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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연금으로 알아보는 더치페이의 해답

애니 <강철의 연금술사>와 삶을 연결해 고찰해보기

by yannseo
해당 콘텐츠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으니 주의 바랍니다.









강연금..정답을 알려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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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공 형제, 에드워드 엘릭과 알폰스 엘릭의 인생을 건 모험, <강철의 연금술사>. 두 형제의 여정은 단순한 판타지 만화 같을지라도, 보면 볼수록 꽤나 심오합니다. '진리'라고 자칭하는 절대적 존재와 인간의 칠죄종을 상징하는 '호문쿨루스' 처럼, 이미 캐릭터 설정부터 철학적인 접근이 필요해 보입니다. 더욱이 주인공과 적의 구도가 절대적인 선과악의 구도가 아니라서 더욱 입체적입니다. 보는 이로 하여금 복합적인 감정과 생각을 유발시키는 데에는, 작품이 판타지적 허구를 넘어서는 특별한 무언가를 지니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 무언가는 우리 스스로와 멀지 않는 이야기를 담고 있죠. 인간의 본질, 어쩌면 더 현실적이고 일상적인 부분들에게까지도 맞닿아 있을 수 있습니다. 먹고 사는 문제, 나와 타인의 관계, 선택과 책임과 같은 질문들이 작품에서 던져지고 있으니 말이죠.



이 지점에서 꺼내볼 강연금의 명대사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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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인생 절반을 줄테니까 네 인생도 절반 줘
절반이 뭐야? 다 줄 건데



에드워드가 그의 짝녀 윈리에게 용기를 내어 꺼낸 고백으로 유명합니다. 웃음거리로 넘어갈만 하지만, 우리의 일상 속 모습을 드러내기도 합니다. 연인간의 '더치페이'와 같은 난제처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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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친구와 더치페이는 어느정도가 적당할까요?'. 여러 연애 프로그램이나 고민 상담 프로그램에서 이러한 질문들이 자주 나타나곤 합니다. 현실적인 부분을 고려해서 자신의 처지에 맞게 데이트를 해야하니 충분히 해볼만한 고민입니다. 그러나 최근들어서 n빵의 개념이 비용 분담의 목적을 넘어, 상대방과의 관계 척도로 사용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꼭 연인사이에서만이 아니라, 넓은 관계에서도 해당되죠. 게다가 메신저 어플에서는 자신의 생일날 상대방이 얼마치 선물을 했는지 알려주는 시스템도 등장하고 있습니다. 이제는 테이블에서만이 아니라 사람들의 관계로 더치페이판이 확장되고 있습니다.



인생을 걸고 더치페이를 이야기하는 에드워드와 윈리가 만약 지금의 사회를 본다면, 어떤 조언을 해줄지. 끝이 없는 더치페이 논쟁을 강연금으로 한번 풀어보고자 합니다.











하나는 전체, 전체는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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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연금에 있어서 가장 근간이 되는 소재인 연금술. 연금술은 인물들의 능력치를 나타내는 기술이자, 아마 작가의 메세지를 전할 수 있는 매개체가 아닐까 싶습니다. 연금술은 연성진을 그려서 연금대상을 변화시키는 과정인데, 세상의 물리 에너지를 대상이 되는 물질로 전환시키면서 결과물을 만들어냅니다. 마법처럼 요술봉을 휘두른다고 해서 결과물이 뚝딱 만들어지진 않죠. 그래서 원하는 결과가 크면 클수록 그 만한 에너지의 대가는 커집니다. 그래도 대가만 치룰 수 있다면, 에너지를 충당시킬 능력만 있다면, 어떠한 희망사항이든 내걸 수 있습니다. 이러한 구조로 인해서 연금술은 연금술사의 의도에 따라서 쓰임새가 달라집니다. 즉, 연금술은 인물들의 야망에 따라 정의가 갈라지는 중립적인 도구라고 볼 수 있습니다.


