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모두 바이올렛 에버가든이 아닐까
“천상학과 함께한 10초를 잊지 못한다. 오빠는 셔터 스피드를 125에 맞추라고 했지만 나는 60에 맞췄다. 125분의 1초보다는 60분의 1초가 더 기니까, 사진 속에서 오빠와 조금 더 오래 있고 싶어서.”
-은중과 상연 중에서-
한 프레임에 담긴 시간은, 지워지지 않는 기억이 되어 영원히 남습니다. 피사체의 형상뿐 아니라 당시의 감정, 기분, 감각까지. ‘찰칵’하는 소리와 동시에 순간은 영원히 멈추죠. 우리는 이 힘을 알기에 재빨리 카메라를 들고, 놓치고 싶지 않은 순간에 서둘러 간절함을 가져봅니다. 지나가 버리면 더 이상 되찾을 수 없으니 눈 깜짝할 새에 흘러가는 순간조차 분수로 쪼개어서라도 붙잡고자 합니다.
사진은 간절함에서 태어납니다. 간절함은 대놓고 드러나지 않더라도, 대상에 대해 솔직하면서도, 은밀하게 서두르는 감정이죠. 그 감정이 절정에 치닫는 순간 셔터를 누르면, 그토록 간직하고자 하는 순간이 포착됩니다.
놓치고 싶지 않은 마음을 담는 방법. 아마 사진 말고도 다른 수단으로 흘러가는 무언가를 붙잡아 본 적이 있을 것입니다. 마치 번뜩 떠오른 아이디어를 황급히 메모장에 적어두는 것처럼, 까먹지 않기 위해 일기장을 펼치는 것처럼 말이죠. 본인의 생각과 감정이 휘발되어 버리기 전에 글자로 새기는 방식은 한 번쯤 해보지 않았을까요.
글 또한 또 하나의 프레임입니다. 글자를 적어 내리면서 한 글자 안에 수많은 복합적인 생각과 느낌이 함께 깃듭니다. 시간적인 부분에 있어서 사진보다 훨씬 오래 걸리는 방식이지만, 순간의 마음을 무언가로 붙잡아 둔다는 점에서는 같습니다.
글의 농도는 대상이 명확해질수록 더욱 진해집니다. 사랑하는 존재든, 원망하는 존재든, 마음의 방향이 어떻든 상대를 향한 감정이 풍부할수록 꾹꾹 눌러 담는 심정은 더욱 진솔해지죠.
다만, 글에 진심을 담기란 생각보다 쉽지 않습니다. 사진을 여러 번 찍어도 마음에 드는 사진 한 장을 겨우 건지듯, 글 또한 수차례의 퇴고 끝에 그나마 좋은 글이 나오곤 합니다. 이는 단순히 글재주와는 다른 차원의 이야기입니다. 형식적인 부분을 넘어 내면을 건드려봐야 할지도 모릅니다.
이처럼 마음을 글로 옮기는 일의 어려움을 떠올리면, 자연스레 한 작품이 생각납니다. 마음의 언어를 배워가는 과정이 담긴, 애니메이션 〈바이올렛 에버가든〉입니다.
‘사랑해의 뜻을 알고 싶습니다.'
한평생을 국가의 살인병기로만 살아왔던 바이올렛이 군생활을 마치고 ‘자동수기인형’으로 전향하게 됩니다. '자동수기인형'이란, 다양한 사연을 가진 의뢰인들의 편지를 대필해 주는 서비스 직업을 의미합니다. 평생을 살인만 해오던 소녀가 난데없이 편지를 전하는 일을 하게 된 계기는 단 하나의 이유 때문이었습니다.
‘사랑해의 뜻을 알고 싶습니다. 특별한 말인 건 알겠어요.'
바이올렛은 단지 '사랑해'라는 말을 이해하고 싶었습니다. 그녀의 삶은 오로지 살인으로만 채워졌기 때문에, 인간적인 감정은 물론 언어와 행동마저도 배울 시간이 없었죠. 그저 전쟁의 도구로만 사용되고 버려질 운명이었습니다. 차디찬 세상과 달리 그녀의 ‘소령’은 매우 특별했습니다. ‘바이올렛 에버가든’이라는 이름을 지어주고, 매번 리포트를 작성하도록 하여 말과 글을 쓰도록 연습시켰습니다. 그녀를 인간으로 바라봐준 사람은 소령뿐이었죠. 바이올렛도 자신을 인간답게 바라봐주는 소령을 전적으로 의지하게 되면서, 소령의 명령이라면 무엇이든 하고자 했습니다. 소령은 인간 '바이올렛'에게 유일한 존재였습니다.
