
비록 80년 세월의 숱한 사연들이 이제는 몇 자락 기억으로 축소되었고, 그 많은 이야기들은 몇 마디 안부에 녹아들어갔지만, 우정은 그 두 분의 세월 속에 생생하게 존재한다. 그렇지 않다면 그 친구 분이 요양원이라는 '최후의' 집에 갔을 때 엄마를 떠올렸을까? 그렇지 않다면 엄마가 희미한 기억 속에서도 그 친구를 또렷이 기억했을까?
내 친구들이 하나 둘 떠올랐다. 중학교 시절, 죽이 잘 맞았던 S. 그애 손에 이끌려 교회도 갔다. 시장 바닥에서 이것저것 함께 사먹으며 세상 다 짊어진 듯 사춘기 고민을 나누기도 했다. 매일 매일 만나도 온갖 이야기로 시간이 모자랐던 그 시절 . 그런데 어떻게 우리의 만남은 세월 속에서 빛바랬을까? 언제쯤부터 그애와 나는 소원한 사이가 되었을까?
지금도 두 어 달에 한 번씩은 만나는 고등학교 친구들. 세월의 더께 때문에 정답고 편안하지만 대부분 함께 만날 때 말고는 자주 만나지 않는다. 뒤늦게 탐구열이 솟아 올라 매달 책 한 권 읽고 만나는 친구들도 있다. 책을 읽고 생각을 나누면서 그 깊이가 깊어졌다. 몇몇은 책을 읽다가도 전화하고, 몸과 맘이 불편할 때도 연락하고, 사소한 이야깃거리도 함께 나눈다. 가끔씩 여행을 함께 하는 친구도 있다. 무료할 때, 지칠 때 연락을 하는 친구들도 있다. 그중 몇 친구들... 그래, 나도 내 삶의 변화가 생겨날 때, 뭔가 고민될 때, 기쁘거나 슬플 때 그 친구들에게 전화를 하겠구나. 만날 수 있으면 만나겠지.
오늘 니는 그 친구들에게 문자를 보내고, 전화를 걸어본다.
그리고.....
이 더위가 가시면 엄마를 모시고 그 친구 분을 찾아가야겠다고 생각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