야망에는 두가지 뜻이 있습니다. 하나는 '큰 일을 이루고자 하는 소망', 또 하나는 '그릇된 야심을 품은 욕망'입니다. 소망을 품느냐, 그릇된 욕망을 품느냐에 따라서 야망의 목적지는 정반대가 됩니다. 앞서 말했듯, 연금술을 어떤 야망으로 사용하느냐 그 결과물도 달라지는 만큼, 그릇된 욕망이 클수록 비참한 결과를 낳게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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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적으로 쇼우 터커의 에피소드를 꼽을 수 있습니다. 키메라를 연구하는 쇼우 터커는 국가 연금술사 자격을 위해 매번 연구 성과를 갱신해야 했습니다. 하지만 그 욕망이 너무 과했던 걸까요, 국가 연금술사에 지나치게 집착했던 그는 해서는 안될 선택을 해버리고 맙니다. 그의 손으로 직접 자신의 딸을 반려견과 연성해 끔찍한 키메라를 탄생시켜버립니다. 더 이상 아버지가 아닌, 미치광이 연금술사가 되어버렸죠. 해당 에피소드는 그릇된 욕망이 무엇인지 여실히 보여주며, 상당히 충격적이고 불쾌하기까지 합니다.




연금술을 통한 야망은 이외에도 다른 양상들로 드러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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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릭 형제가 자신들의 몸을 원래대로 하기 위해 찾고 있는 현자의 돌 또한 그 양상 중 하나죠. 널리 알려진 바로는 현자의 돌은 등가교환에서 벗어나 대가 없이 연성을 할 수 있도록 해주는 아이템입니다. 연금술을 한 번 할때마다 연성진을 그려야하고, 에너지를 전환시키는 데에는 시간과 노력이 필요했으니, 대가 없는 연금술템이 그들에게 얼마나 달달하게 느껴졌을까요.




하지만 실상은 다릅니다. 현자의 돌은 전설적인 아이템이 아니라, 살아있는 인간의 영혼을 강제로 뜯어 모아 돌의 형태로 만든 희생 덩어리죠. 결국 엘릭 형제에게 한 줄기의 희망같은 현자의 돌마저 잔혹한 결정체에 불과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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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인 빌런 세력인 호문쿨루스도 마찬가지. 이들 또한 쇼우 터커나 현자의 돌과 일맥상통하게 비참한 내막을 지닙니다. '아버지'가 현자의 돌을 활용해 탄생시킨 인공 생명체지만, 탄생의 이면에는 자신으로부터 인간적인 결점인 칠죄종 (교만, 나태, 색욕, 오만 등)을 도려내고자 하는 욕망, 부족함이 없는 인간 초월적 존재에 대한 욕망이 가득합니다.

7대 죄악의 성품을 갖춘 이들은 아버지의 배출물에 그칩니다. 이기적인 야심에서 휘둘리는 연금술은 끔찍한 비극을 만들어내기 마련입니다.





이토록 연금술을 손에 거머쥔다는 점은 책임과 선택이 동반하기에 마냥 멋지지만은 않습니다. 엘릭 형제의 연금술 스승, 이즈미 커티스가 두 소년에게 유독 엄격했던 것도 아마 이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겠죠. 처음 그녀가 등장하고 나서 엘릭 형제와의 이야기가 나왔을 때, 무섭고 매정한 인상으로 다가왔습니다. 그녀가 연금술을 배우고 싶어하는 꼬마 엘릭 형제에게 칼 한자루만 건네고 섬에서 살아남도록 했으니, 아이들에게 너무하지 않나라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하지만, 해당 에피소드에서 이즈미 커티스가 형제에게 한 말은 연금술사의 무게를 단적으로 보여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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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는 전체, 전체는 하나'


연금술사에게 가장 본질적인 자세를 일깨워주는 대목이라 봅니다. 연금을 쓰고자 하는 목적이 누군가를 해하기 위한 목적으로, 이기적인 욕심을 위한 목적으로 쓰인다면 결국 파멸밖에 없음을 이즈미는 알고 있었으니 말이죠. 무인도에서 날몸으로 살아남으며 생명의 무게를 체감한 엘릭 형제는 가혹했던 경험으로 능력을 어디에, 어떻게 써야 하는지를 몸소 깨닫습니다.