하지만 전쟁이 심화된 순간, 그녀를 살리기 위해 소령은 자신을 희생하고자 했습니다. 결국 '사랑해'라는 말을 남긴 채 폭발과 함께 사라진 게 그의 마지막 모습이었습니다. 이후 시간이 지나고 소령을 그리워하는 바이올렛은 그가 남긴 ‘사랑해’라는 말에 집착합니다. 마지막 소령의 말이었기에 그녀는 그 의미를 찾아야만 했죠. 바이올렛은 오로지 '사랑해'를 위하여 '자동수기인형'의 길을 택합니다.
‘대체 이걸 왜 하고 있는 거야? 너랑 적성에 안 맞아..’
로봇과 같은 그녀가 편지 대필을 할 때면 돌아오는 말은 한결같습니다. '너와 적성이 안 맞아.'.
희로애락을 하나도 겪어보지 못한 그녀에게 편지 대필을 바라기엔 너무도 어려운 일입니다. 항상 리포트 같은 분위기에, 의뢰인의 말을 곧이곧대로 직역하는 듯한 말들은 오히려 화가 되어 돌아오죠.
'누구나 진심을 표현하는 것은 아닙니다. 결국 자신을 속이거나 거짓말을 하게 되죠.'
인간은 솔직하지 못하고, 진심을 내비치는 데에 약한 존재라, 의뢰인들의 겉모습은 모두 솔직하지 못합니다. 하지만 대필서비스를 찾는 이유는 본심을 표현하기에 서투른 사람들이 찾아오는 곳입니다. 또한 말이란 같은 말이라도 '아' 다르고 '어' 다르기에 자신의 마음을, 또는 상대의 마음을 오역하기 쉽죠. 반대로 번역하기에도 굉장한 이해심을 요구합니다. 겨우 글자를 배우고, 있는 사실만 인지할 수 있는 바이올렛에게는 거의 불가능하는 수준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그녀는 ‘사랑해’를 이해하기 위해 계속해서 편지를 씁니다. 처음으로 사귄 친구 루쿨리아의 편지를 써주며, 고마움에 대한 마음을 배우고, 샬럿과 다미안 왕자의 연애편지로 간지러운 사랑 감정을 조금씩 알며, 올리브와 앤에게 쓰는 편지로 담아낸 부모의 사랑까지. 그녀가 알게 되는 감정은 차근차근 회차를 거듭할수록 깊어져갑니다.
로봇 소녀에서 배테랑 수기인형으로 이어진 그녀의 성장에는 ‘편지’가 있었습니다. 몰아치듯 쏟아지는 사연들과 그 안에서 수많은 감정들을 캐치해야 한다는 점에서 너무도 취약했지만, 차근차근 처음부터 배워가는 그녀였기에 오히려 순수한 감정에 집중할 수 있었죠. '진심 어린'이라는 표현이 바이올렛의 편지에 제일 적합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배테랑 바이올렛의 편지는 그다지 유려하지 않습니다. 선택하는 단어 자체가 어렵지 않고, 화려한 수식어도, 복잡한 문장구조도 없습니다. 순간의 감정에 솔직하고, 상대를 위한 마음 한 스푼을 더 얹은 것이 전부죠. 그렇기에 그녀는 배테랑이 될 수 있었다고 봅니다. 그녀가 사용하는 단어들처럼 그녀의 공감은 매우 직관적이면서도, 헤아리기 어려운 사람의 마음을 간파하는 힘이 있었습니다. 거짓 없이 담백하게 진정성 있는 바이올렛만의 문체. 그녀의 문체 속에는 보는 사람이 행복을 기억할 여지를 만들어 줍니다.
<바이올렛 에버가든>을 보면 우리가 편지와 같은 글을 어려워하는 이유를 알 수 있습니다. 점점 어른이 되어갈수록 본심보다 꾸며낸 모습으로 살아가는 날이 더 많아서, 나 조차도 무슨 생각을 갖고, 어떤 내면으로 살아가는지에 무관심한 경우가 다반사입니다. 심지어는 나도 모르게 상처가 나있는지도, 좋아하는 건지, 싫어하는 거였는지도 모를 때가 많습니다. 자기 마음조차 모르면, 그 마음을 글로 번역하기는 어렵죠. 결국 자신의 마음도 헤아리지도, 결정하지도 못한 그대로 방황하는 마음을 방치하곤 합니다.