이즈미의 대사는 한편으로 작품에서 전하는 메세지 중 하나로 꼽고자 합니다. 쇼우 터커나 현자의 돌을 탐한 자들, 호문쿨루스와 아버지 모두 작품 내에서 정상적인 사고가 불가능해보일 정도로 자신의 욕망에 매몰된 상태였지만, 이들을 보면 안타까운 마음이 들기도 합니다. 타인을 몰아냈다고 해서 이들에게 남는 몫은 전혀 없었죠. 쇼우 터커는 사랑하는 딸을 바치면서까지 국가 연금술 자격을 유지하고 싶었으나 박탈당했고, 호문쿨루스는 현자의 돌이 아니면 인간보다 더 볼품없는 생명체로 소멸당하고, 아버지의 인간혐오 시선끝에는 자신에 대한 혐오가 기저에 깔려있었습니다. 이들이 쥔 칼은 결국 자신을 향하고 있을 뿐이었습니다. '나'에게만 몰입하기 보다, 나를 포함한 그 외의 것들을 수용해보는 자세. 연금술을 통해 이야기하는 진정한 능력이란, 이러한 자세에서 발휘되는 것이 아닐까요.







부족함이 허락된 유일한 존재



최종 결전, 그리고 기나긴 전투를 매듭지어줄 ‘아버지’와 에드워드 엘릭의 진리를 마주하는 장면은 중대한 스포일러이긴 하지만, 작품이 시사하는 바를 이해하기 위해서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장면입니다. 진리를 마주한 두 인물의 모습과 최후. 이 장면은 둘의 운명이 극명하게 대비됨을 보여줍니다. 진리가 누구의 손을 들어주는지에 따라 '아버지'와 에드워드 엘릭의 마지막이 결정되죠. 강연금 세계관의 절대적인 존재가 결말을 결정하는 만큼, 진리가 손을 들어주는 방향이 작품의 메세지와 결정적으로 직결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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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이라는 것을 손에 넣겠다고? 웃기지 마라. 훔친 고급품으로 치장하면 자기가 훌륭해 보일 줄 아나? 교활한 도둑놈. 너 같은 녀석은 분수에 맞게 플라스크 속에서 만족했으면 좋았을 것을. 타인의 힘을 이용해 '신이라는 것'에게 매달리려 했지, 너 자신은 전혀 성장한 것이 없다."

주인공 일행과 호문쿨루스의 치열한 전투 끝에 신의 능력을 얻었던 '아버지'는 현자의 돌을 잃고 체내에 있던 신의 에너지를 버티지 못합니다. 끝내 예전 원래 모습으로 돌아가 '진리'를 마주하죠. 이때 원작에서는 진리가 '너의 분수를 알아'라고 하듯 그를 비웃습니다. 애니판에서는 타인의 힘을 빼앗을 뿐, 정작 자신의 발전은 하나도 이루지 못했다며 나무랍니다. '어째서 너처럼 될 수 없는거야.'라며 신을 갈망했던 '아버지'는 결국 플라스크 속에 갇혀 지냈던 하찮은 자신의 모습을 부정하며 진리의 절망을 맞이합니다.