그러니 더욱 소소한 편지라도 쓰는 일이 필요할지도 모릅니다. 이때만큼은 한 글자 한 글자를 새길 때마다 나의 마음이 어떤지, 혹은 상대의 마음은 어떨지 번갈아가며 고민하고, 끊임없이 들여다보게 되니 말이죠. 그렇게 무심코 지나치기 바빴던 우리의 진실됨을 다시금 종이 위에 붙잡아 둡니다. 비록 그럴듯한 문장, 최고로 좋은 문장으로 치장을 해야 할 것만 같은 부담감이 들 수도 있겠지만, 그래도 상관없지 않을까요. 비록 그럴듯한 문장으로 다듬지 못하더라도 괜찮습니다. 펜을 내려놓기까지 몰랐던 마음을 알아차렸다면, 그것만으로 이미 충분하니까요.
‘나’로 살아가야 하는 본질을 잊은 채, 스스로에게 무뎌지는 요즘, 글과 사진 같이 애틋한 시도가 가끔 필요해지기도 합니다. 사진 한 장, 그리고 함께 적는 짧은 문장. 두 가지가 만난다면 묻혀있던 많은 부분들이 되살아나지 않을까요.
그래서 추천하고자 합니다. 사진과 글이 함께 남겨질 수 있는 엽서를요. 가장 소중한 마음을 한 곳에 둘 수 있는 프레임을 찾으신다면, 엽서가 괜찮을 것 같습니다.
라잇풀 스튜디오
망원의 한 골목에는 작은 화가의 집이 있습니다. 아기자기한 공간에 나열된 엽서마다 한 폭의 여행이 그려집니다. 작은 프레임 속 그림이지만, 제한 없이 자유로운 시선들.
저는 그 시선들에 사로잡혀 가본 적이 있는 여행지들을 떠올려 엽서를 골라보았습니다. 혼자 생각했던 나만의 여행지들이 작가의 시선으로 그려지니 더욱 포근했고, 한 번 더 그 여행에서의 추억을 곱씹어 기록을 남겨보고 싶어지기도 했습니다. 작고 아늑한 공간에서 마음껏 여행하는 기분으로 설레고 들떴던 공간이라고 표현해도 될 만큼 자유로웠습니다.
아마 온화한 감성을 선호한다면 좋아하지 않을 수 없을 공간이라 봅니다.
글월 연희
망원동에서 조금 더 올라가면 연희동이 나옵니다.
이곳에는 다양한 무드의 엽서를 경험할 수 있는 공간이 제법 마련되어 있죠.
연희동 대표 빵집 피터팬 건물을 오르면 단번에 클래식한 감성이 휘감는 공간,
‘글월 연희'를 발견할 수 있을 겁니다.
이곳의 편지지들은 우아하면서도 개성 있는 테마를 지니고 있어,
누구나 취향을 타지 않고 편지의 매력에 빠져들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연애편지 시리즈나 평범한 일상에 쓸 수 있는 무제 테마, 달력이나 꽃 삽화로 꾸며진 심플한 테마까지. 각양각색 겹치지 않는 테마가 많아 어떠한 사연을 들고 와도 잘 들어맞는 편지지들입니다.
곳곳에 사연 담긴 글들, 사람들이 테이블 앞에 앉아 내는 사각사각 소리들이 가게 안을 가득 채우는 곳. 그래서 그런지, 창 밖에 멍 때리기 좋은 풍경과 함께 사색이 하고 싶어지고, 사소한 몇 마디라도 즉석에서 쓰고 싶어지는 분위기입니다.
소소한 이야기를 누군가와, 혹은 자신과 하고 싶을 때 잠시 들리면 좋을 듯합니다.
올라이트 연희
연희동 주택가로 들어가면, 따뜻한 나라의 작은 상점을 연상하게 하는 가게가 있습니다.
올라이트를 대표하는 고양이 그림이 이곳저곳 반기고, 다이어리와 편지, 문구용품들이 가득해서 몇 가지 챙겨 오고 싶은 마음이 들기도 합니다.
가장 시선이 닿는 곳은 사진엽서로 메워진 한 면의 벽. 엽서를 고르다 말고 모르는 새에 감각적인 사진들을 구경하느라 바빠집니다. 사진들의 구도와 색감이 좋아서, 마치 작은 사진 갤러리를 거니는 듯한 기분이 듭니다.
세계 곳곳의 풍경부터 일상의 사소한 장면까지. 다양한 사진들이 있어서 끌리는 사진을 집다 보면 어느새 손에 한가득 포개어져 있죠.
기분에 잘 들어맞는 사진으로 그날의 엽서를 기록해 보는 건 어떨까요.
잠시 방황하던 마음을 다잡아, 자신만의 Frame Letter로 진심을 담아 건네어보길.
Edited by. Hann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