마치 '주제를 알고 까불어'라고 하는 듯한 진리의 말은 사이다처럼 다가오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찝찝한 기분이 들기도 합니다. '신'의 존재가 상정하는 틀에 맞게 살라는 뜻인지, 자기를 넘보지 말라는 뜻인지, 아리송하죠. 아마 상대의 능력을 제한하는 듯한 뉘앙스라 그런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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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아버지', 곧 플라스크 속의 난쟁이의 서사를 곱씹어보면, 분수에 맞는 삶이 어떠한 의미인지 이해하게 됩니다. 플라스크 속의 난쟁이는 과거 실험에서 반 호엔하임의 피로 태어난 인공생명체였고, 플라스크에 갇혀 살아야 했습니다. 그는 플라스크를 벗어나고 싶었고, 인간의 몸을 얻어 자유를 누리고 싶었죠. 자유의 욕망은 더 커져서 인간을 초월하는 존재가 되고자 했습니다. 그래서 자신의 결점을 도려낸 7대악의 호문쿨루스를 탄생시키고, 많은 영혼을 끌어다 모으며 마침내 세계를 위협하는 힘까지 얻습니다. 더 이상 그는 물리적으로 플라스크 속 ‘난쟁이’가 아닌, 호문쿨루스를 거느린 지배자 ‘아버지’로 군림하게 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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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이는 능동적인 발전이 아니었습니다. 무고한 희생들에 무임승차하며 얻어낸 강력한 힘일 뿐, 자체적인 능력이 아닙니다. 그의 '허영'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죠. 겉만 번지르르하고 플라스크 시절부터 변한 점은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진리의 말대로 그때가 훨씬 나았을지도요. 다시 플라스크로 돌아간 모습은 더욱 초라해보이기도 합니다. 그토록 플라스크 속 자신의 모습을 부정하고 싶었지만, 정작 인간이 되고 나서도 땅 속 깊은 곳에서 숨어지내야 했고, 본인에게 남아있던 주된 감정들을 모조리 빼내었으니, 정상적인 감정도 느끼질 못했던 플라스크 속 난쟁이. 그를 평생토록 가둔 건 다른 무언가도 아닌 그 자신이었습니다. 인간 이상의 자유를 원했지만, 인간조차도 못한, 플라스크 속 존재만도 못한 절망적인 무언가로 전락해버리고 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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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면, 엘릭은 달랐습니다. 마지막으로 진리와 결판을 짓는 엘릭은 동생을 구하기 위한 대가로 자신의 진리의 문, 즉 연금술을 내놓습니다. 그러고는 처음부터 평범한 인간이었다고 말하는 당돌함을 보입니다. 이에 대한 진리의 답변은 '정답이다.', 드디어 엘릭 형제는 오장육부 모두 되찾으며 연금술사로서의 모험도 마침표를 찍습니다.


엘릭의 결단은 '작은 인간'이었습니다. 보잘 것 없는 인간으로 되돌아가는 선택이었지만, 오히려 주체적이고 강인한 인간으로 거듭납니다. 연금술사가 아닌 인간 엘릭으로서 진리의 문을 마주하는 그는 앞으로 등가교환의 법칙에 구속되지 않아도 됩니다. 대가를 치뤄야 한다는 압박에서 벗어나, 새로운 가치를 발굴하며 끝없는 발전을 해나갈 수 있게 되었죠. '보잘 것 없는 인간'을 직면하는 엘릭을 보면, 약한 인간의 모습을 인정하는 것 같아 마냥 웃으면서 보기엔 쉽지 않습니다. 엘릭이 약함을 인정해버리니, 나도 내가 약하다고 인정해야할 것만 같죠. 하지만 이러한 불편함은 내 자신의 결점을 '잘못'으로 여기기에 나타나는 것 같습니다. 마치 플라스크 속의 난쟁이처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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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으로서 가지고 있는 결점이란, 어떻게 보면 인간에게만 허락된 부분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결점을 '민낯'이라고 표현하는 것도, '보잘 것 없다'고 표현하는 것도 인간만이 고유하는 감정이니까요. 어떠한 동물도 자신의 부족함에 대해 부끄럽다고 느끼질 않습니다. 그렇기에 사람은 자신의 부족함을 알고, 부족함을 채워줄 무언가를 찾습니다. 그 무언가는 인간이 될수도, 다른 생명이 될수도, 무생물이 될수도 있죠. 반대로 다른 무언가를 위해서 자신이 힘이 되어줄수도, 품을 내어줄 수도 있습니다. 이리저리 맞춰나가는 과정 중에 자신의 경험치를 얻기도 합니다. 그 과정은 긍정적일수도, 혹은 실험적이고, 실패투성이일 수도 있지만, 어떠한 과정도 헛된 것이 아닌 성장을 위한 양분으로 흡수해냅니다. 인간답게 사는 삶, 분수에 맞는 삶은 비로소 자신을 솔직하게 마주하고 발전할 수 있는 삶을 의미합니다.







강연금이 이야기하는 진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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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리’는 얼굴에 눈, 코 없이 입만 존재하는 하얀 실루엣, 뚜렷한 형태를 알 수 없는 형체로 등장합니다. 연금술의 가장 근본적인 원칙인 ‘등가교환의 법칙’을 구현하며, 어떤 대가 없이 무언가를 얻는 일은 불가능하다는 세계관 최고의 법칙을 상정하기도 하죠. 이 존재는 인간이 금기를 범하는 순간 나타납니다. 진리의 문을 열고 들어간 자에게는 그 대가로 신체의 일부를 앗아갑니다. 빼앗기는 신체 부위는 무작위가 아닌, 당사자가 간절히 바랐던 것과 맞닿아 있습니다. 에드워드, 알폰스 그리고 이후 등장하는 인물들도 자신의 소망에 따라 그 대가를 치룹니다. 이러한 등가교환의 법칙으로 인해, 진리를 마주하는 어떠한 존재도 그를 뛰어넘지 못합니다. 형체를 알 수 없듯이 그의 능력 또한 가늠을 할 수 없는 세계관 최강자입니다.


그래도 엘릭은 주인공답게 최강자를 이긴 유일한 인물입니다. 그가 이길 수 있었던 비결은 똑똑한 등가교환을 발휘한 것도 아닙니다. 자신의 전부였던 연금술을 포기하면서 진리를 마침내 설득시켰습니다. 진리는 등가교환의 법칙을 설파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 진리를 설득한 것은 포기였습니다. 그렇게 엘릭은 연금술에 대한 욕망과 집착을 버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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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가 한편으로는 불편한 진실로 다가옵니다. 인간은 결국, 가장 소중한 무언가를 포기해야만 진리에 이를 수 있다는 포기론적 관점으로 말이죠. 잘못 받아들이면 아마 염세주의로도 해석될 여지가 있을 듯 합니다. 그러나 연금술을 포기할 때 엘릭의 표정은 확실히 체념한 듯한 표정보단 확신에 차고 행복해보이는 표정입니다. 즉, 비관적으로 볼 필요가 없다는 것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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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면서 포기하지 못할 부분들을 제각각 품고있습니다. '이것만은 지켜야해, 이게 아니면 당장 죽을 것 같아'. 이들을 내려놓기란 결코 간단한 일이 아닙니다. 때로는 지켜야 한다는 마음에 결국 중요한 것들을 놓칠 때도 있죠. 붙잡으려는 집착때문에 시야가 좁혀지기도 합니다. 하지만 소중한 부분들을 포기해야하는 순간, 선택을 해야하는 순간은 찾아오기 마련입니다. 무척이나 괴롭겠지만, 혹시나 모릅니다. 정작 여태까지 소중하다고 여기던 것이 아무것도 아닐정도로, 더 큰 소중한 무언가가 나타날지도 모르니까요. 엘릭 형제가 인간다운 온전한 몸으로 더 큰 세계, 더 큰 진리와 세상의 원리를 찾아 나설 수 있게 된 것처럼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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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진리란 무엇일까요. 답은 허무하겠지만 아마 없다고 봅니다. 진리가 없다는 얘기가 아니라 딱히 정해진 바가 없는 것이죠. 애니 속 진리의 모습도 특정되지 않았으니까요. '새로운 세계에 얼마나 진심을 담느냐, 가치를 두느냐'. 그리고 그것을 위해 무엇을 감내할 수 있는지가 각자의 진리를 정의합니다. 진리는 절대적이지 않습니다. 다만, 미지의 세계와 나 자신에 대한 신뢰와 용기, 그리고 내려놓고자 하는 결단이 자신의 진리에 도달할 수 있는 핵심 열쇠임을 강연금은 이야기 합니다.
















더치페이 그래서 어떻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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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니 속 엘릭은 말 그대로 뼛속까지 연금술사였습니다. 연금술로 먹고 사는 사람이었고, 연금술을 포기한 이후에도 자신의 두 손으로 새로운 시작을 하기 위해 머나먼 여정을 떠납니다. 그만큼 자신의 삶을 사랑하는 캐릭터입니다. 그렇지만 그는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이지 자신만 바라보는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겉으로는 연금술에 미친 사람처럼 보일지도 모르지만, 동생을 위해 팔을 버리고, 인류를 위해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으며, 자신의 전부였던 연금술을 기꺼이 포기한 남자였습니다. 그래서 “내 인생의 절반을 너에게 주겠다”는 말은 정말 절반만 주겠다는 의미보다는, 절반 그 이상의 인생을 윈리에게 바치겠다는 다짐처럼 들립니다. 다소 더치페이스러운 멘트지만, 일종의 츤데레 같아서 더 로맨틱하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엘릭의 고백은 현 사회에서도 여전히 로맨틱할까요? 필자의 강연금을 통한 고찰은 바로 여기서부터 시작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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낭만이 사라진 사회가 점점 당연하게 여겨지면서, 효율적이고 이성적인 방식이 ‘선’이자 ‘정답’으로 받아들여지고 있습니다. 각박한 세상 속에서 스스로를 챙기기도 어려운 현실에, 다른 누군가를 위해 마음을 다하는 일은 사치로 여겨지곤 합니다. 그래서 점차 나와 직접적으로 관련 없는 세계에 선을 긋게 됩니다. 밥 한 끼를 나누는 식탁 위에서도 조차 선을 긋습니다. ‘어떤 마음으로 이 식탁에 임했느냐’보다는 ‘이 식탁의 가치를 얼마로 매길 수 있느냐’가 더 중요하게 여겨집니다. 가격에만 관심을 쏟느라 정작 식사, 그 이상의 것들을 놓치고 있는 건 아닐까요. '비합리적인 진심'으로 마주칠 수도 있었던 잠재적인 세계를 말입니다. 예기치 못한 공감, 감정, 심지어는 진정한 자아까지도요.



1) 모든 것은 하나로 이어져 있다는 점 2) 우리에게 주어진 부족함을 서로 의지함으로써 채우고, 진실된 관계를 이루어간다는 점 3) 자신을 내려놓음과 동시에 나만의 진리에 도달한다는 점


이 세 가지의 강연금 철학이, 이해관계로 얽힌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어떤 메시지를 주는지는 결국 각자의 해석에 달려 있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숫자 계산에만 매몰됨에서 벗어나, 그 이상의 가치들을 살펴봄에는 충분히 의미가 있다고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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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불필요한 가지들을 쳐내는 일은 필요합니다. 하지만 ‘이성적’이라는 틀 안에서 모든 관계를 재단하려 한다면, 그 관계는 새로운 발전으로 이어지기도 전에 시작조차 어려울 수 있습니다. 여기는 나 혼자 사는 세계가 아닙니다. 다른 사람들, 더 나아가 다양한 생물들까지도 함께 살아가는 세계이며, 이들을 완전히 정의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부족한 존재이기에 서로에게 기대며 살아갈 수 있고, 오히려 불완전한 관계 속에서 더 완전해질 수 있습니다. 그렇기에 완벽한 더치페이라는 건 존재하기 어렵습니다. 사랑뿐만 아니라 타자와의 관계 속에서 (심지어는 나 자신과의 관계에서 조차도.) 완전한 수치화는 어렵습니다. 등가교환의 법칙도 감정 앞에서는 소용이 없어집니다. 윈리가 엘릭에게 답했던 것처럼 말이죠.



누군가의 세계에 발을 들이고, 그 안에서 계산할 수 없는 감정과 교류, 심지어는 쓸모없다고 여겼던 것들까지 어우러질 때, 우리는 비로소 ‘진리’에 가까워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성’이라는 잣대를 내려놓는 그 순간, 더 값진 진리에 도달할 수 있다는 것. 아마 강연금이 더치페이에 대해 이야기한다면, 이렇게 답변을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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